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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omments on: 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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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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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fr. jo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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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fr. joo</dc:creator>
		<pubDate>Mon, 01 Jun 2009 03:19:3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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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홍 / 최근에 일어난 슬픈 사건에 대한 생각을 다양하게 확대시켜 주시는군요. 우선 저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 &#039;홍&#039;님이 진척시킨 내용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참에 &#039;홍&#039;님이 블로그 하나를 개설하면 어떨까하는데요. 그럼 좀더 넓은 독자들과 폭넓고 속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글에 대한 논평은 아닌 것 같지만, 공감하는 면들은 빼고, 몇가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 불편함은 홍님의 &quot;개인주의&quot;에 대한 생각과 어떤 &quot;몽골&quot;적 &quot;민족주의&quot;가 서로 부합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나옵니다. 게다가 언급하시는 &quot;민족주의&quot;에 대한 생각은 여로모로 동의하기 어려워요.

1. 이번 사건을 통한 국민적 슬픔이 민족적인 이상과는 별 연관이 없으리라 봅니다. 오히려 말미에 말씀하신 &quot;이중성&quot;의 어떤 위선이 좀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2,3,4. 냄비 정신과 몽골적의 유목정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탁월한 상상력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어떤 국민적 에토스를 어떤 유구한 내재적인 민족정신 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비약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5. 교회의 여러 다양한 운동과 관련해서, 아거님이 참조하라 일러주신 사례는 여전히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공하는 것들입니다. 그 이념적 틀을 벗어나, 이런 전략이 리버럴한 교회, 혹은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가능할 것이냐 아니냐는 좀더 실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작은 교회들을 통해, 혹은 그 연대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6.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보수를 얕잡아 보았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연구할 생각보다는 &lt;a href=&quot;http://viamedia.or.kr/2008/09/12/229&quot; rel=&quot;nofollow&quot;&gt;조롱하고 멸시&lt;/a&gt;하는데 진력했어요. 그들이 &#039;노무현&#039;을 조롱하고 멸시했던 것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이었을까요? 그런데 수구들은 이 조롱과 멸시를 자신의 에너지로 삼았어요.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수의 생존전략과 경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에만 제한한다면, 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이 뭘까 하는데서 아직 답이 안나옵니다.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세심히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배우기까지 해야 하지만, 전혀 새로운 교회/신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이유는 이미 그런 교회에서 벗어나서 떠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을 위한 좀더 획기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8. 먹물들의 젠체하는 태도들과 어떤 대중적 &quot;우상화&quot;의 위험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봐요. 특히 요즘같은 상황에서. 그렇다면 지식인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서로 깊이 관여하는(engage)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말씀하신 &quot;Doubt Night&quot;는 멋진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9. 흠, 제 낙관은 회의에서 출발하는 편이라, 어떤 &quot;민족&quot;의 역량이나, &quot;진화&quot;에 대한 생각은 &#039;홍&#039;님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밖으로 밀려나간 자들과 하는 삶에 꿈과 이를 위한 저항과 도전이 진실한 어깨동무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홍 / 최근에 일어난 슬픈 사건에 대한 생각을 다양하게 확대시켜 주시는군요. 우선 저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 &#8216;홍&#8217;님이 진척시킨 내용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참에 &#8216;홍&#8217;님이 블로그 하나를 개설하면 어떨까하는데요. 그럼 좀더 넓은 독자들과 폭넓고 속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p>
<p>제 글에 대한 논평은 아닌 것 같지만, 공감하는 면들은 빼고, 몇가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 불편함은 홍님의 &#8220;개인주의&#8221;에 대한 생각과 어떤 &#8220;몽골&#8221;적 &#8220;민족주의&#8221;가 서로 부합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나옵니다. 게다가 언급하시는 &#8220;민족주의&#8221;에 대한 생각은 여로모로 동의하기 어려워요.</p>
<p>1. 이번 사건을 통한 국민적 슬픔이 민족적인 이상과는 별 연관이 없으리라 봅니다. 오히려 말미에 말씀하신 &#8220;이중성&#8221;의 어떤 위선이 좀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p>
<p>2,3,4. 냄비 정신과 몽골적의 유목정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탁월한 상상력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어떤 국민적 에토스를 어떤 유구한 내재적인 민족정신 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비약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p>
<p>5. 교회의 여러 다양한 운동과 관련해서, 아거님이 참조하라 일러주신 사례는 여전히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공하는 것들입니다. 그 이념적 틀을 벗어나, 이런 전략이 리버럴한 교회, 혹은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가능할 것이냐 아니냐는 좀더 실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작은 교회들을 통해, 혹은 그 연대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p>
<p>6.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보수를 얕잡아 보았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연구할 생각보다는 <a href="http://viamedia.or.kr/2008/09/12/229" rel="nofollow">조롱하고 멸시</a>하는데 진력했어요. 그들이 &#8216;노무현&#8217;을 조롱하고 멸시했던 것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이었을까요? 그런데 수구들은 이 조롱과 멸시를 자신의 에너지로 삼았어요.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수의 생존전략과 경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에만 제한한다면, 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이 뭘까 하는데서 아직 답이 안나옵니다.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세심히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배우기까지 해야 하지만, 전혀 새로운 교회/신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이유는 이미 그런 교회에서 벗어나서 떠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을 위한 좀더 획기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
