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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생각 –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의 성명서

Saturday, January 21st, 2017

올해 2017년은 1517년 서방교회의 개혁과 창조적인 분열의 사건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잉글랜드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이에 관해 공동 성명서를 내고, 종교개혁의 뜻을 되새겨 복음과 섬김의 사명으로 분열과 미움의 과거를 넘어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자고 촉구한다. 아래에 성명서 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싣고 원문 출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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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생각 –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의 성명서

올해 세계의 교회는 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의 중대한 의미를 되새길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교회의 사치와 도락에 저항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항의 비판문을 내걸면서 시작됐습니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기념 활동에 참여할 것이며, 유럽 대륙의 개신교 동반자 교회들과 행사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유럽 그리스도교인 안에서 일어난 쇄신이자 분열의 과정이었습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 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은 종교개혁의 공헌을 이어받은 것을 커다란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를 표할 것입니다. 그 많은 공헌 가운데는 은총의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한 일과 자국어 성서가 마련된 사건, 그리고 신자들을 불러 세상과 교회에서 하느님을 섬기게 하신 소명이 포함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또한 교회 일치의 훼손이 지난 5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것도 기억할 것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 가운데 일치하라 하신 분명한 명령에 반한 것이었습니다. 이 격동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싸웠으며, 많은 사람이 같은 주님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의 손에 박해받으며 고통당했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수 세기 동안 불신과 경쟁의 유산이 그리스도교의 세계 확장과 더불어 따라다녔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은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사람의 삶의 중심에 넣어주려 했던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올해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좀 더 어려운 질문,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교회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나누고 축하하는 길에 들어서자는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은 또한 지속적인 분열들에 관해서 우리가 관여한 부분을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다른 교회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이어야 하며, 그들과 나누는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500주년은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시작으로, 이러한 일의 기회를 더 많이 마련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 기념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진리 안에서 쇄신하고 일치할 것을, 우리의 분열들에 회개할 것을, 그리고 그분 안에서 함께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이 되기를 촉구합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영어 원문 링크 (캔터베리 대주교 홈페이지)

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

Tuesday, July 9th, 2013

지성주의든 반지성주의(cf. 리차드 호프스태터)든, 신학을 학문으로 천착하든 영성으로 해결을 보려 하든, 지난 십여 년간, 이런 흐름을 살피면서 눈에 선연하게 잡힌 현상 하나는 어떤 ‘게걸스러움’이었다. 몸에 좋다면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으려는 유혹이 지성이나 영성을 입에 담거나 훈련하는 이들에게서도 눈에 띄었다.

지성은 정보의 과잉에 유행의 과잉까지 더해 그 수사학과 속도가 현란하기만 하다. 현실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지성의 핵심이겠으나 유행하는 이론과 학자의 말에 올라타 자신을 치장하여 호객하는 모습이 비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이론을 통합하거나 꿰뚫는 초월적 인문 멘토를 자처하며 ‘인문학적 교양’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반지성을 부추기는 아이러니를 자행하기도 한다.

영성은 관심의 대상이 된 순간 상품화와 소비주의의 그늘에서 허덕인다. 영성의 핵심은 ‘비움’이다. 그 비운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이다(텅빈 충만!). 다시 말해, 사랑이다. 이 애틋한 공간을 마련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든 들어온 것을 소화하든 할 테지만, ‘도통’하겠다는 욕심이 지나쳐서 영적인 게걸스러움마저 느끼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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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나시” –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곳곳에 넘쳐나는 인문학 강좌니, ‘탈’자 붙은 신학 포럼이니, 무슨 영성이나 피정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들이 이 게걸스러움에서 자유로운지 살펴볼 일이다. 유행에 뒤져 초조해하듯,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제목이라도 주워섬기지 못하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까 봐, 시대에 동떨어진 사람이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무슨 영성 프로그램을 수료하지 못하거나 특정 기도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단계 뒤처진 신앙인이 될까 봐 좌불안석인 처지와 겹친다. 그리하여 명석하고 재치있고 도통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이 모양이다.

내 단견이고 오해이길 바란다. 게다가 이마저 없으면 겁도 없이 날뛰는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의 세상에서 견디는 일마저 힘들기 때문이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 권력의 부자들은 값싸고 푸짐한 연쇄점 햄버거로 사람들을 비만으로 만드는 동안(동시에 그들은 거기서 판매 이익도 얻는다), 자신들은 간추린 최고의 식단을 차려 받고 자기 건강을 관리한다.

