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

Monday, March 8th, 2010

이글은 블로거 민노씨의 글에 대한 한 상념이며, 블로거 아거님과 민노씨에게 드린다.

1.
선한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로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이미 내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분심때문에 흩어져 힘을 못쓰던 생각과 다짐이, 서로 귀 기울인 대화 속에서 자리를 찾아 단단해지고 든든해진다. 일상이든, 블로그이든, 트위터이든, 그 대화와 나눔 속에서 그 단단한 알맹이를 키우고, 흩어진 상념을 통해서나마 자신을 드러내어 바라 볼 수 있는 일은 영적인 일이다.

거대한 힘의 구조 속에 부속처럼 끼어서, 혹은 그에 저항한다 할지라도 힘이 달려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처지에서, 이러한 대화들은 사소한 것이더라도, 허튼 지혜이더라도, 일천한 경험이더라도, 공감과 기쁨으로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일으켜 세운다. 새로운 질서나 공간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위로와 공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동안에 조금씩 쌓이고 퍼질 수 있을 것이다. 트위터의 짧은 몇 마디든, 블로그의 어설픈 고민이든, 엮이는 동안 서로 도우며 질정할 수 있다면.

한편, 이런 기대는 사람마다 다르겠다. 인터넷이든 어디든, 어떤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이런 공감을 확대하고 기쁨의 전염을 확장시키는 일이라 믿을 수 있다. 아니라면, 이 공감을 향한 행위도 본질상 일인극의 무대일 뿐임을 깨달아 그 무대에 선 실존의 깊이를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민노씨). 그마저 아니라면, 인생에서 펼쳐지는 어떤 위대한 무대를 꿈꾸며 그 희망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러나 준비된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처지에서 바라보든, 그 무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이름 모를 관객”이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아거). 아거님이 말하고, 민노씨가 되새겨 준, ‘무대의 배우론’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 무대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앞선 글에서 내비쳤던 것처럼, 전 지구적인 자본의 지배와 그 행태의 하나인 상품화와 소비주의 문화에 대한 고민 탓일까? 그 무대가 종종 드리우는 어둠에 자꾸 의심을 둔다. 예를 들어, 입바름으로는 진보이고 산뜻한 논리와 언술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어떤 이들의 주장은 ‘노이즈 마케팅’ 같은 어둠에 기대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는 ‘신상’(품)스러운 주장으로 격정 어린 찬반의 싸움을 불러 일으키는 사이, 보아야 할 것들은 이미 저만치 숨어버리고 만다. 그 소비자의 분주한 입출입을 관전하는 사이, 정작 숨죽이고 있어서 세심한 시선이 아니면 놓치기 쉬운 여리고 선한 것들의 면밀한 선과 결은 ‘쌘드뻬빠’로 사정없이 밀려나간다.

어쨌든, 이 맥락에서 쓰인 ‘무대’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받아들이고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무대인 것은 자명하다.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피할 수 없는 배우의 운명으로 무대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안의 나는 ‘무대 체질이 아니다’라는 태생의 부끄럼증에 기대어, 그 무대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 방황 끝에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에서 순례의 천막을 찾았을 때, 신앙의 새로운 이름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평생 말없이 고민 많았을 마리아의 남편, 예수의 지상 ‘양’ 아버지 ‘요셉’이 마음에 다가왔다. 역사라는 무대에 잠시 나왔다가, 어느 순간에 소리 없이 사라졌던 그 사람 요셉을 내 안에서 느낀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 생의 무대는 번듯하고 큰 무대는 아닐 것 같다. 그릇이 작은 탓이다. 그 무대가 주어진 것이라면, 유랑극단의 천막 무대 어느 한켠에서 나를 발견할는지 모른다. 인기 배우의 등장을 준비하고, 관객의 더 큰 웃음을 위해 그들의 배꼽을 잠시 쉬도록 하는, 한 짬의 ‘땜통’ 배우. 슬프도록 어설픈 배우일 성 싶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그 작은 쉼의 시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쓸쓸하지만 넉넉한 일이다.