<p>7,8. 먹물들의 젠체하는 태도들과 어떤 대중적 &#8220;우상화&#8221;의 위험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봐요. 특히 요즘같은 상황에서. 그렇다면 지식인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서로 깊이 관여하는(engage)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말씀하신 &#8220;Doubt Night&#8221;는 멋진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p>
<p>9. 흠, 제 낙관은 회의에서 출발하는 편이라, 어떤 &#8220;민족&#8221;의 역량이나, &#8220;진화&#8221;에 대한 생각은 &#8216;홍&#8217;님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밖으로 밀려나간 자들과 하는 삶에 꿈과 이를 위한 저항과 도전이 진실한 어깨동무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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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홍</title>
		<link>http://viamedia.or.kr/2009/05/27/661/comment-page-1#comment-13432</link>
		<dc:creator>홍</dc:creator>
		<pubDate>Mon, 01 Jun 2009 01:01:0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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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1.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 말 중에 &quot;국민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통과 국민들의 고통이 서로 통해서 그런 것 같다&quot;(정확한 인용은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많은 슬픔들이 우리의 집착이나 극히 개인적인 자기연민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슬픔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마음 깊게 추구하고 있었던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의 실종 그리고 이 가치와 이상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버리기까지 했었던 전체로서의 우리의 무기력함, 더불어 지극히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집착과 이에 대한 추구라는 이중성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2.
저는 한국인의 냄비정신을 이 계기로 다시 한번 탐구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냄비정신을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한국인의 얄팍한 심정을 비판하기 위해 표현하는 데 저는 이것에 결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감정이 빨리 달아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빨리 식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상에 대해 사적인 집착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냄비정신을 몽골정신이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몽고인들은 전쟁 시 뛰어났던 면 중에 하나는 필요할 때 순간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데 유연한데 있습니다. 집중과 분산이 자유롭다는 거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장점만을 갖고 있었던 전술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3.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할 때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집단적으로는 강한 반면, 한국인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집단적으로는 모래알 같다라는 분석을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볼 때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평가는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최근 위기 시나 큰 민족의 행사 시 온 국민이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저번에 주 신부님께 블로그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유치원이전의 아이들)이 대부분 혼자 놀지만 때때로 필요해 의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아니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위협에 대한 방어로써의 집단주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개인주의는 역사성을 무시한 체 자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쾌락주의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4.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따른 단시간의 방어와 항거가 커다란 역사적 방향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냄비정신이라는 단어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활활 끓어 올라서 혁명까지 완수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경향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저는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믿고 있습니다. 진화의 과정은 항상 불연속과 평형의 단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 있는 인류의 진보는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의 존재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합생, concrescence의 단계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한민족의 역사적 진보를 믿고 있고 다음 단계로의 전이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측하건대 꺼지는 단계가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의 속성상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를 수도 없고, 그러나 만약 이를 위해 극우와 극좌가 이 사건을 이용한다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진보는 후퇴할 수도 있다고 예측해봅니다. 그러므로 꺼지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에서 개개인의 각개전투가 중요합니다. 아니 전투가 아니라 개개인의 춤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진보 아니 흐름이라는 음악에 나는 나만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나누는 전투가 아니라 나와 너의 통합이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춤입니다. 이 춤은 역사에 대한 인위적인 행위에 대한 좋은 대체가 될 것입니다.  

5.
“악어”님께서 소개해준 링크에 들어가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얻은 통찰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소그룹 운동의 중요성과 이 소그룹 운동을 통합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물과 그 인물이 선포하는 실용적인 메시지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여기에서 더 이 그룹운동에서 깊게 연구해야 될 것을 꼽는다면 이 운동에서 나오는 긍정의 에너지입니다(이것이 미국 전반 문화에 흐르는 강한 흐름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기복적인 것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을 이 교회운동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적용을 시킨다면, 카리스마적 인물은 “노무현”이면 충분하며 그가 이루고자 했던 권위주의타파와 지역청산의 메시지 또한 그 운동의  실용적 메시지와 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주위와 우리가 속해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이러한 소그룹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6.