그런데도 지성을 성취하고 영적으로 도통한 이들은 자신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으로, 실제 권력을 향해서 비판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핀잔하기에 바쁘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도통’에도 근접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이 지적/영적 비만과 교만을 만든다.

45년 전, W. H. 오든은 이렇게 적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제 사람들이 과거의 걸작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 더는 부자일 필요가 없으니 큰 축복이라 할 만하다. 값싼 책이나, 수준 높은 복제 기술, 그리고 스테레오 레코드를 통해 이 모두를 쉽게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쉽게 접하면서 오용이 되면(실제로 우리가 오용한다),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더 많은 책을 읽으려 하고, 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보려 하고, 더 많은 음악을 들으려 한다. 실제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폭식은 정신을 키워내지 못하며, 오히려 정신을 소비하게 한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을 곧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그저 어제의 신문에 난 흔적보다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피정의 한 패러다임 – 성모방문 축일

Thursday, May 30th, 2013

영국에 머무시는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의 스테파노 수사님이 다시 연락하셨다.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옛 이름: 성모왕문 축일)을 맞이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급히 번역했으니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기쁘게 받았다. 아침 시간을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을 글을 따라 읽으며 고쳤다. 이글은 피정은 굳이 성모왕문 축일을 위해 쓴 것은 아니며, 피정의 의미와 실천을 위해 루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를 그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것이다. 기꺼이 나눠주시고 대화와 교정의 기회를 주신 스테파노 수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한편, 몇 해 전 성모왕문 축일에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침 미사에서 나눈 강론이 생각났다. 다시 읽어보니 겹치는 고민과 발견이 많았음을 알겠다. “영혼의 친구: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 피정의 패러다임

보니 써스턴 Bonnie Thurston

몇 년 동안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인근에 있는 거룩한 섭리수녀회의 컨즈(Kearns) 영성 센터의 도움을 받고 협력하면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 영성 센터에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현대식 컨즈 채플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놀라운 만남을 묘사하는 예술작품들로 장식돼 있다.

채플 입구에는 전통 의상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뻐서 서로 맞이하러 달려가는 두 명의 아프리카 여인을 그린 미키 수사님(Br. Mickey McGrath, OSFS)의 훌륭한 ‘Windsock Visitation’이 걸려 있다. 채플에 들어서면 무릎을 꿇은 두 명의 여인 청동상이 있다. 엘리사벳은 머리를 숙였는데, 임신한 배가 볼록하게 불러있다. 마리아는 그 배에 손을 얹고서 생명의 움직임을 느낀다. 마리아는 경이로움에 차서 위를 올려다 본다. 채플 오른쪽 벽에는 타원형을 이루며 두 팔로 껴안고 있는 두 여인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실물 크기이다. 세 번째 원은 엘리사벳의 배이다. 그 구형은 엘리사벳의 옷단을 이루는 불꽃에서 일어나는 조각들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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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세속적인 형태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 예술품 앞에서 기도할 때, 이 성모 방문 광경을 표현한 예술 작품은 피정을 위한 한 패러다임, 또는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의 노래(루가 1:46-56)가 들어 있는 루가 복음서의 성모 방문 이야기(루가1:39-45)는 피정의 이유와 본질에 대해 깨닫게 한다. 피정 방식의 한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래에 말하는 내용은 피정의 한 형태에 관한 스케치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나 세세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고, 스케치하듯 개괄할 것이다. 여러분 자신들의 기대와 상황, 그리고 경험으로 “그 공백을 채우기” 바란다.

상담의 필요성

루가의 성모 방문 야이기(1:39-45)는 복되신 동정녀가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 때문에 많이 놀란 수태고지 이야기(1:26-38) 바로 다음에 나온다. 생명은 우리에게 많은 놀라움을 준다. 때로 최상의 전략은 지혜롭고 믿을 수 있는 어른과 상의하는 일이다. 루가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도 놀라운 일들을 겪고 있는 사촌 엘리사벳(그의 특별한 임신 이야기는 1:5-24에 나온다)에게 찾아간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두 여인은 확신과 위로를 받는다.