2.
다시 돌아와 생각한다. 세상의 여러 큰 힘들이 만들어 내는 힘과 게임의 구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사람은 그 안에서 끼워져 살아가야 하는 한편, 그것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 진입과 저항의 경계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편만 선택하도록 몰리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이것은 그 큰 힘들의 전략이 아닐까?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랗게 그어진 분열의 금을 밟을 때마다 가해지는 폭력과 싸움에서 그나마 지친 몸을 쉬지 못하여 피폐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이런 생각에 매달린다. 경계를 분리의 선으로 삼지 않고, 쉼의 공간으로 만드는 일. 경계의 지름과 사이를 넓히는 일. ‘사이’(betwixt-between)라는 회색의 공간. 주저하면서 큰 힘과 그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진입했다가도 빠져나와 발을 디딜 수 있는 여백. 온몸으로 저항하다 지쳐 ‘악’만 남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쉬고 충전할 수 있는 여유의 공간. 그곳은 지친 이들을 보듬고, 상처받은 이들과 더불어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발견하고, 남과 자신의 처지를 성찰하며, 새로운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사제직의 의미와 더불어 이러한 공간을 성찰한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는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성공회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2008)

그러니 내가 사제이든, 어느 유랑극단의 서푼 짜리 배우이든, 유일한 희망은, 아니 함께 만들어가야 할 밝은 희망은, 이 ‘사이의 공간’에서 어슬렁거리는 쓸쓸한 이들이 맞잡은 연대의 공간이다. 대화와 실천을 통한 연대를 경험하고 넓히는 경계의 지평이다.

소비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비주의

Monday, March 8th, 2010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노라는 게 서구 종교 흐름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찰이다. 스스로 제도 종교에 속한 사람(religious)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사람(spiritual)이고 싶다는 이가 많아지고 있단다. 일전의 글에서 이를 두고 나는,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엮인 영성주의(spiritualism)의 확대라 했었다. 이 점에서는 메가 처치, 그리고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앙적 보수주의가 대체로 교리적 전통에 닻을 내리고 있고, 교회나 사회의 리버럴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가 차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모두 영성의 상품화, 그리고 그 소비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재 영적/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원래 영성과 신비주의가 가졌던 깊고 혁명적인 초월이 상실된 채, 오히려 훨씬 세속적이며 치료 요법의 한 형태로 소비되는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섯(Ross Douthat)이 묘사하는 바, 이러한 영성/신비주의 소비자들은 어느 날은 오순절 계통의 치유 예배에 참석하고, 이튿날에는 불교 강좌를 듣는다. 아침마다 요가를 하고, 주말에는 동방 정교회 피정 센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수피 기도법을 배우는가 하면 성체조배도 하고 밀교의 방중술도 배운다. 영적 관심과 훈련의 홍수라 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종교적 영성의 민주화’라고 표현하면서도, 원래의 종교 전통이 뜻하는 수행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이라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변화와 초월의 문제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다우섯은 미국의 한 진보적 천주교 저널에 실린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의 글을 언급한다. 존슨은 이른바 유일신 신앙 전통에 있는 3대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신앙적 동력을 외적 동력(exoteric)과 내적 동력(esoteric)으로 구별한다. 존슨은 이들 종교에 나타난 이 긴장 관계의 사례를 들면서, 그 바른 관계가 그 종교의 건강에 필수적이라 역설한다. 특히 외적 동력인 종교의 제도, 위계, 교리 등이 내적인 신앙적 갈망의 영적 운동들(하시딤, 신비주의, 수피)을 억압해 왔던 점들을 지적한다. 그 자신이 소속한 천주교의 제도적 교권주의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 흘렀던 유대교의 사례들 속에서 신비주의와 같은 초월의 영적 차원에 대한 고민을 전개한 것이다. 다우섯은 존슨의 지적을 존중하면서도, 실은 신비주의마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 안에서 그 대안적인 도전과 변화의 힘을 잃고 있다고 염려한다.