저번에 주신부님께서 이야기했듯이 노무현씨가 외친 상식 없는 나라를 상식과 원칙이 있게 만들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방식이 틀렸다는 것에 공감하며,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비상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기독교단체의 긍정의 에너지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론에서 이가 기를 타고 일어난다는 쪽입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시스템, 방법)는 자연스럽게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긍정의 에너지는 권위주의를 타파할 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위를 하나의 문화로써 인정하고 이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며, 지역구조의 청산에 있어도 우리 안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차별의식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대한 부정의 에너지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 내면에서 솟아 오르는 긍정의 에너지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단순한 표면적인 통합을 가져오는 에너지가 아니라 내적인 통합 다시 말하면 내적인 용서와 화해가 선행이 우선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말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외부를 향한 긍정의 메시지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명상의 판단 없는 “나” 에 대한 관찰의 힘과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가 같이 기본적으로 고민해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화해가 타협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용서가 자기 처지에 대한 합리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끊임없는 공시적 통시적 고찰과 탐구만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될 수 있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문제만 생기면 해답을 도출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습관을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기에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보화시대가 잘못 작용할 때 천박한 문화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해답은 수 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해답에 있어 어느 정도 강도 있는 성찰이 있느냐는 것이죠.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강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을 통한 깊은 탐험과 탐구를 말합니다.  끊임없는 순수한 탐구의식과 문제 제기가 어떠한 특정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앞에 말한 긍정의 에너지와 더불어 요구된다는 이야기입니다. 

8.
소위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자신이 무슨 틀과 방법을 만들어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의도가 무수히 우리 삶 속에 관찰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기는 이러한 의도 속에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 혹은 진보가 오도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가 우상화가 되고 예수의 죽음이 일반 민중의 죽음과 동떨어져 신비화 되는 과정에 지식인들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로 말하자면 노무현씨의 죽음과 정신이 신격화되고 일반민중의 삶과 동떨어지는데 이들이 일조한다는 것입니다.  즉 팩트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되고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팩트를 직, 간접적으로 죽인 자들이 이 과정에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왜곡이 생기고 이 왜곡에 수 많은 사람들은 세뇌당하는 불행한 현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추는 것이지 누구를 계도하려는 춤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청년부 “Doubt Night”을 이끌면서 느낀 것은 제 안에 누군가를 세뇌시키려는 의지가 끊임없이 작용한다는 것과 또 다른 한가지는 아무리 거칠고 순화되지 않는 언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의견일지라도 자세히 보면 상당한 통찰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선입견 없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와 인정욕구를 최대한 조절한 들음의 자세가 소위 지식인들한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9. 
저는 한민족의 역량을 믿습니다. 아니 인간성의 진화를 믿습니다.  이 시대에는 “나를 따르라” 라는 리더쉽보다는 “낮은 자를 섬기는” 리더쉽에 기반한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리더쉽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낮은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 없이는 이 리더쉽은 또 다른 억압과 착취, 가학, 자학 그리고 합리화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1.<br />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 말 중에 &#8220;국민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통과 국민들의 고통이 서로 통해서 그런 것 같다&#8221;(정확한 인용은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많은 슬픔들이 우리의 집착이나 극히 개인적인 자기연민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슬픔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마음 깊게 추구하고 있었던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의 실종 그리고 이 가치와 이상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버리기까지 했었던 전체로서의 우리의 무기력함, 더불어 지극히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집착과 이에 대한 추구라는 이중성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p>
<p>2.<br />
저는 한국인의 냄비정신을 이 계기로 다시 한번 탐구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냄비정신을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한국인의 얄팍한 심정을 비판하기 위해 표현하는 데 저는 이것에 결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감정이 빨리 달아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빨리 식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상에 대해 사적인 집착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냄비정신을 몽골정신이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몽고인들은 전쟁 시 뛰어났던 면 중에 하나는 필요할 때 순간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데 유연한데 있습니다. 집중과 분산이 자유롭다는 거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장점만을 갖고 있었던 전술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p>
<p>3.<br />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할 때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집단적으로는 강한 반면, 한국인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집단적으로는 모래알 같다라는 분석을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볼 때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평가는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최근 위기 시나 큰 민족의 행사 시 온 국민이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저번에 주 신부님께 블로그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유치원이전의 아이들)이 대부분 혼자 놀지만 때때로 필요해 의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아니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위협에 대한 방어로써의 집단주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개인주의는 역사성을 무시한 체 자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쾌락주의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p>
