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09

[공지] 블로깅 휴식

Saturday, June 6th, 2009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블로깅 휴식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한 두 달 정도가 될 성 싶은데, 그동안 부지런한 블로깅이 아니었으니 티가 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찾아주시는 분들과 구독하시는 분들 가운데 궁금해 하실까봐, 공지를 띄웁니다.

굳이 제 잡념의 근황이 궁금하시다는 분들은 트위터 주소에 오셔서 살피실 수 있습니다. 짤막한 생각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매주말에 트위터 내용이 블로그에 올라갈 것입니다.(기술 상의 문제 봉착) 하지만 눈여겨 보실 일은 없습니다.

기운을 새롭게 해서 다시 뵙겠습니다.

평화를 빌며 합장.

“맑은 감염”을 퍼뜨리는 일

Saturday, June 6th, 2009

상식적인 마케팅 원칙이 있다고들 한다. 20/80 파레토의 원칙이라고 하나? 전체 매출의 80%는 결과는 20%의 고객에 의해서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여러 조직 원리에도 적용하곤 한다. 십수년 전에 영적 멘토링에 관한 책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럴 듯하다. 누구는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해서, 주위의 12~15명과 어떤 일을 도모하라고 한다(말콤 글래드웰). 또 세스 고딘이라는 사람은 “First, Ten”이라며 잘 아는 첫 열 사람과 일을 시작하고, 그들이 싫어하면 그 일을 때려 치우고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우리 교회(성직자 사회나 교회)의 변화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이런 말을 오래 되새긴 바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실험을 해봤다. 다만 몸이 떨어진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블로깅도 그런 일환이었고, 성공회 카페라는 인터넷 프로젝트도 그런 차원이었다. 그리고 올초부터는 약 12명을 메일링리스트로 묶어서 이런 실험을 해봤다. 글을 묶어 보내기도 했다.

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적절치 않은 탓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대놓고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누가 답장하며 격려한 대로, 소리없이 퍼져나가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이 참에 Seth Godin 의 말을 되새기면 이렇다.

  • 열 명을 찾아라. 너를 신뢰해주고 존경하는 사람, 너를 필요로 하고, 네게 귀 기울이는 사람
  • 이 열 사람이 바로 네가 팔아야 할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그걸 원한다.
  • 그들이 그걸 좋아하면, 된 거다. 그들이 그걸 좋아한다면 그들은 다른 10명씩을 네게 소개해 줄 거다.
  • 이걸 반복하라.

그렇게 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신뢰와 존경과 필요와 경청”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니 이 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놓친 게 더 있다는 생각이다. 고딘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접고 새로 시작해라.

노력을 기울인 일을 접는 게 쉽지 않다. 새로운 상품이 어떤 것일지 모르겠다. 우선 놓치고 있던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기존에 했던 일들의 메아리는 좀더 기다려야 하겠다.

그 와중에 또 한가지 일을 제안했다. 트위팅에 관한 일이었다. 며칠 전 메일링 리스트에 있는 열 두어 사람에게 새로운 연 트위터를 소개했다.

굳이 트위팅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디어 도구를 어떻게 이용해 볼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처럼 열세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항체로서 “맑은 감염”을 퍼뜨릴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어 보냈다.

1. 소회: 지난 몇 주간 괴로웠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때문만이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행태(다른 교단을 더이상 나무랄 생각이 없습니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죽음에 대한 애증은 애증대로 남되, 우리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점은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습니다.

2. 우리 교회에 대한 사태 판단: 우리 교회는 현재 어떤 위기로 치닫고 있고, 그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위 한국식 “복음주의”라는 개신교 사고 방식과 행태에 물들고 있다는 것이고, 이른바 성공회 전통주의자라는 분들도 애초에 성공회의 정신과 그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얕아 권위주에만 기대고 있으니, 성공회의 존재 이유가 희미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정적 임계점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이미 이를 넘어섰나요?