이 염려를 세계로 확장해 보면, 소위 몇몇 내로라는 신학자들의 종교 현상 진단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든 그 밖의 세계에서든 제 3천 년에 ‘신앙의 귀환’ ‘종교의 귀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필립 젠킨스와 하비 콕스 등은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의 주도권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물론 해방신학도 언급하지만)의 급격한 팽창을 그 예로 든다. 그러나 그 오순절 운동 자체가 콕스 자신이 비판하는 ‘번영 복음과 번영 신학’(성공의 사다리 복음)을 여러 모양으로 촉진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 소비주의의 한 형태로 변모하는 방식과 문제 등에 대한 지적은 찾기 어렵다.

이 처지에 이런 의문들은 단견이요, 편견일까? 제도적 교회와 교권주의에 대한 반대로 신앙과 영적 흐름의 종착은 개인주의에 엮인 영성주의라는 새로운 상품은 아닐까? 외부의 폭발적인 신앙의 힘을 보는 그 눈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과 이전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무의식의 향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과 한국의 오순절 운동과 시작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를 목격하는 처지에,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운동은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특히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지배가 강화되는 터에, 신앙적 열광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한편, 그 수와 힘에 기대어 차근차근 주류의 권력을 구축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강화되고 내면화되는 신앙이 자본의 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얼마 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자리한 성공회 트리니티 교회의 포럼에서, 자본의 시장에 포섭된 이런 소비주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고객과 공급자의 언어 논리가 우리 사회생활 전역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으며, 이는 우리 인간의 상호 관계가 물적 자원의 교환으로 교묘하게 측정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항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지배적인 모델이나 가치에 환원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또 다른 길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종교는 여전히 “자신이 지닌 행동 양식과 충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인간의 길”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그 진리의 답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 외침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인가? 종교는 어떻게 삶의 어떤 끝(end/목적/종말)을 되뇌고, 그 끝(의 가치)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가치와 삶의 실천들을 실험하고 펼칠 수 있는 사이와 공간은 어디이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공동체와 그 네트워크로서 교회의 역할과 또 나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Sunday, December 27th, 2009

갑작스레 당한 집안의 슬픈 일로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 혼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은 아내와 함께 돌아오려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잠시 더 머물렀다. 그 틈에 분당 교회임종호 신부님께서 설교와 강연을 요청하셔서, 상중이었으나 오랜 우의로 받아들여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후에 잠시 임신부님과도 나누었듯이, 낯선 형식에 낯선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내 설교와는 달리 꽤 길어서 청중을 지루하게 했다. 내 여러 처지에서 비롯한 마음의 불안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 불안하게 떠도는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죽비 맞고 싶은 생각에, 설교문 전체를 올려놓는다.

성공회 분당 교회
성탄 첫 주일 (2009년 12월 27일)
1사무 2:18-20,26 / 시편 148 / 골로 3:12-17 / 루가 2:41-5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채 도착하기 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그 슬픔이 더 컸습니다. 이런 슬픔 탓인지, 마음에 휑한 구멍이 난 탓인지,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사회가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멀리 느껴졌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사회, 특별히 도시의 삶이 그토록 빨리 변했던 탓이겠고, 저와 제 가족의 마음 상태도 그전과 달라진 탓이라 생각합니다.

틈이 나서 다른 가족을 만나러 고향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여러 곳도 많이 변해 있더군요. 혼자, 혹은 가족과 거닐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절집에 다시 가보았더니 그마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늘 보아 왔던 어떤 집이 기차길 옆에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대 숲을 뒤안으로 삼은 아름답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섬처럼 남아, 외곽으로 확장되는 아파트의 파도에 막 삼켜질 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삶의 변화 때문이든, 제 심경의 변화 때문이든, 저는 어떤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이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딘가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 느낌은 저 자신을 불안하게 하더군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습니다.

