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Monday, May 27th, 2013

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흐드러지고 바람도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잔인한 4월이 4.19 혁명 기념일에서 5월의 5.18,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도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역사를 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소위 ‘일베충’들과 수구 언론들은 인터넷과 방송으로 5.18 광주 민중 항쟁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수구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명인 조갑제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부끄러운 줄 모르는 허위와 거짓말이 범람하는 현상을 보며하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3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 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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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3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계속했나요?

(침묵)

오늘은 그리스도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지만, 그 모양과 활동은 독립적인 세 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세 분도 결국은 한 하느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논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분이라는 기이한 교리입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교리로 접근하면 삼위일체의 신비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를 세우려 애썼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서로 자기 설명이 맞네 틀리네 하며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정죄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서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 교리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은 셋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그냥 무작정 믿어야 할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창조와 구원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드러내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사랑으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본떠 만들어야 할 새로운 관계의 모델입니다.

16세기 러시아 수도자였던 안드레이 류블레프는 그 유명한 삼위일체를 나그네가 나누는 밥상의 친교로 표현했습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 응시하며, 서로 초대하고, 서로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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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냐시오는 삼위일체를 음악의 악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음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관계가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가 전체를 위해 서로 기여하고, 큰 몸, 한 몸을 만듭니다.

성부 하느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창조의 하느님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창조의 하느님’이란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과 환경과 우주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떤 차별도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존재하며,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자 하느님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겪으러 오셨고, 가난한 이들과 권력이 없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정치범 처형 방식인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구원의 하느님인 예수는 구원이 어떤 도통한 종교적 도력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애틋함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돌리는 행동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입니다. 정의는 바로 이 위에 서야 합니다.

성령 하느님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입니다. 성령 하느님은 모든 세상 위에 골고루 내려 생명을 키우는 단비 같은 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저마다 은총의 선물을 주어, 그 선물을 이용해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표현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오직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가슴에 품고 애틋하게 여기고 기도하고 사랑할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고 내 안에 초대하여 내 아픔으로 삼을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을 빌어볼까요? 삼위일체 하느님은 서로 지닌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며, 함께 시련을 이겨낼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밥을 나누고, 자신의 피를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와 역사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먹밥과 피를 나누었던 33년 전을 기억합니다. 서로 초대하고 감싸며 보살폈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여러분을 저 제대에서 나누는 밥과 피의 잔치로 초대합니다. 저 둘레에서 같이 먹고 나누며, 2천 년 전 예수가 나누던 밥상, 33년 전 닷새 동안 나누던 잔치를 기억해야 하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잔인한 4월, 잔인한 5월을 제대로 기억하며, 망각을 끝낼 수 있으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생명력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볼까요?

(침묵)

스트링펠로우 – 직업의 소명, 사제직의 소명?

Saturday, May 11th, 2013

요즘 스트링펠로우를 더더욱 되씹는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나는 어떤 이들에게 ‘별난 놈’이라 불리기도 하겠다. 오해라고 항변할 필요가 없다. 항변하거나 해명하며 시간을 허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트링펠로우는 ‘직업이라는 소명, 그리고 사제직의 소명’에 대해서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의 가치 때문이다. 복음의 가치에 회심한 용기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나이가 됐다.

아울러, 이달 말 서울에서 성직 서품을 받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하여, 여기에 그의 말 한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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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학생 시절에 어떤 특별한 이력과 출세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출세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의 전형적인 성공 기준이나 계산, 숭고한 척하는 목적, 도달하려는 목표에 대한 생각을 죽였다는 말이다… 도도한 척하며 이런 말을 하는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복음을 향한 내 회심의 한 면모일 뿐이다…

“이후에도 직업적 소명을 향한 야망을 거절하겠다는 내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나를 별난 놈이라 부를 사람도 있겠다. 법 공부를 시작할 때, 법률가가 된다는 일에 대해서 낭만적 환상이 내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내게 소명을 주시고 어떤 특별한 지침을 주셨기에 이런 일을 하겠노라는 식의 자의식에 멋대로 빠지지도 않았다. 변호사이든, 다른 어떤 직업이든 이런 환상에 나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단순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지금처럼 나는 하느님 말씀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라는 단순한 소명의 지평 안에서라야, 그 어떤 직업이나 일은 소명을 담아 전달하는 성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전문 직업이나 훈련, 학위 등은 그 자체로 절대로 소명이 아니다.”

