Archive for March, 2007

T.S. 엘리엇 – 시작과 끝과 시작과…

Thursday, March 8th, 2007

우리가 처음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끝내는 것은 시작하는 것.
그 끝은 우리가 시작한 곳.

우리는 죽어가는 것들과 죽어간다.
보라, 그들이 떠나가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가느니.
우리는 죽은 것들과 태어난다.
보라, 그들이 돌아오고, 우리는 그들과 돌아오게 되느니.

이 사랑과 이 부름의 목소리에 이끌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으리니
우리 탐험의 끝은
우리가 시작한 곳에 도착하는 것,
그리하여 그 첫 시점을 알게 되는 것.

T.S. 엘리엇 [리틀 기딩] 부분

성공회 전례의 현실 I – 전례 행동들

Wednesday, March 7th, 2007

올 1월 초에 이메일로 한국 성공회 전례의 현실과 의미들에 대해서 나눈 생각들의 토막을 좀더 넓게 나누고자 이제야 여기에 옮겨 본다. 메일을 주신 분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첫번째 내용은 전례 상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거의 가감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 내용은 메일 주신 분의 고민과 더불어서 전례의 의미와 기본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두번째 글을 먼저 읽고, 첫번째 글로 돌아와 읽는 것도 좋겠다. 이 허튼 생각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소중한 경험과 통찰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어 소중한 질문을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주님의 평화

** 교우님 안녕하세요? 여러가지 전례 행동 상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사실, 어떤 것이든 문제를 제기하고 열어 놓고 함께 생각하고 공부하면 쉽사리 풀릴 수 있는 문제일텐데 그런 이야기 자체가 안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겠지요. 

우선, 질문하신 내용에 따라 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Q: 질문, A: 답변)
 
Q 1
집전자와 전례봉사자가 행렬을 하고 제대 앞에 섰을 때, 행렬십자가, 향로, 촛대, 복음서 등 물건을 손에 든 봉사자는 제대에 절(목례)을 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이 성당은 하는군요.

A 1
전례 봉사자들의 행동과 동작은 기본적으로 “상식”과 “자연스러움”을 기본으로 하면 된다고 봅니다. 십자가, 촛대, 복음서를 든 사람은 그 자세에서 예를 표하는 것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촛불의 경우 위험하기도 하구요. 또한 이들은 한 개인의 전례 참여자라는 위치보다는 십자가, 촛불, 복음서 등과 같은 상징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그것이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향로도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예를 표하기에 어색한 자세가 아니니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입당 시에 성물을 든 전례 봉사자들은 특별히 예를 표하는 행동을 않는다 정도로 정하면 혼란이 없겠지요. 

Q 2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초가 들어가는데, 성령축성기원 부분에서 복사가 초를 들고 제대 앞에 장궤하잖습니까? 성체, 성혈 거양 때, 마치 봉화불 치켜들듯 촛대를 올리네요. (저는 이런 예절은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A 2
굳이 성찬기도때에 촛대가 제대 앞에 나와서 – 어떤 경우는 종과 함께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 제대를 가로막는 행동이 자연스럽지도 않거니와 별로 의미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찬기도의 진행에 혼란을 주고, 어떤 특정한 순간 (축성 순간?)을 강조하는 행위로 보이는데, 이것은 성공회의 성찬례 이해와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특히 입당 순행 촛대는 기본적으로 “복음서” 혹은 “성서”라는 말씀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를 성찬기도에 들고 나와 사용하는 것도 그리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독서 때에 촛대가 나와 양 옆으로 서는 것이 좋을 듯하고, 이 때 역시 치켜 들 필요없이, 성서를 비춘다는 정도에서 들면 될 것입니다. 사실 촛대 사용 등은 주위를 밝히기 위한 실용적 사용이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례 행동에 의미를 과잉 부여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Q 3
성서 독서를 할 때, 성서나 미사 전례 성서를 펴서 읽는 게 아니라, 그 날 독서 부분만 프린트해서 표지에 끼워 읽고 있습니다. 복음서 봉독 때도 마찬가지인데 (성공회에서 즐겨 하는, 제대 앞 중앙에 나와 봉사자가 복음서를 받쳐 들고 읽는 방법), 저는 말씀의 전례의 핵심인 성서 봉독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성서 또는 미사 전례 성서에서 읽어야 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읽어도 되는 건지요?

