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Saturday, September 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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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길, 교회의 길 – 요한 크리소스톰 (축일 – 9월 13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박해 중에도 교세가 늘긴 했지만 순교를 각오하던 처지에서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는 종교로 변한 것이다. 그 파장은 컸다. 지루했던 신학 논쟁을 정치 권력이 나서서 정리했다. 필요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점차 세속 정치를 닮아갔다. 로마 정치의 위계질서와 권력 문화가 교회에도 들어왔다. 주교는 신앙의 교사, 사목자, 순교자라는 소명을 벗고, 점차 사회와 종교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피의 순교 시대가 끝난 349년에 태어났다. 홀로 된 어머니의 깊은 신앙 아래서 자란 그는 지식과 교양의 중심지 안티오키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지식인의 유행은 수도원에 한동안 들어가 호젓한 생활을 즐기며 겸양과 교양을 젠체하는 것이었다. 요한도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 생활과 공부를 자처하여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고 오히려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요한은 성 바실(330-373년)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이 사제 서품받기를 주저하는 이유를 나누었다. 사제직에 관한 그의 고민과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칭찬을 즐기지 않으며 자신의 성취[사제직]를 바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칭찬을 즐긴다면 그는 받기 원할 것이고, 그가 받기 원한다면, 나중에는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요한은 이런 고민을 안고서 뒤늦게 사제가 됐다. 이후 그는 뛰어난 설교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모스)이라고 불렀다. 그의 설교는 지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당시에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이 유행하여 성서의 가르침을 자기 멋대로 내면화하고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은 성서와 복음이 던지는 도전을 생활의 근거와 명석한 논리, 그리고 뛰어난 연설 기법에 담아냈다. 그의 설교에는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를 지켜내야 할 신앙인의 책임이 반복됐다. 마르고 작은 키, 큰 머리에 움푹 패인 눈을 한 그가 외칠 때 사람들은 예언자를 떠올렸다.

예언자 같은 주교가 쉽지 않지만, 그는 주교가 됐다. 398년, 군인들이 그를 납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주교로 성품한 것이다. 정치 관료들이 꾸민 이 일을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주교로서 전례 개혁에 공을 들였다. 그의 성찬기도를 근거로 한 ‘요한 크리스소톰의 전례’는 지금도 동방 전례의 표준으로 쓰인다.

그는 당시 주교들과는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멀리하고 정치인들과 벌이는 사교 모임에도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처세술이 부족하다고 동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고 그의 솔직한 설교와 의견으로 적도 많이 생겼다. 이미 만연한 성직매매, 신자와 성직자 모두 연루된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이 수많은 신자, 성직자 가운데 구원받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천 명 가운데 백 명도 안 될 겁니다.” 그는 황실의 향락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떠나 407년 9월 14일 흑해의 동부 해안 코마나에서 이생의 죽음을 맞았다.

438년 1월 28일,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서방교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9월 14일에 축일을 지키다가, 7세기에 십자가 축일이 지정되자 13일로 옮겨 지킨다. 동방교회는 그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날을 축일로 지킨다. 그는 이 생의 유배를 신앙의 순례로 삼아, 죽은 후에도 여러 곳을 옮기며 교회 신앙의 가르침과 본을 보여 주었다. 성인을 ‘교부’라 칭하는 이유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9월 8일 치 []

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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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아멘.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이 시간 이 공간에 당도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이고 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시작했던 길이었습니다. 극기와 절제, 기도와 봉사로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끝에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우리 발을 씻겨주시는 은총을 경험하고,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양식으로 베푸시는 마지막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셨던 한 청년이 정치와 종교 권력의 시기와 모함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장면을 멀리서,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때로는 비겁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절망 속에서 말입니다.

세상이 승리와 성공을 자축하며 자만감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의 영은 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해 침묵의 무덤에 갇힌 모든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성 토요일은 어두운 침묵과 희망 부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된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밤을 목격했던 세 여인처럼, 우리는 역사 안에서 부활을 새롭게 목격했던 성공회 신자 세 명의 음성을 만나려 합니다. 그들이 남긴 증언 속에서 부활밤에 담긴 아픈 상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희망과 치유를 나누려 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20세기 영미 시단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이라 불렸던 T.S. 엘리엇을 만납니다. 그는 연작시집 <황무지>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무슨 일 때문에 시인에게 4월은 그토록 잔인한 달이었을까요? 시인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생각했습니다. 병사만 9백만 명, 민간인 1천 9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 탓에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4월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너무도 깊고 아픈 상처가 어린 시간입니다. 4월 3일, 4월 19일, 그리고 여전히 가슴 저며오는 4월 16일. 신앙인은 우리 삶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은 고된 삶의 여정과 동행 속에서 얻은 상처 위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과 나눔, 희생 사랑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두 번째 인물은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 신부입니다.

