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의 순교와 5.18

Sunday, May 18th, 2014

사도 7:55~60 / 시편 31:1~5, 15~16 / 1베드 2:2~10 / 요한 14:1~14

2014년 5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오후 3시 성찬례, 주낙현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 
내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을 목격합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순교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루가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역사가입니다. 루가 복음서 기자는 스테파노의 증언과 선포가 어떻게 그의 순교와 연결되는지를 서술하며, 역사를 읽고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베풀었던 보살핌과 동고동락의 역사를 차분하게 요약합니다.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있었던 무리와 더불어 그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는 경험과 약속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이들은 자신 종교와 정치의 특권을 이용하여 보통 사람을 얕잡아 보고 율법으로 사람을 옥죄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마련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업적인 양 떠벌렸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결국에는 황금으로 만든 소를 섬겼습니다. 돈과 권력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의를 비판한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의 입을 빌려, 이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말한다고 다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도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불편한 진실 선포에 귀를 막았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을 진실로 여기고, 불편한 진실을 못 들은 체했습니다. 귀를 여는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실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폭력이 등장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한편, 사람을 죽이고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이들은 그저 수수방관했습니다.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성서는 이 세밀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합니다.

진실에 귀를 막고, 불편한 마음이 들자 돌을 들어 생명을 앗아가고, 참담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을 수수방관하는 상황, 이것이 스테파노의 순교가 일어났던 무대입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제대 위 정면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순교자 스테파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그는 슬픈 얼굴입니다. 슬픈 표정의 그는 자신을 죽인 돌을 자신의 옷에 주워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알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상한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나요?

이 모자이크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눈을 돌려 성당 밖 세상을 둘러봅니다.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그 향기를 품은 바람이 참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사람들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바로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은 통째로 잔인했습니다. 세월호의 참극이 벌어진 4월은 5월로 연이어 있고 우리는 그 세월을 살아갑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시인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 안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 되풀이하기 때문에 더욱 잔인합니다.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980년 5.18 광주 민중 항쟁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외부 세력의 선동과 개입으로 이뤄졌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이미 조사가 끝나서 확인된 사실과 진실을 세월의 망각을 이용해서 호도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인 조갑제 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5.18에 대하여 허위와 거짓말을 퍼뜨리는 현상을 보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과 진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 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4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 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밥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피를 나누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聖事)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4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우리 사회 속에서 계속했던가요?

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들에게 구박받고 버림받았다가 머릿돌이 된 돌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는 오해와 손가락질의 대상이고 버림받은 돌이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영적인 건물을 튼튼히 받치는 귀한 머릿돌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돌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러 쉴 곳을 마련하는 기초, 사람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지켜주는 집을 짓는 돌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돌입니다.

베드로서의 기자는 압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돌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인 돌”입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죽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돌을 만들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계속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다시 대성당 모자이크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스테파노 성인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의 신비로운 표정과 몸짓의 비밀이 풀립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던 미움의 돌을 자기 품에 주워담아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주춧돌로 쓰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의 역사가 되풀이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아픈 시선을 우리에게 보냅니다.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뜻은 ‘왕관’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서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신 예수님의 관을 받아드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테파노가 당한 ‘순교’(martyria) 본래 뜻은 ‘증언과 선교’입니다. 그는 세상에 나가 진실을 증언하는 일이 순교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순교가 바로 우리의 선교 사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역사에 담긴 아픔과 상처, 고통과 희망을 함께 기억하며, 역사를 새로 바라보고 진실을 알아내며, 새로운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그 생명의 길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Monday, May 27th, 2013

어느 5월의 삼위일체 주일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흐드러지고 바람도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잔인한 4월이 4.19 혁명 기념일에서 5월의 5.18,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도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역사를 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소위 ‘일베충’들과 수구 언론들은 인터넷과 방송으로 5.18 광주 민중 항쟁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수구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명인 조갑제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부끄러운 줄 모르는 허위와 거짓말이 범람하는 현상을 보며하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3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 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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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3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계속했나요?