A 3
교회의 처지에 따라서, 전례 독서용 성서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도 성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유감입니다.  실제로 주일 성찬례 독서용 복음서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신약성서만 든 큰 성서로 대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서를 “제대 앞 중앙”이라고 표현한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만, 신자들 가운데 가서 복음서를 읽는 전통은 정교회의 “베마”라는 성서 독서대의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제대 앞 중앙이기도 하지만, 실은 신자들 가운데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그러니 복음서 독서자(부제 혹은 사제)가 회중의 한 가운데 나아가고, 모든 회중들은 복음서를 향해서 자세를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Q 4
신부님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대한성공회 안에서는 독서자의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전혀 무관심합니다. 성서 독서를 할 때, 성서의 장절을 말해도 상관 없습니까? 저는 천주교 쪽에서 전례를 배운지라 (천주교 전례학과 성공회 전례학이 이런 부분까지 차이가 날 이유는 없을 겁니다만), 성서의 장절은 하느님의 말씀에 속하지 않으므로 (사람의 편의상 매겨 놓은 눈금일 뿐이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하는게 좋다고 알고 있는데요.

A 4
독서자의 훈련은 분명히 그 교회의 문제입니다. 성직자의 전례에 대한 관심도 문제이고, 또한 그 차례를 맡게된 독사자의 책임도 큽니다. 오래된 독서 습관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행 개정 기도서는 장절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정기도서의 지시만 따라도 될텐데요. 
 
Q 5
미사 때 대형 스크린에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단 게시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독서 때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는 독서자를 경건히 응시하고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5
성공회처럼 그리 크지 않은 성당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전례 전체의 집중성을 분산시키는 이러한 일들이 아마도 “한국 개신교”의 매우 비전례적 전통에서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요. 자기 예배 혹은 전례의 특성에 맞도록 그 맥락과 전반적인 일관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전례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살펴 볼 일입니다. 사실 프로젝트를 사용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나, 초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안내를 주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만, 이는 매우 제한적인 적용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독서에만 경청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만, 굳이 성서의 내용을 펼쳐 읽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까지 덜어주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시선까지 돌리게 하는 배치는 과잉 서비스인데다,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Q 6
오늘 성탄 대축일 미사 때, 행렬십자가 – 촛대 – 향 순서로 들어오더군요. 향이 선두에 서야 되는 것 아닌지요?

A 6
한국성공회에서 오랜동안 고쳐지지 않고 있는 관행입니다.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바는 한국성공회에서는 입당 순행 시에 향을 피워 입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변명할 수 있습니다만, 순서가 어색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입당 시에 향을 피워서 좌우 혹은 앞뒤로 흔들면서 십자가 앞에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Q 7
시편(화답송) 말미에, 영광송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무리짓는 의미로서의 영광송이 들어올 자리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하워드 갤리, [성공회 예전 안내서], 1998, 선교교육원)

A 7
이것 역시 여러 관행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시편 말미에 ‘글로리아 파트리’를 붙이는 것은 수도원 성무일도의 시편 읽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성공회에는 사실 평신도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무일도(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널리 퍼져 있다가(이것도 수도원식으로 드리는 방법이었겠지요), 지난 몇 십년 사이에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시편 말미에 늘 “글로리아 파트리”를 넣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지요. 성무일도의 시편 읽기와 성찬례에서 시편 읽기의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이를 붙이지 않는 것도 괜찮고, 전통적으로 있었던 “절기별 선후렴구’를 붙이는 것도 좋지만, 내내 문제는 관행과 이를 고치려하지 않는 문제, 그리고 성서 독서에서 시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들이 이런 관심을 허튼 생각으로 몰아붙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Q 8
성체, 성혈 거양 때 향 복사는 세 번씩 세 차례 분향하지 않나요? 두어번 하고 말더군요.

