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행동 연재] 십자성호 – 고난과 축복

Saturday, March 2nd,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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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성호 – 고난과 축복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를 나누는 방법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례 전통에 따라 전례 교회와 비전례 교회로 나누는 것이다. 전자는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 그리고 자주 루터회를 포함한다. 후자는 개신교 대부분인데, 요즘은 개신교도 전례 전통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십자성호는 이런 구분을 잘 보여준다. 전례 교회에서는 기도를 시작할 때나, 성당에 들어설 때, 전례의 여러 순서에서 예를 표하거나, 마음을 준비할 때, 자기 몸에 십자가 모양을 긋는다. 이 행동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 때인 3세기 초 기록으로 보아, 더 오래됐으리라 추정한다.

십자성호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되새기는 행동이다. 그래서 성호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말이 늘 따라 붙는다. 굳이 말이 없더라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핵심이다.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모아서 몸에 성호를 긋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십자성호는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축복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우리 몸에 표현한다. 또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고난 끝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복락이 우리에게 펼쳐진다는 뜻이다. 사제가 십자성호로 축복할 때, 모두 성호로 응답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긋는 성호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을 뜻한다. 이 축복의 십자성호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세 손가락을 모아서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가를 작게 세 번 긋는 것이다. 이 전통이 더 오래됐다. 초대 교회는 복음을 읽을 때 이 방법을 적용했다. 생각과 언행과 마음 씀씀이가 자기 생각이 아니라 복음 말씀과 십자가의 뜻에 따라 이뤄지도록 축복하고 다짐한다. 성사 때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축복하거나 재의 수요일에 재를 이마에 바르며 십자가를 그리는 것도 이 전통에서 유래했다.

둘째 방법은 세 손가락을 모아서 이마와 가슴(또는 배), 두 어깨에 크게 긋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바닥에 온몸을 엎드리는 오체투지에서 나왔다고 본다. 몸이 땅에 닿는 부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섯가지 상처와 일치하고,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복종하여 헌신하겠다는 다짐이다. 아직도 정교회는 몸에 성호를 그은 뒤 마지막에 허리를 굽혀 다섯 손가락을 땅에 대는 관습을 유지한다. 큰 성호는 공동체 전례 순서 곳곳에서, 그리고 개인 기도 시작과 마침에 언제든 사용한다. 성호를 긋는 때를 꼭 특정하거나 제한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성당에 들어올 때, 기도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삼위일체의 이름을 말할 때, 영성체를 준비하고 마칠 때, 그리고 축복을 받을 때 꼭 하도록 한다.

교부들은 몸 전체에 긋는 십자성호를 친절하게 풀이해 주기도 했다. 머리에서 가슴(배)로 먼저 내려오는 순서는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성육신을 뜻하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긋는 순서는 세상 시작에서 세상 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뜻했다. 동방교회는 지금도 이렇게 긋는다. 어떤 연유에선지 10세기 이후 서방교회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성호를 그었다. 그에 따라 그 부분의 풀이도 달라졌다. 왼쪽에 있는 세상의 ‘염소’를 오른쪽에 있는 천국의 ‘양’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했다.

  1. 성공회 신문 2019년 3월 2일 치 []

[전례 행동 연재] 전례 행동의 원칙 –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Saturday, February 9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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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행동의 원칙 –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그리스도교는 다른 여느 종교 예식처럼 형식과 행동이 있지만, 그리스도교만이 지닌 흔들릴 수 없는 기본 원칙이 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삶이며, 이분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 공동체가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건을 축하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시공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의 사적이고 내적인 신심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더 나아가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그 신앙을 표현하도록 요청한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신자를 그 지체라고 설명하며 강조한 이유이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초대받고,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한 몸을 이룬다. 세례와 성찬례가 교회 공동체의 전례와 신학의 근거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전례 공동체는 몸으로 함께 신앙을 표현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그에 따라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정교회는 ‘일어서 예배하는 교회’, 로마가톨릭교회는 ‘무릎 꿇는 교회’, 개신교는 ‘앉아 있는 교회’라고 한다. 저마다 그 뜻과 강조가 분명하다.

일어서는 행동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를 상징한다. 무릎 꿇는 행동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성찰하며 참회하려는 표현이다. 앉는 행동은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설인 설교에 조용히 귀 기울이겠다는 생각이다. 교회와 역사의 특성에서 마련된 것이다. 성공회는 어떤 교회로 이름 지을까? 현대 전례 운동의 경험과 배움을 늘 존중하는 성공회는 전례의 흐름과 주제에 따라서 일어서고 무릎 꿇고 앉는 일을 모두 적용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뻐하며 여러 사람과 함께 한 몸을 이루려고 ‘춤추는 교회’라고 하면 어떨까?