한편, 이런 낯선 거리감을 응시하다 보니, 제게 또 다른 시선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두거나, 바깥에서 보니 사물의 다른 면이 보입니다. 보는 각도 정도가 아니라, 위치와 처지가 달라져서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다른 시선은 신앙인의 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 가곤 합니다. 신(神)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 그 하느님이 살과 뼈를 가진 아기가 되어 한없이 낮게 왔다고 믿는 이 기괴한 종교를 가진 신앙인의 어떤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신앙인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낯설고 기괴한 사람입니다. 종교, 혹은 신앙이 이 세상과 사회와는 조금은 다르게 낯설고, 거리가 있지 않다면 이를 종교라고 부르기 참 어렵습니다. 성탄을 통한 성육신 사건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를 분리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사건 자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사건으로 남습니다. 세상 끝날에 이르러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하기까지 이 낯선 거리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가 깨지는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하는 또 다른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성탄을 통하여 솜 결보다 부드러운 아기 예수의 친밀함과 따스함을 느껴야 하는 마당에, 거듭해서 낯선 거리감을 말하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거리감과 불편함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중요한 물줄기를 마련해 왔습니다. 좀 잘난 체 하는 말로, 그것은 어떤 사태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해석학적인 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내내 뽀송뽀송한 편안함과 위안의 말만 건네는 성서 풀이나 어떤 안락한 경험이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역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참 종교를 식별하는 기준과 방법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20세기 서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거론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 그리고 참 종교를 구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종교적인 언어와 모양새, 교리 체계, 신앙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축복합니다. 좀 더 깊이 보면, 사람이 가진 어떤 욕망과 심지어는 욕심을 배불리는 일에 봉사합니다. 종내에 이 사이비 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축복, 자기 가족 혹은 자기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는데 몰두합니다. 나보다 큰 것, 어떤 초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해도 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화려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여러 종교가 이런 사이비 종교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는 자기와 같은 전략을 갖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생각을 협박처럼 퍼뜨립니다.

한편, 유사 종교는 종교의 형태를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나 예배 같은 것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자기 자신의 복지와 축복에 집중한다면, 유사 종교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예입니다.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 인류애, 아니면 사회의 체제 등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떤 가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종교보다 이런 유사 종교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이념, 윤리적 이념이 차라리 낫다고들 합니다.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무신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어떤 비판적인 이념의 확장 때문이 아니라, 실은 사이비 종교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참 종교는 그 형태와 논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쉽게 간파하기도 발을 들이기도 어렵습니다. 특정한 종교적인 언어나 신앙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의 축복과 어떤 집단적인 가치의 실현을 생각하면서도, 그 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어떤 것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것, 자기 집단보다 더 큰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바로 참 종교의 태도라고 합니다. 이 개방성이 바로 자신과 어떤 집단을 초월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 상상력입니다. 참 종교는 모든 바른 것이 자기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너머인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초월’이라고 합니다.

초월에 참 종교의 길목이 있습니다. 이 초월을 향한 열림의 길로 들어서려면, 세상의 편하고 낯익은 것들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이 세상과는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 초월이 열립니다. ‘이곳’에 근거하여 축복을 끌어들여 만족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의 신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종교나 교회를 어떤 특정 이념에 다른 사회 변혁의 근거지로 만들려 하면 유사 종교의 활동가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참 종교인은 ‘이곳’이 불편하고 낯설고, ‘이곳’과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여러모로 매우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다른 외경 말고는 낯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오늘 본문만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도 매우 이상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번 주일을 성 가정 주일이라고 칭하며 축하했습니다. 성탄 첫 주일에 그럴 듯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그 설정을 배반하는 듯합니다. 무슨 성 가정의 부모가 자기 아들 챙겼는지도 모르고 하루나 여행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까? 아니 무슨 아들이, 자식을 잃어버려서 애간장이 탔을 어머니의 염려에 뭘 모르는 소리 말라고 오히려 타박을 합니까? 이게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성 가정의 실체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을 좀 낯설게 보라는 초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조금은 낯설게 보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무엇을 당연하게만 듣지 말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 어떤 도전을 들으라는 말이 아닐까요?

3.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그 열림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보고 상상력을 키워나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교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신앙의 몇 가지 비전과 도전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운동에 대한 믿음이요, 이를 따르는 행동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눈여겨보면 좋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움직임에서 전체를 비추는 어떤 실마리가 드러나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서 지키기로 되어 있는 명절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세상의 공간을 떠나 거룩한 공간인 성전으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이 성과 속 사이의 지속적인 반복 운동은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원형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 적어도 매주에 한번 성찬례를 드리러 구별된 공간에 모이는 탓은 이러한 예수의 운동을 따르려는 중대한 훈련입니다.