A 8
분향의 횟수에 대해서는 설들이 많거니와 다들 자기만의 이유가 있으니, 몇번이 맞다고 확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집전자에 따라서 하도 동작을 빠르게 해서 세차례를 할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 한 관행의 이유가 된 것인지도 모르구요. 어차피 제대 앞에서 성체 거양 시에 분향하는 행동 자체가 벽을 마주한 제대의 위치 선상에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회중을 마주하는 제대로 위치가 변경된 상황에서 굳이 제대 앞을 가로막고 분향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저 제대 한쪽에 서서 향로를 흔들면서 향을 피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Q 9
신자들이 영성체하고 나서 다시 제대에 목례를 하는데요, 이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셨으므로 제대에 절할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례와 신심 생활에서의 예절은 마음을 담되, 번잡하지 않고 간결한 것이 좋겠으므로… (사실, 현행 대한성공회의 전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된 전례와, 그 이전 시대의 관습들이 어지럽게 혼재된 인상을 다분히 받습니다.)

A 9
아마도 이런 혼란은 제대 앞에 나갈 때마나, 혹은 제대를 지나칠 때마다 예를 표하는 관행에서 나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빠르다고 봅니다. 굳이 제 2차 바티칸 전례 개혁에 빗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추천하기로는, 영성체를 하러 자리를 떠나서 통로 앞에 나왔을 때, 제대를 향해서 목례 한뒤, 영성체하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Q 10
이것은 성공회기도서 자체에 관한 의문인데요, 봉헌례 때 주례 사제가 헌금을 대상으로 기도를 하고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그러나 봉헌례에서의 중심이 되는 예물은 빵과 물과 포도주가 아닌지요? 봉헌례가 성찬의 전례의 준비 과정이요, 인간의 노동을 하느님께서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하신다는 신비와 은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고 봅니다만..

A 10
봉헌례의 예물은 빵(떡)과 포도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것이지요. 요즘 세상에는 대체로 봉헌은 헌금으로 대치되고 말기에 “돈”을 두고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게다가 개정기도서는 이를 두고 “봉헌기도”라고 밝혀 놓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성찬례의 진행에 동떨어진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기도서에 들어왔는지는 살펴볼 일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십자성호’의 남발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봉헌하는 이들의 마음에 대한 축복의 의미를 담게된 어떤 사목적인 이유에서 여기에 들어왔다고 추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를 가차없이 없애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기도서 개정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합니다만…
 
Q 11
영성체 때, 복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출석하고 있는 성당을 비롯하여, 대한성공회 내의 대다수의 성당들이, 영성체 순서에서 복사가 그냥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복사란 본래 시종직이 아닙니까? 주례 사제의 옆에 서서 전례를 돕는 봉사직인데, 그러한 의미가 대한성공회의 미사 전례 중에는 거의 퇴색되어 있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물론, 복사 서는 정해진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별 지역 및 본당마다 전례도 다를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져 온 관습과 전통이 있는데, 대한성공회 안에서는 그러한 전례적 관습과 전통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A 11
우선, “시종직”이라는 표현은 그리 썩 좋은 표현은 아니고, 다만 “전례 봉사자”들이라고 하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어떤 복사를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집전자를 돕는 복사를 말하신다면, 되도록 그가 제대 앞의 모든 집전 동작에서 집전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집전자의 선택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자연스러운 집전 동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텐데요. 성직자들의 이해와 의견이 제각각이고, 상황도 제각각이라 어떤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상식’과 ‘자연스러움’을 따르면 된다고 봅니다.