“내가 사제가 되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저주였을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사제가 되지 않겠다고. 더 나아가, 내 생애를 바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좀 더 투철할 때라야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제도적 사제보다도, 아니 만인사제보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cf. 스트링펠로우 관련 글 모음: http://goo.gl/MstqW

신앙 멘탈리티의 틀, 그리고 마커스 보그

Thursday, February 9th, 2012

십수 년 전, 동료와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여러 근본주의 ‘기독교’ 교단들이 성공회를 비난한다는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위 근본주의적 개신교는 아예 우리와 다른 종교라고 여기고 접근해야 해요. 실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에요.”

지금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한다. 근본주의라는 종교 안에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등의 내부 분파가 있을 뿐이다. 누구를 규정하고 구획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병증, 혹은 환부라고 분명히 진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인 탓에 다른 여러 건전한 종교들과도 친연성을 나누기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탓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려, 몇 해 전부터는 성공회 전통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는 ‘개신교 멘탈리티’의 폐해를 몇몇 분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물론 이때 ‘개신교 멘탈리티’란 영미에서 발전한 독특하고 배타적인 복음주의와 연결된다. 그 특징은 전례와 성사에 대한 무지와 거부, 전통에 대한 몰이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접근, 그리고 창조 신학과 성육신 신학을 오해한 지독한 영-육 이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런 특정 형태의 ‘개신교 멘탈리티’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종종 진보 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이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도 비슷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언젠가 적은 대로, 전례적(liturgical) 전통의 교회와 비-전례적 전통의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분은 위에서 규정한 근본주의나 개신교 멘탈리티에 대한 언급에 그대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이해와 형성, 그 실천에 대한 접근에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신앙 형성의 틀이라고 할 만하다. 이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좀 더 적극 펼쳐 나가야 할 참이다.

이 와중에, 마커스 보그의 책 한 권을 들춘다. 성공회 신자인 마커스 보그는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한 짧은 소개와 우리말로 번역된 도서 목록은 여기를 참고할 수 있다. 그 역시 성서와 전통을 보는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전개한다. 현재 통용되는 여러 신앙의 언어와 용어, 개념들이 어떤 틀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아래 이식된 한국 교회에도 적절한 참고서일 것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인듯 하니, 우선 그 고민을 그 책 서문을 통해서 나누려 옮긴다.

마커스 보그,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그 의미와 힘을 잃었는가?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서문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우리 시대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 기본 어휘의 많은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용어들이다. 구원, 구원받다, 희생, 구속자, 구속, 의로움, 회개, 자비, 죄, 용서, 중생, 재림,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서. 게다가 신조, 주님의 기도, 전례 등과 같은 용어들도 그 성서적,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심각하게 왜곡된 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첫째는 근대 세계에 등장한, 언어에 대한 문자주의이다.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슷하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어떤 일반적 틀에서 해석하는 문제다. 나는 이를 “천당과 지옥”의 틀이라고 부르는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종종 그러하듯,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약 절반(아마 더 많을 것이다)의 미국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천당과 지옥’이라는 틀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틀은 죽음 뒤의 문제, 죄, 용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믿음 등을 강조한다. 다른 절반(아마 더 적을 것이다)의 신자들은 이런 틀에 당황해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로 옮겨 간 이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성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대안이 될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길어올린 것이다.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현대적 의미와 그와는 아주 다른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거듭해서,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이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거듭해서,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좀 더 오래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들을 21세기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과 연결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풍요로움과 지혜를 구원하여 재선포하려는 것이다. 실은 이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를 구원하기”라고 붙이려 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받아야 할 말임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구원자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성서적인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다시 말해 ‘구원한다’는 말은 노예 상태, 감금 상태,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로부터 구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구원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이미 예수, 하느님,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핵심에 관한 책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사안들은 여기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전의 책에 나온 사안을 다룰 때에도, 그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각 장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장은 보통 책의 한 장 길이가 되겠지만, 한 두 쪽인 것들도 있다. 다루는 사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설명이 필요하느냐에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이랄 수도 있다. 이런 입문서는 독서법을 가르친다. 독서는 낱말을 구분하고 발음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기존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읽고 듣고,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우리 신앙의 언어를 다시 읽고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