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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omments on: 오든 (W. H. Auden) &#8220;Night Falls on China&#82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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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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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fr. jo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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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fr. joo</dc:creator>
		<pubDate>Tue, 01 Dec 2009 13:18:3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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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김바우로 / 청정한 마음을 담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인 듯 합니다. 복된 대림절되시길 합장.</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김바우로 / 청정한 마음을 담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인 듯 합니다. 복된 대림절되시길 합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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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김바우로</title>
		<link>http://viamedia.or.kr/2009/11/19/731/comment-page-1#comment-13792</link>
		<dc:creator>김바우로</dc:creator>
		<pubDate>Sun, 29 Nov 2009 07:22:2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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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녕하세요.
신부님. 도서관이라는 직장의 특징때문에 주말에도 근무하고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서 주 신부님의 블로그를 방문하였습니다. 한시간 뒤면 퇴근이라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신약성서학자 서중석 연세대학교 교수님의 글을 빌렸는데, 그 글에서는 마태오복음서를 인용하여 마음이 청청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모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인기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을 좋은 대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039;깨끗한 부자&#039;가 되어 돈도 벌고 존경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해서 사회적 위치도 높이고 존경도 받을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오든 시인의 말대로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사실 이 글을 쓰는 저도 그렇고요...그래서 견진성사때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님의 안수를 통해 제 안에 오신 성령에게 마음속이 청청해지게 해달라고,그래서 하느님나라를 보게 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나 봅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안녕하세요.<br />
신부님. 도서관이라는 직장의 특징때문에 주말에도 근무하고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서 주 신부님의 블로그를 방문하였습니다. 한시간 뒤면 퇴근이라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신약성서학자 서중석 연세대학교 교수님의 글을 빌렸는데, 그 글에서는 마태오복음서를 인용하여 마음이 청청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br />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모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인기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을 좋은 대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8216;깨끗한 부자&#8217;가 되어 돈도 벌고 존경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해서 사회적 위치도 높이고 존경도 받을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오든 시인의 말대로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사실 이 글을 쓰는 저도 그렇고요&#8230;그래서 견진성사때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님의 안수를 통해 제 안에 오신 성령에게 마음속이 청청해지게 해달라고,그래서 하느님나라를 보게 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나 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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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민노씨</title>
		<link>http://viamedia.or.kr/2009/11/19/731/comment-page-1#comment-13781</link>
		<dc:creator>민노씨</dc:creator>
		<pubDate>Fri, 20 Nov 2009 13:02:3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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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주신부님 말씀 중에서 꽤나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구체적인 풍경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 느낌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quot;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quot; 
http://viamedia.or.kr/2008/05/08/213 

특히 &quot;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quot; 것의 풍경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토록 세속적인 욕망이 강박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그럴 수 있기는 한 것인지, 한편으론 회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길 바라면서.. 주신부님께서 좀더 일상적인 언어로, 좀더 낮게 내려온 세속의 언어로(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창했던 좀더 낮게 좀더 낮게 써야한다는 그 의미에서요) 그 풍경들, 그 욕망 가득한 곳, 그 욕망의 숙주인 몸에서 피어날 수 있는 신성한 소망들을 그려주시기 바라봅니다. 

추. 
트위터에 남기셨던 &#039;일치&#039;에 관한 논평 요청(^^;;)은 제가 워낙에 과문해서요... 
논평은 가당치 않고, 그저 좀더 읽어보고 궁금한 것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주신부님 말씀 중에서 꽤나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구체적인 풍경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 느낌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p>
<p>&#8220;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8221;<br />
<a href="http://viamedia.or.kr/2008/05/08/213" rel="nofollow">http://viamedia.or.kr/2008/05/08/213</a> </p>
<p>특히 &#8220;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8221; 것의 풍경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토록 세속적인 욕망이 강박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8230; 정말 그럴 수 있기는 한 것인지, 한편으론 회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길 바라면서.. 주신부님께서 좀더 일상적인 언어로, 좀더 낮게 내려온 세속의 언어로(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창했던 좀더 낮게 좀더 낮게 써야한다는 그 의미에서요) 그 풍경들, 그 욕망 가득한 곳, 그 욕망의 숙주인 몸에서 피어날 수 있는 신성한 소망들을 그려주시기 바라봅니다. </p>
<p>추.<br />
트위터에 남기셨던 &#8216;일치&#8217;에 관한 논평 요청(^^;;)은 제가 워낙에 과문해서요&#8230;<br />
논평은 가당치 않고, 그저 좀더 읽어보고 궁금한 것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8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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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fr. joo</title>
		<link>http://viamedia.or.kr/2009/11/19/731/comment-page-1#comment-13777</link>
		<dc:creator>fr. joo</dc:creator>
		<pubDate>Thu, 19 Nov 2009 18:27:2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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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민노씨 / 저도 아직 발견하고 있는 처지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못드리겠고요. 다만 &#039;전례&#039;에 관해 말하자면, &#039;몸&#039;의 발견이라 할까요. 특히 오든이 관심하는 &#039;사랑과 몸&#039;에 대한 것이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해보는 겁니다. 제 안경이 그러니까요. 