Q 12
오전 9시 미사에서, 미사통상문의 기도들, 즉 자비송, 대영광송 (둘 다 기원송가로 묶여 있습니다만), 신앙고백,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 양을 모조리 빼 버리시고 미사를 드리시더군요. 물론, 성공회기도서의 루브릭에는 몇몇 기도들은 빼도 된다고 지시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미사통상문의 이 기도들은 예배의 흐름의 핵심 뼈대라고 생각합니다만…

A 12
성찬례 전체 구조에서 지적하신 것들은 사람에 따라서 부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필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런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성찬례의 구조에 부가된 것이라고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평일이 아닌 주일 미사인 경우에는 되도록 성찬례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거룩하시다”는 성찬기도와 일체된 내용인데 어떻게 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경우 이른바 ‘fraction hymn’의 일종이니 다른 걸로 대치해도 좋고, 생략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13
주일 예배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대신 사도신경을 바치는데, 주일 및 대축일에는 전자를 더 권장하지 않는지요? 우리나라 천주교 역시 그렇게 권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본당들의 상황에서는 사도신경이 일반적인데, 일종의 편리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A 13
위의 질문과 더불어서, 신경의 문제는 각 교회가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경을 외우거나 읽을 때, 하지 아니함도 보다 못하게, 즉 너무 빨리 읽는다든지, 도대체 따라할 수 없는 곡조로 노래한다든지 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경을 노래로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가능하면 천천히 일치된 음성으로 또박또박 읽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사도신경은 역사적인 기원이 명확하지 않은 신경이나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이니 니케아 신경을 대신해서 읽는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신경이 설교 다음에 올 때에,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성찰할 시간도 주지 않는채 조급증처럼 빨리 와서 설교의 내용을 흐뜨러트리는 관행이 먼저 조정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Q 14
성탄 자정 미사 전의 구유 경배 예절은 반드시 지정된 것은 아닌가요? 빠져 버리니 아주 섭섭했습니다.

A 14
아직 이를 하나의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도 있습니다만, 지정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성탄 미사와 같은 미사를 누가 어떻게, 특별히 교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Q 15
대화를 진행하다가 미사보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미사보가 전례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차원인지요? 전례신학자들 및 [전례헌장] 등 현대 천주교의 전례 지침들은 다만 회중들은 경건하고 단정한 복장을 하기만을 권고할 뿐입니다.

A 15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들이 미사보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성서에 근거를 둔 성차별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행위의 전통과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경되거니와, 이것이 말씀하신대로 “개인의 신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기에, 개인의 판단에 맡길 뿐이지요. 

Q 16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개별 본당마다 전례를 비롯한 전통이 다를 수 있는데, 교우님처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여기에 “물론, 그 말씀은 옳습니다만,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져 온 전례적 전통과 예절 및 그 의미는 충실히 알고 행해야 되지 않나요? 하신 말씀처럼 따지자면, 신학의 중요한 하위 분과인 전례학은 용도폐기되어야 합니다”

A 16
“보편적”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이지요. 교회의 역사는 이런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서 억압을 자행하기도 했고, 또 “자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분열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다만 그 의미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가 행하는 전례 속에서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좀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례학이 신학의 하위 분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모든 신학의 총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전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신학이 전례를 만드는가? 전례가 신학을 만드는가? 최소한 전례적 전통의 교회는 이른바 “lex orandi, lex credendi” (기도의 법이 곧 신앙의 법)이라는 경구를 통해서 전례와 신앙(신학)의 관계를 보고 있으니까요.
 
