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이빨을 드러낼 때, R.S. 토마스를 읽다

Friday, May 6th, 2011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 R. S. 토마스(1913-2000)를 찾는다.

세를 부리는 힘들이 사람을 곤고하게 하여, 때로 그에 대한 분노에 자신을 놓아 버리려 할 때. 모두 상처입은 짐승들인 처지에, 그 이빨을 드러낼 때. 아울러 상처입은 사제직의 본연과 긴장을 놓치려 할 때. 질시가 오해를 일으켜 주위에 퍼지고, 모욕과 배신감에 다다를 때. 그리하여 미움과 두려움이 영혼을 먹어치우려 할 때. 그리하여 이때다, 하고 악마가 속삭일 때.

아니, 그저 이름 없는 “시골 성직자”인 벗들이 그리울 때.

굳게 닫힌 방을 뚫고 들어오시어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며 인사를 건네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처럼, R.S. 토마스를 읽는다.


무릎을 꿇고

지극히 고요한 순간들
돌로 지은 교회의 나무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여름날, 하느님을 기다리니
계단 위의 바람이 말을 하고
햇빛은 정적 속에서
나를 감싸느니, 내가 마치
위대한 주역을 연기한 것처럼. 그리고 청중,
빽빽이 모여든 그 영혼들은 가만히
기다리나니, 나처럼,
그 말씀을.
제게 일러주소서, 하느님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제가 말할 때,
그 말 속에서 비록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저를 통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니,
그 뜻을 기다립니다.

R. S. Thomas, “Kneeling”


부활

부활절. 겨울이 드리운 무덤의 옷은
아직 여기에 여전하나, 주님의 무덤은
비었네. 하늘의 사자는
무덤에서 우리에게 말하네
우리에게서 그 돌이 어떻게 굴러가 버렸는지
나무 하나가 그 꽃망울로
어둠에 빛을 밝히느니.
길을 걷는 나그네가 있네
헐벗은 나무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었네. 그리고 한 아이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일러주니
작년의 사건, 기계는
기름이 없어 옆으로 멈춰 섰으나
그 위에 지금 꽃은 만발하고.

R. S. Thomas, “Resurrection” (미출간)


그 환한 밭

나는 보았네. 햇살이 뚫고 들어와
작은 밭을 비추는 모습을
한동안, 내 길을 가다가
잊고 말았지. 그러나 그것은 진주였네
값비싼, 그 밭은
그 안에 보물을 품었었네. 이제야 깨닫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줘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인생은

멀어지는 미래를 향해 서둘지도 않고,
지어낸 과거를 그리워하지도 않는 것. 인생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기적에 몸을 돌렸듯
그대 청춘처럼 한때 지나가는 듯한
어떤 환한 빛에 몸을 돌리는 일
그 빛이 그대를 기다리는 영원이리니.

R. S. Thomas, “The Bright Field”

(번역: 주낙현 신부)

그리고 이제 당신 – 월터 브루그먼

Monday, May 2nd, 2011

그리고 이제 당신

월터 브루그먼

우리는 되도록 온 힘을 다해 삶을 정돈하려고 힘쓰곤 합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어느 구석에 모아 지키려고
우리의 경건으로
우리의 교리로
우리의 예배로
우리의 도덕으로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념으로,

안전하고, 덕스럽게 보이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그리고 이제 당신 -
당신과 당신의 꿈,
당신과 당신의 전망,
당신과 당신의 목적,
당신과 당신의 명령,
당신과 우리 이웃들.

우리는 당신의 거룩함이 어느 구석에 숨어있지 않음을 압니다.
오히려 드러나고, 침투하고,
외치고, 요구하는 것.

그리고 이제 우리 자신을 내려 놓습니다.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분노하면서
때로는 늦게… 혹은 이르게.

이제 우리 자신을 내려 놓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넘어선, 우리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당신의 거룩함이 만들어낸 당신의 창조물이기에,
당신의 거룩함이 참된 우리 자신을 만들었기에.

그러니 이제 자신을 내려 놓습니다. 아멘.

* Walter Brueggemann, “And then you” (1998)
* 번역: 주낙현 신부

떼이야르 신부와 함께 기도하기

Saturday, April 16th, 2011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한가지 대답은 없다. 교회는 수많은 기도 방법을 마련했다. 교회 전통을 들춰보면, 어느 하나를 꼭 집어 말할 수 없음을 금세 알게 된다. 게다가 신앙 전통에 따라 그 신학과 성정과 기풍 때문에 강조하거나 인기있는 기도 방법도 저마다 다르다. 자기의 처지와 맥락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기도도 다 다르다. 그러니 유행처럼 번지는 어떤 기도를 맛볼지언정,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법에 자신을 맡기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칫 자신의 영적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기 일쑤다. ‘기도’ 또는 ‘영성’ 간판을 내걸고 장사한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는 처지에 더욱 조심할 일이다.