피정에서 영적으로 연배가 더 높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피정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는 완전히 상호 의존적이다. 지도자와 지도를 받은 사람 모두가 그들의 만남을 통해 은총을 받는다. 마가렛 파즈단(Margaret Pazdan) 수녀님은 이렇게 썼다. “두 여인은 경청하는 귀와 집중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친척인 두 여인은 그들이 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서로 나눈다.”

여정과 기대

피정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란 동네에 살았다. 엘리사벳은 유다 지방 예루살렘에 가까운 뜨겁고 건조한 산골 마을에 살았다. 이 여행은 갓 임신한 여인에게는 멀고 힘든 남쪽 지방을 향한 것이었다(우연이었을까? 예수는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지난다). 마리아는 걸어갔을까? 혼자 가지는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갔을까? 그는 어떤 위험과 두려움을 겪었을까? 적어도 마리아가 “서둘러 급히 떠났다”(1:39)는 사실은 분명하다. “모든 여정은 첫걸음으로 시작한다”는 속담은 옳다. 마리아처럼 그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피정 여정을 준비하는 이들은 그 기대감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알았고, 곧 있을 그들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도우러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장 26절의 “여섯 달”은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1:36)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석 달 쯤”, 어쩌면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이 차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머물렀는지 모른다. 이 경우, 마리아는 1장 57-59절에서 말하는 사건들 현장에 있었으리라. 우리 역시 기대를 하고 피정에 들어간다.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 혹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거나 방문해 주길 바란다. 새로운 삶을 구하며 중요하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주기를 기대하며 피정에 들어간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을 돕기 위해 피정에 온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피정자 각자는 ‘협조자’이다. 각자는 자신의 기도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찾아 피정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책임을 져야한다. 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기다림과 알아봄

피정 여정을 떠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피정의 집(혹은 교회)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육체적 편의를 준비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피정 인도자나 강사는 우리를 위해 공부하고 기도했다. 우리를 알지도 못하고, 오든 안 오든 개의치 않는 일반 호텔에 예약한 휴가와는 전혀 다르다. 피정에서는 누군가가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루가는 갈릴래아에 사는 마리아가 유다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1:36)을 알았다고 분명히 한다. 엘리사벳도 어떻게든 마리아의 방문을 알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이가 뛰놀았다(1:40-41). 엘리사벳과 배 속의 아이(세례자 요한)는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알아봄은 피상적(‘아, 사촌 왔구나’)이지 않다. 더욱 깊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1:42-43)로서 “복되신”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보았다.

피정에 가면, 이를 준비하는 분들은 우리를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를 기다리고 인사를 건넨다. 피정을 인도하는 분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한 더 심오한 지식을 얻으려 하고, 우리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누군가 우리를 기다려 주고, 누군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기다림과 준비의 손님이 된다는 복된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으로 그 복된 선물을 나눈다.

정체성 질문

피정 진행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동안 우리는 때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위기’를 겪거나, 난생처음으로 우리의 참 자아를 찾느라 분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에서 “내 완전한 정체성의 비밀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피정은 알려지지 않은 우리 자신, 숨은 자아를 만나게 한다.

수태고지 이야기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체성 위기’를 미묘하게 묘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요구받은 일(1:29)때문에 당황했다. 가브리엘은 더 많은 정보를 주면서 마리아의 지도자 역할을 하지, 그 행동 여부는 전적으로 마리아의 결정에 맡긴다(1:30-37). 엘리사벳의 경우, 천사는 임신 사실을 그의 남편에게 알렸다. 이때 엘리사벳은 “나를 찾아 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일종의 정체성 위기를 말한다. 한 사람이 처한 삶의 상황들은 우리들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두 여인은 머튼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 우리의 참 정체성을 창조하는(이탤릭체 머튼 강조) 하느님의 일에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피정은 이러한 창조와 재창조의 시공간이어야 한다.

상호 의존성

우리는 종종 결핍감과 고갈된 감정 때문에 피정을 한다. 고갈과 비어있음(emptiness)은 때로 하느님을 위한 선물이다. 이미 채워져 있으면 받을 수 없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순결한 비어있음을 이용했고 채우셨다. 엘리사벳의 불임성이 열매가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갈과 비어있음을 이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성한 지혜와 에너지로 그 안을 채운다. 이것이 바로 성모방문에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 찬가의 핵심이다. 하느님은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고, “배고픈 사람(비어있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해주셨다(1:48-49). 피정의 목표는 하느님의 주심과 우리의 받음이다. 우리의 비어있음과 결핍과 혼란을 들어 올려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은총의 선물을 받도록 “준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거래에는 상호성이 있다. 거대한 신비 속에 든 진리는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시고 그 신성한 자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 은총의 선물을 받고자 열려 있는 태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때로 그 선물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1:41,44). 엘리사벳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이야기를 확신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물을 주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었고 서로 자아의 선물이었다. 때로 우리가 그 은총의 선물을 가져온다. 때로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의 선물 자체이다.