Q 17
전례주의자라고 평가받으시는 신부님들도 꽤 봤고, 전례를 중시한다고 자부하는 분들 역시 주위에 많습니다만, 저의 오해인지, 대한성공회 내의 일반적인 인식은, 전례를 단순한 형식과 예법 정도로 여기는 듯 합니다. (‘전례정신’이 부재하다면 지나친 말씀이겠습니까?) 이러한 정도의 인식이 깔린 위에서, 나름대로 미사 전례를 활기차게 만들어보기 위해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의 요소들을 별 검증과 고민 없이 흡수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A 17
전례에 대한 강조와 “의식주의”(ritualism)는 분명히 다르지요. 사실 저도 성공회가 전례적인 교회라고 하면서 전례에 대한 이해 없이 관습과 외적 행동거지에서만 그럴 듯하게 보일 뿐이라는 비판적인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것이 제가 전례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례에 대한 잘못된 혹은 얕은 인식에서 두 극단이 생깁니다. 전례를 보수해야 할 어떤 외형적 자산으로 보는 극단이 있는가 하면, 전례를 교회 성장의 걸림돌 – 최소한 한국 성공회 안에서는 – 로 보는 극단이지요. 둘다 전례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봅니다. 

Q 18
어느 성당 성당 2006년 사목지침서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새 신자들의 부담과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고교회에서 복음주의(저교회) 개신교적 예배로” “타 교파 개신교회들의 예배 수시 탐방.” 이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례 예절을 단지 관습 정도로 여겨 오고 깊은 연구가 뒤따르지 않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고교회’라 규정하고, 복음주의적 저교회 예배 모델로 고쳐나가겠다니요? 어떤 명확한 기준이 없는 채로 아예 비전례성을 표방하고 있는 개신교파들의 예배 요소들을 받아들인다? 전례적 전통과 현대 전례신학의 개혁적, 현대적 흐름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그러면서도 젊고 활기찬 취향의 요소들도 받아들이는 미사 전례를 만드는 일이 대한성공회에서는 안 되는 겁니까? 아예 그런 의식 자체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위원 어르신들께서 비록 신앙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신학과 전례라는 전문 영역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입니다. 전문 영역에 대하여 교회의 장로님(!)들께서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는 실정인데, 성공회의 평신도 민주적 장점이 모든 분야에서 능사는 아니잖습니까?)

A 18
지적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는 하나의 극단과 편견을 드러낼 뿐이지요. 게다가 “고교회 전통”을 현재 실행되는 어떤 모양으로 거칠게 일반화하고, “저교회”를 복음주의적, 그리고 개신교적 예배로 지칭한다는 것이 얕은 분석을 드러내는 우리 신학의 서글픈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은 우선 저처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겠고, 성직자들에게, 그런 다음 평신도들에게도 있다고 봅니다.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Q 19
대한성공회가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물려 준 신앙 생활의 관습은 물려받았겠습니다만, 그것을 심화시키고 의미를 연구해 가는 일에는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렵겠습니다. 저 스스로 강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전례주의자, 율법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형식, 즉 공시성과 통시성을 가지는 기호체계는 의미와 마음을 담는 그릇일진대, 향을 몇 번 치고 행렬의 순서가 어떻게 된다, 전례 동작과 예절의 통일,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획일성 내지 율법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내의 예절의 형식들이 혼란하고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그 예절의 형식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교육되지 않았다는 뜻일테니까요.

A 19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Q 20
위의 질문들 가운데, 주일 미사 전례의 예절들, 특히 복사 예절들에 오류 내지 부적당한 것들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출석하는 성당의 관습을 따라 복사를 서야 됩니까? (저는 그렇게 하기가 정말 내키지 않습니다.) 물론, 어찌 되었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 더 좋겠고, 신부님 및 다른 복사들이랑 얘기해서 잘못된 점은 고쳐나가면 될 거라고 합니다만, 평신도인 제가 주제넘게 신부님께 이런 문제의 말씀을 꺼내기 참 어렵네요.