전례 전통을 바탕으로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는 성찬례 자체가 가장 바탕이 되는 기도이다. 그 가운데 성찬기도는 이런 전례 전통의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이다. 전례 전통의 교회는 성찬례에서 사제와 더불어 공동체 전체가 이 성찬기도를 바치는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사적으로 드릴 방법은 없는가? 성무일도가 있겠으나, 그것도 본래는 공동체 사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 성찬례와 연결짓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혼자 기도하는 처지라면, 기도서를 펼쳐 <정심기도>로 시작하여, 바로 성찬기도로 건너가 천천히 의식하며 읽는 것으로 사적인 기도와 성찰의 시간으로 삼을 수 있겠다.

teilhard.jpg성찬기도의 영성을 따르되, 침묵과 성찰을 주로 하고 싶다면, 아래 “떼이야르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를 참고할 만하다. 이 기도 방법은 떼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가 1923년에 쓴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에 바탕을 둔 것이다. 떼이야르 신부 자신은 미사가 없을 때면 자신의 글을 거듭 읽으며 기도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또는 읽은 뒤, 거기서 비롯한 기도 방법을 따를 수 있겠다.

내 첫 사제 서품 기념일에 천주교 어느 수녀님이 선물로 건넨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는 이후 내 기도 내용과 그 방법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 정동길 어디쯤에서 수줍게 선물을 건네고 사라진 수녀님을, 그 후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책을 펼칠 때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동료 신부님들에게 그 책을 권할 때마다, 여러 얼굴과 더불어 그 수녀님의 얼굴을 되새기고 기도를 드렸다. 잘 지내시리라 믿는다.

떼이야르 신부와 함께 하는 기도

떼이야르 신부와 함께 하는 기도는 미사의 구조를 따른다. 곧 봉헌과 축성, 영성체로 이뤄진다.

봉헌에서 우리가 마음에 둔 모든 일을 되새긴다. 우리의 희망을 되새기고,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희망을 되새기며 시작한다. 마음에 둔 일은 구체적이고 자세할수록 좋겠다. 그런 다음, 인류와 그 희망을, 이 지상과 그 배고픔을 되새긴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고민과 염려가 되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런 다음, 우리가 처한 비참함과 우리에 소중한 사람들이 처한 비참함을 생각한다. 지구 상에 있는 이들이 겪는 고통, 자연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을 마음에 담는다. 이때도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세계를 이루고 있다. 봉헌에서 우리는 우리 세계를 드린다. 우리가 아는 그대로 세계를 하느님께 드린다. 이로써 이 모든 파편이 하나인 영혼이 되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세계를 이루는 이 파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들이 아닌가? 이 울부짖음은 분열된 우리의 깊은 내부에서 솟아난다. “우리 안에서 우리 없이” in nobis, sine nobis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봉헌을 받으신다. 이 일은 축성에서 일어난다. 예수께서 우리 세계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익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이는 내 몸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시들고 상처 입고 잘리는 모습을 보시며 다시 말씀하신다. “이는 내 피다.”

이로써 우리네 삶은 하나의 성사가 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주님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셨으니, 모든 사건이 이제 영성체가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관심과 염려를 당신 안으로 받아들이셨다. 이 일이 일어날 때,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세계의 주님이시다. 이로써 우리 세계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그분의 살로 보고, 우리가 아는 실패들을 그분의 피로 본다.

기도를 마치면서, 하루의 관심과 염려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우리가 가진 희망과 우리가 처한 비참으로 돌아간다. 이제 그것은 다른 것이다. 그 희망과 비참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품은 관심과 염려이다. 매일 어떤 사건이 펼쳐질 때마다, 우리는 그 각각의 사건이 축성되었으며, 그 사건 하나하나를 “이것은 주님의 몸” 또는 “이것은 주님의 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날의 모든 사건은 이제 새로운 순간, “영원한 영성체”의 순간으로 변한다.

떼이야르 신부는 <<피정 노트>>에서 성 이냐시오의 기도가 자신에게 쉽지 않다고 여러 번 털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이냐시오 기도의 양심 성찰을 두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성 이냐시오는 하루가 끝난 뒤 그날 일어난 모든 일을 돌이켜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고 이를 자신의 기도를 삼았다. 그러나 떼이야르 신부는 하루를 시작할 무렵, 그날에 펼쳐질 모든 일을 우리가 살기 전에 봉헌하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영성체의 사건이 되게 하라고. 성 이냐시오와 떼이야르 신부는 아마도 우리 삶의 모든 사건이 이 기도의 내용을 이룬다는 점에 생각을 같이 했으리라. 성 이냐시오의 기도로 하루를 마친다면, 떼이야르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할 일이다.

원문: Thomas M. King, SJ, “To Pray As Teilhard Prayed”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