(침묵)

오늘은 그리스도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지만, 그 모양과 활동은 독립적인 세 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세 분도 결국은 한 하느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논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분이라는 기이한 교리입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교리로 접근하면 삼위일체의 신비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를 세우려 애썼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서로 자기 설명이 맞네 틀리네 하며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정죄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서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 교리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은 셋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그냥 무작정 믿어야 할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창조와 구원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드러내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사랑으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본떠 만들어야 할 새로운 관계의 모델입니다.

16세기 러시아 수도자였던 안드레이 류블레프는 그 유명한 삼위일체를 나그네가 나누는 밥상의 친교로 표현했습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 응시하며, 서로 초대하고, 서로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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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냐시오는 삼위일체를 음악의 악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음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관계가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가 전체를 위해 서로 기여하고, 큰 몸, 한 몸을 만듭니다.

성부 하느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창조의 하느님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창조의 하느님’이란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과 환경과 우주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떤 차별도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존재하며,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자 하느님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겪으러 오셨고, 가난한 이들과 권력이 없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정치범 처형 방식인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구원의 하느님인 예수는 구원이 어떤 도통한 종교적 도력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애틋함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돌리는 행동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입니다. 정의는 바로 이 위에 서야 합니다.

성령 하느님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입니다. 성령 하느님은 모든 세상 위에 골고루 내려 생명을 키우는 단비 같은 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저마다 은총의 선물을 주어, 그 선물을 이용해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표현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오직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가슴에 품고 애틋하게 여기고 기도하고 사랑할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고 내 안에 초대하여 내 아픔으로 삼을 때 경험하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을 빌어볼까요? 삼위일체 하느님은 서로 지닌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며, 함께 시련을 이겨낼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밥을 나누고, 자신의 피를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와 역사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먹밥과 피를 나누었던 33년 전을 기억합니다. 서로 초대하고 감싸며 보살폈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여러분을 저 제대에서 나누는 밥과 피의 잔치로 초대합니다. 저 둘레에서 같이 먹고 나누며, 2천 년 전 예수가 나누던 밥상, 33년 전 닷새 동안 나누던 잔치를 기억해야 하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잔인한 4월, 잔인한 5월을 제대로 기억하며, 망각을 끝낼 수 있으니까요. 그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생명력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볼까요?

(침묵)

스트링펠로우 – 직업의 소명, 사제직의 소명?

Saturday, May 11th, 2013

요즘 스트링펠로우를 더더욱 되씹는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나는 어떤 이들에게 ‘별난 놈’이라 불리기도 하겠다. 오해라고 항변할 필요가 없다. 항변하거나 해명하며 시간을 허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트링펠로우는 ‘직업이라는 소명, 그리고 사제직의 소명’에 대해서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의 가치 때문이다. 복음의 가치에 회심한 용기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나이가 됐다.

아울러, 이달 말 서울에서 성직 서품을 받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하여, 여기에 그의 말 한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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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학생 시절에 어떤 특별한 이력과 출세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출세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의 전형적인 성공 기준이나 계산, 숭고한 척하는 목적, 도달하려는 목표에 대한 생각을 죽였다는 말이다… 도도한 척하며 이런 말을 하는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복음을 향한 내 회심의 한 면모일 뿐이다…

“이후에도 직업적 소명을 향한 야망을 거절하겠다는 내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나를 별난 놈이라 부를 사람도 있겠다. 법 공부를 시작할 때, 법률가가 된다는 일에 대해서 낭만적 환상이 내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내게 소명을 주시고 어떤 특별한 지침을 주셨기에 이런 일을 하겠노라는 식의 자의식에 멋대로 빠지지도 않았다. 변호사이든, 다른 어떤 직업이든 이런 환상에 나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단순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지금처럼 나는 하느님 말씀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라는 단순한 소명의 지평 안에서라야, 그 어떤 직업이나 일은 소명을 담아 전달하는 성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전문 직업이나 훈련, 학위 등은 그 자체로 절대로 소명이 아니다.”

“내가 사제가 되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저주였을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사제가 되지 않겠다고. 더 나아가, 내 생애를 바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좀 더 투철할 때라야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제도적 사제보다도, 아니 만인사제보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cf. 스트링펠로우 관련 글 모음: http://goo.gl/Mst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