트위터에 적어 놓고 다시 돌아보니, 엘리엇은 &#039;몸&#039;이 관련된 전례보다는 실은, 시간에 대한 생각(교회의 전례력에 기초한)이 더 깊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도 크게는 전례의 범위에 속합니다만), 그래서 그는 훨씬 불교적이고 윤회론적인 사고 방식이 엿보이고요. (제 블로그에 몇 차례 엘리엇의 시를 번역해 올려 두었습니다. 약 10년 걸쳐서 &#039;리틀 기딩&#039;을 완역해 볼 생각으로요. ㅎㅎ)

오든은 저도 몇년 전부터 읽게 된 시인인데요. 그 삶도 삶이려니와, 훨씬 그리스도교적인 명제인 &#039;사랑&#039;에 천착하면서도, 그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날 것의 사랑 / 몸을 통한 사랑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전례(혹은 교회의 전례력)에는 이러한 몸의 사랑이 성찰하고 확장해가는 어떤 시공간이 마련되는 것 같고요. 

다시 돌아보니, 이 두 시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단순히 &quot;성공회&quot;라는 신앙 전통을 향한 회귀이기도 한데요. 이 신앙 전통이 좀더 신비의 영역, 도전의 영역에 열려 있는 탓이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 즈음에서 제 답글이 대단히 변증적인 냄새(이른바 전도 모드)가 농후해졌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만.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민노씨 / 저도 아직 발견하고 있는 처지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못드리겠고요. 다만 &#8216;전례&#8217;에 관해 말하자면, &#8216;몸&#8217;의 발견이라 할까요. 특히 오든이 관심하는 &#8216;사랑과 몸&#8217;에 대한 것이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해보는 겁니다. 제 안경이 그러니까요. </p>
<p>트위터에 적어 놓고 다시 돌아보니, 엘리엇은 &#8216;몸&#8217;이 관련된 전례보다는 실은, 시간에 대한 생각(교회의 전례력에 기초한)이 더 깊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도 크게는 전례의 범위에 속합니다만), 그래서 그는 훨씬 불교적이고 윤회론적인 사고 방식이 엿보이고요. (제 블로그에 몇 차례 엘리엇의 시를 번역해 올려 두었습니다. 약 10년 걸쳐서 &#8216;리틀 기딩&#8217;을 완역해 볼 생각으로요. ㅎㅎ)</p>
<p>오든은 저도 몇년 전부터 읽게 된 시인인데요. 그 삶도 삶이려니와, 훨씬 그리스도교적인 명제인 &#8216;사랑&#8217;에 천착하면서도, 그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날 것의 사랑 / 몸을 통한 사랑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전례(혹은 교회의 전례력)에는 이러한 몸의 사랑이 성찰하고 확장해가는 어떤 시공간이 마련되는 것 같고요. </p>
<p>다시 돌아보니, 이 두 시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단순히 &#8220;성공회&#8221;라는 신앙 전통을 향한 회귀이기도 한데요. 이 신앙 전통이 좀더 신비의 영역, 도전의 영역에 열려 있는 탓이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 즈음에서 제 답글이 대단히 변증적인 냄새(이른바 전도 모드)가 농후해졌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만. <img src='http://viamedia.or.kr/wp/wp-includes/images/smilies/icon_wink.gif' alt=';-)' class='wp-smiley'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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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y: 민노씨</title>
		<link>http://viamedia.or.kr/2009/11/19/731/comment-page-1#comment-13775</link>
		<dc:creator>민노씨</dc:creator>
		<pubDate>Thu, 19 Nov 2009 10:10:4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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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오든은 주신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인가요? 
저는 이번에 처음 접하는 시인입니다. 

추. 
트위터에도 남겼는데요. 
영국으로 귀화한 엘리어트와 미국으로 귀화한 오든의 공통점이 &quot;전례&quot;(liturgy)라고 하셨는데, 그 전례의 의미가 뭔지 구체적으로 잡히지가 않습니다. ^ ^; 좀더 풀어서 설명 주시면 고맙겠습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오든은 주신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인가요?<br />
저는 이번에 처음 접하는 시인입니다. </p>
<p>추.<br />
트위터에도 남겼는데요.<br />
영국으로 귀화한 엘리어트와 미국으로 귀화한 오든의 공통점이 &#8220;전례&#8221;(liturgy)라고 하셨는데, 그 전례의 의미가 뭔지 구체적으로 잡히지가 않습니다. ^ ^; 좀더 풀어서 설명 주시면 고맙겠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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