춤추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전례 행동은 성찬례에 근거가 있다. 구원은 창조의 하느님, 구원의 그리스도, 변화의 성령이 협력하여 이루신 사건이다. 전례는 삼위일체의 행동 속에 드러난 협력과 친교를 우리 전례 안에서 닮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이 협력을 생각하여, 전례학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다시 정리한다.

첫째, 전례 행동은 성직자나 집전자의 역할만이 아니다. 전례에 참여한 모든 이가 전례의 집전자이다. 예배로 모인 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늘 되새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드러난 헌신을 기억하며, 변화를 만드시는 성령을 청원하여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모두 참여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로써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연결된다. 전례의 순간을 넘어서서 우리 일상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것도 신앙인 개인이 아니라 교회로 하나된 선교의 사명을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펼치는 것이다.

넷째, 전례 행동은 전례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축성의 순간과 같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순서와 그 행동에 저마다 소중한 뜻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되새기며 움직일 때 전례 경험이 더욱 선명해진다.

다섯째, 함께 모여서 드리는 이 전례 행동으로 우리는 개인으로 모여들었다가 교회라는 한 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운 몸인 교회 공동체의 형성이 전례의 중요한 결과여야 한다.

  1. 성공회 신문 2019년 2월 9일 치 []

[전례력 연재] 신앙의 시작과 끝 – 니콜라스 페라

Sunday, November 11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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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시작과 끝 – 니콜라스 페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기도서 2004>의 교회력은 새로운 기념일 제정에 사려 깊었지만, 성공회 전통을 우뚝 세운 성인들이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성공회 신학의 기틀을 세운 리차드 후커(11월 3일)나 성공회의 문학적 신앙 방법을 아름답게 드러낸 조오지 허버트(2월 27일)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또 한 명의 이름이 잊혔으니, 니콜라스 페라(Nicholas Ferrar, 1592-1637, 12월 4일)이다.

니콜라스 페라는 17세기 잉글랜드에 수도원 운동을 재건한 인물이다. 16세기 중반 헨리 8세는 잉글랜드에 있는 모든 수도원을 철폐했다. 수도원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데다, 이를 로마 교회에 헌납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부유함은 수도원의 이상과 맞지 않았고, 부패의 싹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의 철폐는 공동체로 기도하는 오랜 신앙 전통을 상실하는 표시이기도 했다. 페라는 폐허 위에 수도원 운동의 씨를 뿌렸다.

페라는 재산과 권력을 경계했다. 그는 중세 교회의 재산이 찬란했던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부제 성직을 받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려 하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수도회 전통의 회칙에 따른 삶을 시작했다. 버려진 교회를 고쳐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웃의 건강과 복지를 살피는 사목을 펼쳤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 생활에 충실했다.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성서 이야기와 삶의 교훈을 담은 그림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수도회에 대한 호감은 거의 사라졌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금식과 절제 생활도 꺼리는 현상이 많았다. 그 탓인지 페라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수도원은 곧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수도원 생활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을 되살리는 사례가 되었다. 그 씨앗은 2백 년 후인 19세기에 이르러 잉글랜드와 세계 성공회 전역에서 다시 수도회가 부흥하는 영적인 자산이 되었다.

현대 영미 문학계 최고 시인으로 손꼽히는 성공회 신자 T.S.엘리엇은 “리틀 기딩”(Little Gidding)이라는 긴 시를 남겼다. 그의 유명한 <사중주>로 편찬된 시집의 마지막 네 번째 장이다. 이 “리틀 기딩”은 니콜라스 페라가 내려가 수도원을 세웠던 마을이자, 그 수도원 교회의 이름이었다. 시인 엘리엇은 리틀 기딩을 방문하고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교회력은 세상의 달력인 11월로 마감하며 12월로 다시 시작한다. 12월은 교회 시간(교회력)의 시작 달이지만, 세상 시간(세속력)의 마지막 달이기도 하다. 한 해를 끝내는 시간에 겹쳐 우리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한다. 신앙인은 자신의 세상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따르라고 부름받은 사람이다. 니콜라스 페라는 세상의 권력과 부를 끝내고 작은 시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과 영성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보살폈다. 시간이 교차하는 11월과 12월, 낡은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이웃을 발견하고 보살피는 시간이 펼쳐진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1. 성공회신문 2018년 10월 27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