<p>4.<br />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따른 단시간의 방어와 항거가 커다란 역사적 방향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냄비정신이라는 단어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활활 끓어 올라서 혁명까지 완수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경향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저는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믿고 있습니다. 진화의 과정은 항상 불연속과 평형의 단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 있는 인류의 진보는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의 존재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합생, concrescence의 단계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한민족의 역사적 진보를 믿고 있고 다음 단계로의 전이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측하건대 꺼지는 단계가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의 속성상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를 수도 없고, 그러나 만약 이를 위해 극우와 극좌가 이 사건을 이용한다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진보는 후퇴할 수도 있다고 예측해봅니다. 그러므로 꺼지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에서 개개인의 각개전투가 중요합니다. 아니 전투가 아니라 개개인의 춤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진보 아니 흐름이라는 음악에 나는 나만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나누는 전투가 아니라 나와 너의 통합이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춤입니다. 이 춤은 역사에 대한 인위적인 행위에 대한 좋은 대체가 될 것입니다.  </p>
<p>5.<br />
“악어”님께서 소개해준 링크에 들어가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얻은 통찰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소그룹 운동의 중요성과 이 소그룹 운동을 통합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물과 그 인물이 선포하는 실용적인 메시지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여기에서 더 이 그룹운동에서 깊게 연구해야 될 것을 꼽는다면 이 운동에서 나오는 긍정의 에너지입니다(이것이 미국 전반 문화에 흐르는 강한 흐름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기복적인 것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을 이 교회운동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적용을 시킨다면, 카리스마적 인물은 “노무현”이면 충분하며 그가 이루고자 했던 권위주의타파와 지역청산의 메시지 또한 그 운동의  실용적 메시지와 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주위와 우리가 속해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이러한 소그룹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p>
<p>6.<br />
저번에 주신부님께서 이야기했듯이 노무현씨가 외친 상식 없는 나라를 상식과 원칙이 있게 만들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방식이 틀렸다는 것에 공감하며,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비상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기독교단체의 긍정의 에너지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론에서 이가 기를 타고 일어난다는 쪽입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시스템, 방법)는 자연스럽게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긍정의 에너지는 권위주의를 타파할 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위를 하나의 문화로써 인정하고 이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며, 지역구조의 청산에 있어도 우리 안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차별의식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대한 부정의 에너지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 내면에서 솟아 오르는 긍정의 에너지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단순한 표면적인 통합을 가져오는 에너지가 아니라 내적인 통합 다시 말하면 내적인 용서와 화해가 선행이 우선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말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외부를 향한 긍정의 메시지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명상의 판단 없는 “나” 에 대한 관찰의 힘과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p>
<p>7.<br />
우리가 같이 기본적으로 고민해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화해가 타협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용서가 자기 처지에 대한 합리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끊임없는 공시적 통시적 고찰과 탐구만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될 수 있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문제만 생기면 해답을 도출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습관을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기에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보화시대가 잘못 작용할 때 천박한 문화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해답은 수 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해답에 있어 어느 정도 강도 있는 성찰이 있느냐는 것이죠.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강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을 통한 깊은 탐험과 탐구를 말합니다.  끊임없는 순수한 탐구의식과 문제 제기가 어떠한 특정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앞에 말한 긍정의 에너지와 더불어 요구된다는 이야기입니다. </p>
<p>8.<br />
소위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자신이 무슨 틀과 방법을 만들어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의도가 무수히 우리 삶 속에 관찰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기는 이러한 의도 속에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 혹은 진보가 오도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가 우상화가 되고 예수의 죽음이 일반 민중의 죽음과 동떨어져 신비화 되는 과정에 지식인들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로 말하자면 노무현씨의 죽음과 정신이 신격화되고 일반민중의 삶과 동떨어지는데 이들이 일조한다는 것입니다.  즉 팩트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되고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팩트를 직, 간접적으로 죽인 자들이 이 과정에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왜곡이 생기고 이 왜곡에 수 많은 사람들은 세뇌당하는 불행한 현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추는 것이지 누구를 계도하려는 춤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청년부 “Doubt Night”을 이끌면서 느낀 것은 제 안에 누군가를 세뇌시키려는 의지가 끊임없이 작용한다는 것과 또 다른 한가지는 아무리 거칠고 순화되지 않는 언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의견일지라도 자세히 보면 상당한 통찰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선입견 없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와 인정욕구를 최대한 조절한 들음의 자세가 소위 지식인들한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p>
<p>9.<br />
저는 한민족의 역량을 믿습니다. 아니 인간성의 진화를 믿습니다.  이 시대에는 “나를 따르라” 라는 리더쉽보다는 “낮은 자를 섬기는” 리더쉽에 기반한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리더쉽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낮은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 없이는 이 리더쉽은 또 다른 억압과 착취, 가학, 자학 그리고 합리화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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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로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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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31 May 2009 15:12:3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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