3. 사회와 교계의 미디어 문제: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과 “론”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와 교회를 휘감고 있는 이 ‘언’과 ‘론’은 생명을 앗아갈 만큼 위험한 것들입니다. 특히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사고 방식을 퍼뜨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영향력을 저는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찾다 보니 그랬는데, 너무 악랄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거기에 우리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숨죽이고 있지요. 교회 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천주교의 수구적인 사고 방식과 잘못된 생각들이 여러 미디어들을 통해 퍼지고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4. 죽은 이에게 기대어: 제 블로그와 성직자 카페에도 인용해 올렸지만, 죽은 이에게는 또 다른 유언이 있었습니다. 행동 전략에 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관한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를 퍼서 나를 그릇에 관한 것이고, 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떠돌거나 지배하는 신앙적 담론들은 성공회적이지 않거나, 아예 그리스도교적이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거기에 세뇌당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운동은 ‘바른 말과 사고 방식과 성찰’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감염”됩니다. 잘못된 것에 감염되었다면, 그걸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특히 한국 성공회의 처지로서는 차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항체를 만들어야 하고, 바른 것으로 고쳐서 “맑은 감염”을 퍼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에 감염된 사람으로 예수를 감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대안은?: 지금까지 혼자서 여러 짓을 했습니다. 몇몇 분들도 다른 식으로나마 합세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도 계속해 볼 작정이고, 또 다른 방법도 강구할 것입니다.

그동안 감당못할 일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소홀한 것도 많았다. 누구 말대로 정신 팔지 말고 잠자코 앉아서 책상물림만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가족에게 미안하다.

그러면서, 괜히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진보적이고 능력있고 연륜있는 많은 이들은 뭐하고 있는걸까 하고 먼 하늘 바라보며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들 나름대로 고초가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오히려 지배받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저 잡념이다.

식별의 공간 – 어느 벗에게

Wednesday, June 3rd, 2009

서로 이심전심이라면서도 여전히 전화통 붙잡고,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공감하여 격려하는 임종호 신부님께서 “식별(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댓글에서 되새겨 주셨다.

나 자신이 달포 전에 어느 분과 편지를 나누는 가운데 이 식별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이 참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사적인 편지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에서 공개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고 나눈 편지이다.)

식별의 공간

… 우리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런 영적 식별이 깊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별이 깊지 않은 분들이 큰 소리를 내고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진취적 주장, 혹은 보수적 입장에서 판가름 날 일이 아닙니다. 그것 너머의 식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식별의 위기에 있습니다. 힘들어하시는 …님께 부탁하기는, 이 점을 화두처럼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님이 느끼시는 절망과 분노를 …님이 나누고 있는 하느님의 꿈을 펼쳐나가는 힘으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누히 말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여느 성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길에 들어섭니다. 성직에 들어선지 10년에 든 내 자신을 돌아 보면서, 여러 젊고 나이든 성직자들을 보면서 갖게 된 결론입니다. 밑에 적을 다른 지천의 허튼 말들을 말고라도, 이 말만은 꼭 기억해 주십시오. 나중에라도 이 기준으로 역시 저를 비판해 주십시오.

어떤 절망과 분노가 사람을 휘어잡으면, 아무리 명석하고 냉철한 분이라도, 자신을 사지로 몰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더욱 이 위험을 함께 염려합니다… 사람은 약하고, 사탄은 늘 그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 옵니다. 그러니 이를 보강해야 합니다. 식별의 끈 가운데, …님의 약한 고리를 찾아 내십시오.

사람의 생래적인 보호 본능때문에 이 고리는 깊이 감춰져 있습니다. 드러난다 해도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그걸 짚어주는 도전입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첫 생각 말미에 적은 “그저 몇몇 마음 맞는 이들과 책이나 읽으며”라는 말에 저는 염려합니다. 위로의 시급성때문에 자칫 도전이 감춰질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들의 도전에 열려 있는 것이 …님께 더 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 상해 있을 …님의 기분을 헤아리 못하고서 말한다고 타박하지 마십시오. …님의 삶의 목적이 그저 성직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리 하셔도 됩니다. 침묵으로 해결될 일입니다. 그 이후의 삶이 어떤지는 이미 우리 주위에 팽만합니다. 그리 마음 먹었다면 지금부터는 입바른 소릴랑 평생 접는 것이 적어도 위선자 소리를 듣지 않은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위선을 잘 변명하고 도통한 척 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 자신이 또다른 절망의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 낼 겁니다.

기도 속에서 함께 할게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박차고 오르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서, 그 내려져 숨죽이고 있는 손길들을 다시 발견하고 함께 손잡고 오르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