A 20
문제를 느낀다면 그런 문제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다만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할텐데요. 신부님께 문의하면서 “부드럽게” 제안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전례에 대한 계획과 교육을 담당하는 “전례위원회”를 만들어도 좋겠고, 이에 대해 관심을 많은 이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를 통해서 “타교파 개신교 예배 수시 탐방” 같은 것도 해서 의견을 나누되, 굳이 “개신교 예배”만 고집하지 말고, 천주교나, 루터교, 정교회 등 생각과 경험을 넓혀야 겠지요. 왜 “개신교  예배”로 한정짓는지 알 수 없군요. 한국의 개신교 예배는 기본적으로 미국 개신교라는 기원과, 그 안에서도 매우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를 담당했던 몇몇 그룹들을 모태로 하고 있는 아주 협소한 이해의 산물일텐데요. 전례의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좋은 질문으로 생각과 고민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생각나는대로 저도 답변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저도 이 문제들로 인해 여러가지 고민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프로젝트를 준비중입니다만, 그 통로를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가지고 다시 한번 연락드리지요. 새해에도 신앙이 깊어지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2007년 1월 1일)

성공회 전례의 현실 II – 기본에 관한 상념들

Wednesday, March 7th, 2007

올 1월 초에 이메일로 한국 성공회 전례의 현실과 의미들에 대해서 나눈 생각들의 토막을 좀더 넓게 나누고자 이제야 여기에 옮겨 본다. 메일을 주신 분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첫번째 내용은 전례 상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거의 가감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 내용은 메일 주신 분의 고민과 더불어서 전례의 의미를 다루는 기본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두번째 글을 먼저 읽고, 첫번째 글로 돌아와 읽는 것도 좋겠다. 이 허튼 생각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소중한 경험과 통찰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어 소중한 질문을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주님의 평화

** 교우님이 다시 주신 글을 읽으면서 아픈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들었습니다. 매우 좋은 전통의 교회에 찾아온 이들을 박대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떤 형태로든 도전을 받아들여 성찰을 깊이하지 않는 교회들의 현실에 저 또한 먹은 게 얹힌 것처럼 내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 이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주저 앉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차근히 한번 생각해보고 실마리들을 찾아 새로운 실타래를 마련할 밖에요. 

무엇보다 먼저, ** 교우님이 몇몇 교회 안에서 겪으신 경험들에 대해서, 그 논란 혹은 책임 여부가 어디에 있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저 마주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었어도 그러질 않을 텐데요. 대화를 중요시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을 신학적 성찰의 기본으로 삼았던 성공회 정신과 한참 동떨어진 경험들이 만연한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아픈 사례들을 함께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례들에 대해서 일일이 토를 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몇가지 드는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 교우님이 어떤 식으로든 교회 안에서 – 그것이 어떤 전통 안에 있는 교회나 교단이건 – 전례를 통한 신앙의 형성에서 염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점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건 또한 제 자신을 향한 독백이기도 합니다.

1.
편의를 위해서는 큰 의미의 전례와 구체적인 전례 행동들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런 다음 좀더 심층적으로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빗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으로서는 ** 교우님은 전례 행동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많은 문제들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얕기 때문에 생긴 게 분명합니다. 특별히 어떤 관습적인 행동이나 매우 이상한 행태들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거나, 다른 생각을 짓누르는 것은 그 관습과 행동을 지키는 것말고는 그 의미나 이상을 추구할 수 만한 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한국성공회 안에서 전례에 대한 논란 혹은 어떤 낭패감들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2.
사실 이것은 전례적 전통을 가진 모든 교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 교우님이 좋은 사례로 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불필요한 것에, 자잘한 행동들에 대한 의미 부여의 과잉이 문제인 경우도 많고, 그것이 폐쇄적인 교회적 권위와 연결되면 사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이런 처지에 한국성공회의 문제는 전례학적인 성찰이 교회의 현실 안에서 단절된지 오래되다 보니, 관습적 혹은 경험적 유산으로만 남아 있는 특정 전례 행동이 성찰의 권위가 사라진 빈 틈을 타서 군림하는 양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성찰없는 권위는 “오래된 신자” “대대로 신자” 혹은 “수박겉핥기로 맛보고 주섬주섬 이어서 만들어낸 근거 불명의 설명과 이에 곁들여진 약간의 억압적 권위”로 대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지요. 이러나보니 제대로 된 지식과 성찰이 다시 그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틈이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이른바 적반하장인 경우가 생깁니다. 저도 이게 걱정입니다. 공부하는 제 말에 얼마나 귀기울여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업습합니다. 사실 저는 제 말을 할 생각은 없고,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과 대화를 부추기면서, 이를 위한 근거들을 채워주는 일이겠지요. 그것이 전례학자들의 일입니다. 

