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응시하며 노래하기
Friday, April 11th, 2008신학은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응시하게 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노래하도록 돕는 일일는지 모른다.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주체는 신학자가 아니다. 신학하기는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하느님 사건에 대한 증언이 서로 소통하도록 돕는 최소한의, 그리고 부분적인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많은 신학한다는 이들은 여전히 헛발질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소통을 자극하고 돕지 않는 한.
어떤 편만한 과잉 욕구가 교회 안에, 사람들 안에, 그리고 어떤 논의에도 자리잡고 있다. 무리하게 일반화하자면, 힘과 지배에 대한 욕구다. 그러나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내가 더 확실하다, 내가 더 순수하다, 내가 더 자유롭다, 내가 더 진실하다는 생각은 종종 자기 정당화의 덫을 놓는다. 위로부터 작동하는 계몽하고 지도하려는 권위주의는, 아래로부터 치받는 반성없는 과잉 비판 혹은 무책임한 비판과 짝을 이룬다. 말들은 그렇지 않아도, 어느 쪽이든 삶에 대한 깊은 응시와 책임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미 계몽과 비판은 과잉이다. 계몽과 비판의 언어 뒤에 자기 안에 또아리 튼 욕망을 감추는 게 습속이 되면 더이상 정직해 질 수 없다. 결국 자신을 배반할 것이다. 본색을 드러내고 깊이 대화할 일이다. 그게 서로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마땅히 여기에도 삶에 대한 따뜻한 응시가 바탕이어야 하겠다. 그래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아래 노래를 듣고 보며 든 짧은 생각.
그 참에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여러 장면이 겹쳤다. 물론 이 노래도.
Existentialism on Prom Night
…
There are moments when,
When I know it and
The world revolves around us,
And we’re keeping it,
Keeping it all going,
This delicate balance,
Vulnerable all knowing,
…
Sing like you think no one’s listening,
You would kill for this,
Just a little bit,
Just a little bit,
You would, you would…
Sing me something soft,
Sad and delicate,
Or loud and out of key,
Sing me anything,
we’re glad for what we’ve got,
Done with what we’ve lost
Our whole lives laid out right in front of u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