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2007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7

Friday, December 14th, 2007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7

신약성서에서 가장 낯설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에 있는 한 구절입니다(11:16):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성서 기자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신실하고, 자기 만족에 안주하기보다는 신앙으로 앞을 향해 나가는 일에 신실했을 때, 그들이 진정한 순례자로 살아갈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으로 알려지는 것을 즐거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순례자들의 하느님으로, 즉 자신들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에, 여전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함을 향하는 여정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으로 선포하십니다. 올 10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중동에 있는 피난민 캠프에 방문해 본다면, 말 그대로, 철저히 집없는 자(홈리스)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 어떤 삶의 방책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같은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결코 어떤 만족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며, 항상 어떤 미래를 바라 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수치감도 없이 함께 하시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집없는 이들과 함께 집을 만들어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다른 의미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께서 “수치”로 여기시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괴상한 표현입니까. 이는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동반자로 삼는데 절대 괘념치 않으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함께 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경험을 우리 대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때문에 당황하고,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이 당황하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때로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 사람이 고함쳐 말하거나, 이상하게 행동하거나 하면,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라는 동반자가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와 앞으로 움직여 나가려 할 때,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당황해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런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고, 게다가 죄많은 인간을 동반자로 삼는 걸 “수치”로 여기실 지 몰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인정하고, 그들이 필요로하는 진리에 직면하려 할 때, 그 혼란스럽고 죄 많은 사람의 하느님이 되는 것을 행복해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 루가의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토록 자주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자기 의심과 기쁨 없는 갈망에서 나오는 흐느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러저리 헤매며 불안해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순례 길에서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걷는 것을 즐거워 하시기에, 우리가 함께 걷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그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아주 쉽사리, 죄 많고, 의심 많고, 또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일이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정말로 수치로 여기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히브리서의 말씀이 강력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들은 이미 그 여정의 종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미 완전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1고린 4:8에 나온 성 바울로의 분노어린 경멸의 말씀과 비교해 보십시오. –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걸 정말로 당황해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수치로 여기시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은 하느님이 필요없는 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희망과 용서가 필요 없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곤궁함을 아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성탄절에 그들과 함께 하시러 오십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죽고, 그들을 위하여 부활하시러 오십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물질적인 가난 뿐만 아니라, 자기 만족이라는 “부요함”이 없는 이들, 진정한 만족이 없는 이들, 자신들이 진정하고 온전한 인간성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축복을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바로 물질적인 재원이 없는 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건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과 필요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 봅시다. 함께 하면 수치스럽겠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런 다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고 물어 봅시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곤궁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세상을 껴안고 계신다면,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기쁨 주시기를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Translated by the Rev’d Nak-Hyon Joo)

* 캔테베리 대주교님의 육성으로 이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aco.org/acns/podcasts/

*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우상, 그리고 경계에 선 파수꾼

Monday, December 10th, 2007

매주 한국에 계신 신부님들께 보내드리는 설교 자료를 빌미 삼아, 짧은 생각을 보탰다.

대림절기는 역시 설렘과 희망의 절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전의 절기이기도 하군요.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도덕이 밥먹여 주냐? 경제와 추진력이 최고야!”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기세를 높이게 된 모양입니다.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투영해 누군가를 만들어보자고 하는군요. 우상이 하나 서고 있습니다.

이런 우상의 등장을 물 너머 하릴없이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도 이런 세태에, 현실이니, 시대정신이니, 생존을 위한 변화니 하는 미명을 들어 은근슬쩍 따라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오늘 성서 주해에서 보듯이, 신약학자 보른캄은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잘 정의했더군요.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가 서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들이 목숨을 내걸고 감옥에 갇혀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실 그분”을 재확인하고 결단하려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겹치는 저녁입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그리고 기억

Monday, December 10th, 2007

영국 천주교 신학자 니콜라스 래쉬(Nicholas Lash, 1934-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쏘아 붙였다.

Q. 당신은 마르크시즘에 대해서 동정적으로 글을 써왔는데요,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마르크시즘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이 관계할 필요가 있는 철학인가요? 왜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살아남을 만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N. Lash: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마르크스에 관계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헤겔과 관계할 필요가 있느냐며 의심하는 사람만큼이나 바보스러운 겁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의 핵심에는, 이 생산 양식의 기계적인 필연성이라 할 수 있는 “상품 형태의 보편화,” 그러니까 모든 사물들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들마저 상품성으로 변이된다는 통찰력이 있었죠.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 있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기념비의 말마따나, 마르크스 박사의 기념물을 찾는다면, 주위를 둘러보시오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

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격분으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미국처럼 메시아적인 자본주의에 이끌리고 매몰되어 있는 문화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가 동정심을 얻기 힘들다는 걸 이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를 당신 편으로 끌어들이지는 마세요. 20세기 영국의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역사가라면 누구나 말해 줄 수 있을테니까요. 지난 몇 십년 동안 끔찍하도록 지배적이었던 자본주의가 노동당을 해체하고 있죠. 그러나 원래의 사회주의적 전망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말이 안돼요. 우리는 그걸 기억하고 있거든요.

The Christian Century, Dec. 11, 2007: 32

역사적 실험과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한, 힘들다고 포기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듣겠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만 – 영국적인 자존심을 내세우고 미국을 약간 경멸하는 투로 – 이 미국인 인터뷰어를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사실 미국의 그리스도교계에도 이에 대한 “역사적 기억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왔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러 실험과 경험이 있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개신교 진영에서 “사회 복음”(Social Gospel, 라우센부쉬)이나, 로마 가톨릭에서 “가톨릭 노동자” 운동(Catholic Workers, 도로시 데이)으로, 그리고 성공회에서는 성사적 사회주의 전통(Sacramental Socialism, F.H.스마이스)으로 펼쳐지고 그 유산들이 여러 방식으로 살아남아 분투하곤 했다.

다만 20세기 초 중반에 이르기까지 활발했던 이 흐름이 그 이후에 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쇠퇴했는가 하는 점을 면밀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영국 노동당에 남아있다는 “사회주의적 전망” – 실제로는 유럽의 전 사회적 복지 정책과 관련한 소극적인 현실을 과장한 것이겠지만 – 은 조금은 애처롭게 들린다. 그만큼 “세계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자본과 “제국”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반증일까?

여전히 “기억”을 되살려, 새롭게 체현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싸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