4.
다만 여기서 책임소재를 물어 굳이 비판하고자 한다면, 제 자신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습니다. 평신도를 탓하기보다는 그 교육과 사목 지도의 책임을 가진 성직자들이 또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러 성직자들이 전례를 지도할 수 없는 권위와 근거가 부족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이를 “사목적인 배려”라는 이름으로 변명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지요. 

5.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풀어볼까? 아마도 대화의 창구들을 만드는 것이겠고요, 문제를 나누고, 근거를 찾아보고, 대안을 마련해 보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 교우님이 예로 들어주신 천주교의 “전례학 동호회”도 좋은 예입니다. 저 또한 이런 형태를 마련해보고자 노력해왔고, 그 때문에 홈페이지 질문 답변란 같은 것을 운영하기도 했지요 – 하지만 전례에 대한 질문은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성공회 위키 지식 백과 등과 같이 그것이겠고, 인터넷을 통한 “성공회 전례 포럼”이 그 예이겠습니다. 곧 띄워볼 생각입니다.

6.
이제 ** 교우님의 제기하신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성공회 쪽에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자료도 다시 뒤져서 확인해보지 않거나, 서로 물어보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기가 없으면, 황금이 옆에 있은 들 뭐로 하나 가공해낼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성공회 예전 안내서”도 성찬례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거니와, 이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 굳이 외국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맞는 좀더 창조적인 전례와 그 구체적인 행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자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관심이 더 중요한 거지요. 저도 멀리서나마 아직 공부하는 중에 있지만, 저 자체를 하나의 자료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물어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많은 자료들을 개개인이 흩어져 스스로 일일이 설렵하기보다는 이를 업으로 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참 빠르고 편할텐데요. 게다가 이러면 저같이 책상물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욱 현실감각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고립되어 왜소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

7.
이런 가운데, ** 교우님이 지적하신대로 천주교 쪽의 자료는 매우 중요하기도 합니다. 저라도 당장 신학교에서 전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현대의 중요한 전례 문서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전례 헌장”을 숙독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전례 헌장”의 정신이 전례 행동에 진정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험적 회의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례 헌장”의 핵심은 전례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러한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텐데, 많은 경우 천주교에서 전례는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더불어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방해하는 일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례 헌장” 자체의 신학적 문제와 한계도 명백히 지적되어야겠지요.) 매우 세심하게 규정된 전례 행동들은, 달리보면, 매우 세밀한 전례적 통제 장치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관 관계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적용할 때라야, 이른바 “헌장”의 정신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의 “의미”와 전례의 구체적 “행동들” 사이에 진정한 일관성이 마련되겠지요.

8.
성공회는 영국적인 성향이어서 느슨하거나 단호적 교리적 체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성공회 전통에서 형성된 하나의 기질(에토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공회의 신학하기(doing theology)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공회에는 이른바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 (magisterium)이 없으며, 이를 반대해왔습니다. 이러한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의 태도들은 개신교 내에서 그 창시자나 주도적인 신학자의 이름을 딴 어떤 “**주의”(-ism)로 잔존하고, 로마 가톨릭에는 그 이름 그대로 맹위를 떨치는 교리 체계로 남아 있습니다. 