“그 누구도 섬처럼 떨어진 사람은 없나니,
인간은 하나인 전체요, 한 사람은 그 대륙의 한 부분일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17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던 존 던(John Donne) 신부의 설교 한 대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제목이 되어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스페인 민중은 물론, 헤밍웨이 자신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던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군사 쿠데타 세력과 싸웠습니다. 소설가는 모든 사람이 불의에 저항하는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의 전쟁 경험에서 존 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삶에 이뤄야 할 사랑과 정의와 자유는 어느 사람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동떨어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돕고 연대하여 이뤄내야 해야 할 하느님의 일입니다.

존 던 신부 자신은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통을 통해 들여다보고 깊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과 그 생명은 뿔뿔이 흩어진 개체가 아닙니다. 그 한 인간 자체로 온 창조 세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입니다. 역사와 현실의 교회는 뿔뿔히 흩어진 생명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례에 초대하여 먹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을 축복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전례와 성사를 그 행동으로 삼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둠을 깨뜨리며 울려 퍼진 부활의 종소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의 세례를 받아 여기에 모인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라고. 한 몸인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놓인 존재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정의와 자유를 함께 축하하며 누려야 한다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시작이었던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활의 증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입니다. <생쥐와 인간>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인벡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신앙인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놀라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모르며,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인공 톰 조드는 권력에 쫓기는 몸이 되어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이제 너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냐?”
어머니의 애타는 물음에, 톰 조드는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엄마, 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어떤 사람을 때리는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거기서 나를 찾으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예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남녀의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의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오늘 여러분은 무덤가를 찾은 세 여인과 더불어,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바라보았던 세 명의 성공회 신자와 함께 부활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는 기억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호흡에 담긴 하느님의 숨결을 믿고, 그들과 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절망이 어둠처럼 지배하는 시간에도, 진실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세월을 견디며 세상의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세례받는 이들과 함께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악은 사라지고 죄가 씻어졌으며, 죄인에게는 용서를, 우는 이에게는 기쁨이 펼쳐지는 밤, 교만과 미움을 쫓고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주는 밤”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8년 3월 31일 부활밤 전례 강론 []

[전례력 연재] 교회력의 낯선 인물 – 본회퍼와 킹 목사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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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낯선 인물 – 본회퍼와 킹 목사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2004년 <성공회 기도서>는 1965년 <공도문> 이후에 나온 첫 개정 기도서이다. 되도록 예전 기도서의 관습을 여러모로 존중하려고 애썼다. 성인 축일에 관한 부분이 대표 사례이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도 성공회가 지켜왔던 축일로 1965년 공도문에 수록한 성인들의 기념일을” 대체로 수용했다(기도서 28쪽). 큰 변화도 있다. ‘기념일’ 항목에서는 “근현대사에서 그리스도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을 교회력에 넣어 기억하게 했다.

4월의 교회력에는 낯선 ‘기념일’의 주인공 두 분이 눈에 띈다. 디트리히 본회퍼(4월 9일)와 마틴 루터 킹(4월 5일)이다. 두 분은 지난 20세기, 무기력했던 그리스도교와 위태롭던 세계에 신앙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본회퍼(1906-1945)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루터교 목사였고, 킹(1929-1968)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총탄에 쓰러진 침례교 목사였다. 두 분 다 서른아홉 해의 생을 불태우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현대 성공회는 신학과 교회의 실천에서 두 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본회퍼는 탁월한 신학자였다. 당대 독일 신학계의 석학이었던 하르낙의 수제자였으며, 변화하는 현대 사회 안에서 설득력을 잃던 그리스도교에 날카로운 반성의 칼을 들이댔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여느 종교와 다름없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전만을 빌어주는 ‘값싼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참된 제자는 십자가에서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값비싼 은총’을 구한다. 신앙인은 세상의 고통을 나누고 세상이 던지는 위험의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독일의 독재자이자 유대인 학살자였던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사전에 발각돼 옥살이하던 그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3개월 전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킹 역시 촉망받던 신학자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학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이해한 그는 일찍부터 신학과 사목의 길을 결합하여 현장 사목자로 일했다. 킹은 교회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인간을 향한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비판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예수의 선교 방법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해하고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인권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는 모든 사람이 차별과 증오를 넘어서서 인종과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고 함께 어울려 만드는 사회를 향한 꿈을 노래하며 행진했다. 출애굽의 모세처럼 마침내 다다른 가나안 땅을 건너보듯이 자신의 운명을 말했던 다음 날, 킹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본회퍼와 킹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본회퍼는 뉴욕 흑인 동네 할렘가의 경험에서 인종차별과 가난의 문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킹 역시 본회퍼처럼 앞선 신학자들이 마련한 고민에 크게 기댔다. 신학과 신앙은 역사와 사회의 변화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답해야 한다. 신학의 성찰과 현장의 경험은 서로 뗄 수 없으며,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신앙의 언어로 세상과 대화하며 관여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가 만난다.

본회퍼와 킹은 어둠이 짙었던 20세기를 용기 있게 살았다. 하느님 앞에 솔직했고, 역사 앞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전례 안에서 우리 신앙과 실천에도 새겨져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성인들을 다시 만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3월 31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