통찰과 응답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통찰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피정을 한다. 때로 우리는 어떤 응답을 바라면서 피정을 한다.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끔 그 응답을 받기도 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정체성과 본성을 보는 통찰(1:42-43)과 그의 뱃속 아이의 응답(1:44)을 통해 뱃속 아기가 지닌 특별한 속성을 보는 통찰을 얻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한 메시지는 마리아에 대한 사촌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두 여인은 그들이 받은 통찰에 강하게 반응했다.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쳤다.” 마리아는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1:46-55). 마리아를 비춘 조명에 대한 마리아 자신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성서과 조상의 신앙에 뿌리를 둔 찬가였다. 이 찬가는 사무엘 탄생에 대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시편들과 이사야서를 메아리쳤다. 마리아의 “새로운 통찰”은 믿음 깊은 여인 한나의 경험과 마리아가 물려받은 신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회향 – 다시 집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그 누구도, 심지어 복되신 어머니일지라도 영원히 피정을 하며 머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알 필요가 있는 내용을 배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자아의 선물을 받고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과 함께 머물렀다. 그런 뒤에 마리아는 길고도 더운 길을 산만해진 배를 안고(그동안 3개월이나 배가 더 불렀다) 거슬러 다시 나자렛에 있는 집, 그리고 요셉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좋아하는 그 동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또 다른 위대한 피정 패러다임은 “예수의 변모”(마르 9:2-13; 루가 9:28-35) 사건이다. 제자들은 ‘피정 중인’ 산 위에 머물고 싶었다. 베드로는 ‘초막들’을 세우고 그 경험을 제도화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산 위의 경험들’, 즉 우리의 가장 좋은 피정에서 얻은 경험은 평지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 돌려줘야 한다. 아마 시나이 산에서 모세(출애 34:29-34)나 변모한 예수(루가 9:29)처럼 우리는 우리 얼굴을 빛나게 해야 하고 우리 삶을 빛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조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피정에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큰 환호와 음악 밴드가 우리를 맞아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잡초가 멋대로 자란 정원과 텅 빈 냉장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와 밀린 일들이 우리를 환영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피정이 필요했던 이유와 피정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피정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피정의 성공은 피정 중에 느끼거나 경험한 놀라운 체험, 혹은 그분의 얼굴에서 나온 빛이 우리에게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피정의 성공 여부는 피정이 끝난 직후 며칠이 아니라, 6개월 아니, 6년 후에도 걸림이 없는 아량과 사랑의 삶을 사는지에 달려있다.

복되신 마리아는 제때에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2:4) 엘리사벳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로, 그리고 작은 동네의 삶으로 돌아왔다. 마리아를 향한 요셉의 사랑만큼, 마리아는 요셉에게 신실했다. 그래서 요셉을 따라 불편한 환경에서 출산해야 하는 유대 지방으로 여행했고, 아들의 할례를 보았고, 아들에 관한 괴로운 예언도 들었다(루가 2:1-40). 나자렛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 세 사람은 이집트로 탈출하여 이방인으로 살았다(마태 2:13-15,22-23). 결혼 생활 동안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2:42) 예루살렘으로 가곤 했는데 모든 부모의 악몽인 아이의 실종(2:41-50)을 경험했다. 이 모든 소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2:19,51).

피정에서 우리는 비어있음이 은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피정 중에 얻은 통찰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통찰은 우리를 훈련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곳(늙은 여인과 처녀의 임신, 배우자의 기이한 행동, 자녀의 반항 등)에서 새 생명의 움직임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고 참 자아를 살고 삶의 환경들에 무분별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뒤집어 “소중히 간직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피정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뤄지리라는 믿음으로 복된 사람으로, 즉 변화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지 않고 ‘이상한 방식으로’ 어설픈 약장수가 되어 돌아와서는 곤란하다.

(초벌 번역: 최스테파노 수사, 수정: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