9.
이 때문에 전례에 관해서 성공회는 매우 다양한 태도들과 더불어, 그 단계 혹은 정도가 천양지차로 서로 다른 전례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분명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공회의 태도와 전통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제는 이런 대화가 지속되지 못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역시 성공회를 개신교 편향, 혹은 천주교 편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한가지를 지적하자면, ** 교우님의 지적 속에서 성사와 관련하여 “람베스 회의가 종교개혁자들을 추종한 것”이라는 지적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에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성공회의 여러 교회들, 그리고 더 넓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와 같은 다른 교단 전통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해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나온 것이며,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두가지 성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자면… 어느 천주교 신자가 저명한 정교회 전례학자들에게 물었답니다. “정교회에도 칠성사가 있고 이를 행하나요?” “그럼요, 있지요.” … “허나, 칠성사뿐이겠습니까? 세상은 성사로 가득차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답니다.” 성사를 숫자로 따지는 것은 서방교회의 못된 관습 가운데 하나지요. 개신교나 천주교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10.
천주교의 신학과 체제에 대해서 바람직한 인상을 두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적시되지 않았기에 넘겨 짚는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제 자신이 신앙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천주교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도 천주교 쪽의 신학의 영향과 대화하고, 또한 교회의 현실도 아는 처지에서 바라보자면, 천주교의 신학 – 아무래도 교리가 되겠지요 – 과 체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쉽게 말해서 판단할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11.
“양형 영성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실은 이미 천주교회는 모두 떡과 잔을 모든 신자들이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독 안되고 있는 곳이 한국 천주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예외가 있긴 하지만). 오죽하면 저랑 같이 공부하는 여러 천주교 신부님들이 한국천주교는 바티칸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개탄을 할까요. 

12.
한국성공회가 이른바 “복음주의”를 운운하며, 이상한 개신교 흉내를 내고 있는 일은 개탄할 일입니다. 아무도 이는 앞서 말할대로 자신의 근거없음에 대한 어떤 열등의식의 발로이겠고, 달리 보면 작은 교단으로서 살아가다보니 생겨나는 생존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동정해할 지점과 비판해야 할 지점이 겹쳐있기에, 서로 상처나지 않도록 보듬고 품어서 길을 찾도록 서로 얼굴과 마음을 맞대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그러질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비관적이고 암울한 처지인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13.
“사족”이라고 하신 것에 대한 제 나름의 “사족”도 유효하리라 생각합니다.

# “독서대”의 중요성을 성공회가 폄하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라면, 설교대와 독서대를 나눠서 사용했던 문제들이 지적될 수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독서대와 설교대는 하나로 통일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설교자가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면 되지요. 복음서를 “회중 안에서” 읽는 전통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교회의 독서대인 “베마” (이것이 회중 한가운데 자리한 갓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를 좀더 역동적인 형태도 성공회 안에 적용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회중을 둘러 세워놓고 선포하신 말씀을 상징하기에 적절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천주교 미사와 성공회 미사를 비교하면서 이런 복음서 독서 전통이 참 그립웠습니다. 물론 공간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하고,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이를 억지로 행하는 것은 더 우습지요. 비좁은 곳에서는 독서대를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예배 중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는 저도 ** 교우님과 크게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전례의 공간적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종종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는 인근의 큰 천주교 성당이 있습니다. 일반 교회이면서 동시에 대학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전례를 통한 선교”에 열심인 이 성당은 전례 중에 “파워포인트”를 이용합니다만, 그리 어색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문제는 사용 여부,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 “전례가 곧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성공회만큼 중요하게 여긴 교회 전통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이 교회의 현실이 아닌 경우가 많을 뿐이지요. 지적하신 말씀에 절대로 동의합니다. 전례를 하나의 치장으로 보는 태도가 만연해 있거나, 일반적인 개신교처럼 “머리로만 드리는 예배”와는 달리 “몸과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전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 교우님은 여러가지 실망스러운 일들만 계속해서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매우 유감스럽고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몸담아 사랑하며, 자신도 변하면서, 그곳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그런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교회가 성공회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러가지 어처구니 없는 행태와 처지에서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대주교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공회는 교회의 일치와,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스스로가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라는 점에서 그 겸손함과 열림에 제 신앙의 자리를 둥지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전통이 있으면서도 허점이 많은 곳이기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어느 교회보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 교우님께도 감히 그런 제 경험과 고민 속에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성공회를 위해,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남아 애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깊고 좋은 대화의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2007년 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