다만, 하나 더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운동은 금세 매너리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얼른 정해진 일을 치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습니다. 아들을 챙겼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나홀로 집에’서나 보일 법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예수님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성전에서 기도하고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일이 자명한 대답을 건네주는 것이라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숙지한다고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포되는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석, 그리고 성찬례의 신비에 대한 경험과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으며, 그 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을 붙잡고 늘어질 때, 신앙의 발돋움이 있습니다. 바로 소년 예수가 보여주는 신앙 성장의 한 정점입니다. 여러 궁금증과 더불어 질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는 신앙생활의 운동은 정지하고 맙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명하게 주어진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시다. 교회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한 교회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한 비난과 그 생명력에 대한 비관이 넘쳐나는 이유는 하느님을 질문 속에서 찾기보다는, 자명한 대답을 주려 하거나 강요하고, 여러 질문과 씨름하지 않으려는 탓이 아닐까요?

둘째, 신앙은 균형 있는 긴장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조화입니다.

균형 있는 긴장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몸으로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긴장이 주는 조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낯선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오해받거나 욕먹기 쉬운 일은 갈등하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일입니다. 입장을 선택해서 주장하는 일은 쉬어도, 서로 다른 입장 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화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그 낯설고 힘든 화해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아프고 컸습니다. 그럼에도, 분열된 것들을 화해시키고 조화롭게 하기 노력은 우리 신앙인이 받은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바지에는 소년 예수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 사회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요? 몸을 극단으로 훈련하는 스포츠가 있는가 하면, 머리 사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놀라운 입시 지옥의 교육 현실이 있습니다. 몸을 가볍고 날씬하게 만들고, 예쁘게 고치는 일에 놀라운 투자를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국민 월평균 독서량은 한 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례와 예배 생활은 애초에 몸과 머리가 함께하는 일이지만,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좋은 ‘말씀’만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내 몸의 실천은 나 몰라라 합니다. 몸과 지혜가 함께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편, 하느님께만 잘 보이면 되고, 이웃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상실된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의 총애를 받는 소년 예수의 성장이 드러내려는 복음의 가치가 보이질 않습니다.

바울로 성인께서는 오늘 서신 본문에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덕목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에서는 그저 말 뿐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말하고, 감사의 생활을 입에 달고 살지만, 우리의 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는 권고 있지만, 절대로 가르침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남의 어느 교회가 교회당 건축에 2천억을 들이는 동안에, 국가 예산 절감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사회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로 서신의 원문에는 “옷을 입어라” “옷을 벗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뒤덮은 몸과 머리의 불균형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분리라는 우리 신앙의 분열증을 벗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옷을 입어라”하는 권고를 듣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른바 ‘신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균형 잡히고 긴장감 있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앙적 결단과 실천 속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낯선 사람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되, 비판적인 거리 두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한 사람들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유사 종교를 넘어서서, 참 종교의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낯선 거리두기의 시선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서 낯선 사람들이기를 자처해야 합니다.

4.

우리 인생에는 모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슬픔과 실패와 배신의 고통이 우리를 뒤덮어, 이 세상이 낯설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이러한 낯설어짐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림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상식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미 떠나간 우리의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녀과 함께 하는 ‘성인들의 친교’는 이 세상이 주는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기괴한 신비 사건들을 믿으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백성만이 누리는 희망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낯선 이방인 여러분, 하느님의 집 안에서 머물러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즐깁시다. 집으로 향하는 길과 예배의 공동체로 향하는 길의 반복된 긴장과 균형 속에서 여러분의 몸과 지혜를 날로 키워나갑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놀라운 지혜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신앙의 실천이라는 몸을 단련합시다. 복음의 가치 속에서 피차 낯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내는 초월의 공동체를 경험하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합시다. 그 즐김과 키움과 단련과 분투 속에서,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역설의 사건, 임마누엘의 신비를 높이 찬양합시다. 오늘 시편의 가수와 함께 그 신비를 목청껏 노래합시다.

“이제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주시니,
당신을 가까이 모신 이 백성,
당신을 믿는 모든 신도들에게 자랑이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