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Wednesday, May 27th, 2009

1.
매일 기도하고 있으나, 부끄러움과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어떤 말도 잘 터지지 않았다.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한국에 계신 몇몇 신부님들께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과도 깊은 한숨을 나누었다. 모두들 경악했고 슬퍼했다.

이 공유하는 충격 속에서 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나 역시 그 사람 노무현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몸담고 있는 사목 현장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와 교단에 따라 어떤 분기점들도 보였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경우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든, 한탄하는 것이든, 답답해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제 생각들을 속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이야기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고들 한다. 이미 수구 꼴통들은 교회의 가르침입네 하면서, 자살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말로 정치적인 언변을 설교랍시고 묵상이랍시고 교활한 정치적인 선동을 뿌려 놓는다. 많은 이들이 신자랍시고 그 말들에 부하뇌동한다. 그리고선 이 죽음에 대해 그저 인간적인 애도만 표명해도,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인다느니,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말로 응수하고 공격하기가 일쑤란다. 움추릴 만하다.

2.
그런데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사목하고 목회하는 일은 신앙적인 언어도단이 아닌가? 신앙은 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진댄, 교회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탓에 어떤 반성과 성찰을 위한 도전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더라도, 한참이나 김빠진, 맥없는, 하나마나 한 입발린 말들은 나 같은 사목자들 스스로를 그 심연에서 비참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비참 속에서 우리 교회는 “끼리끼리의 사교 클럽”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등급이 명확하게 매겨진, 강력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런 사교 클럽. 그러니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하다는 말도 다들 헛소리이다. 아직 다양하기라도 하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을 터.

그러니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슬기와 순결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경륜이라고들 한다. 젊은 것들은 거기에 좀 머리 좀 숙이라고 다그친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경륜을 가장한 타협과 기만과 위선과 노회함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도, 격려도, 조언도 아니다. 또 다른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순결”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고, 공동번역에서 “양순하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뜻대로라면 ‘순결’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라면 “단순/단호하라”는 말이겠다. 때묻지 않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면서 어찌 모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고민 속에서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우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숨기며 짐짓 뻐기고 있는 태도에 허를 찌르라는 말로 들어야겠다. 내 폐부를 찌르고 가르는 그 날카로운 도전이 이 슬기로운 우회의 과정에서 무디어지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3.
나 같은 신앙인들에게 돌아오는 수술용 칼날은 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위선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가없은 욕망을 치장한 이 위선으로, 우리는 몇년 전 대단한 위선의 흉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우상은 한때 권좌에 있던 이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런 그 탐욕의 우상이 보통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감추려는 위선은 우리의 눈도 가린다. 눈먼 우상은 살아 있는 이가 이미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다. 우리의 뒤틀리고 벌거벗은 욕망이 이 무소불위의 눈먼 권력을 낳았고, 지금 우리가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물이 나의 위선을 씻어내리는 회개와 세례가 되지 않고서는, 이 슬픔에 찬 분노도 이미 거만하게 우뚝 서버린 흉물스런 우상 앞에서 맥을 쓸 수 없다.

4.
이런 거친 심정때문이었다. 마음 깊으신 한 신부님의 “말-씀”에 토를 달며 투정을 했다. 그것 말고는 침울하게 산란한 내 마음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침묵해야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공이 얕고, 도에서 먼 지라, 털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투정을 고쳐 옮겨 놓는다.

이 참담한 사건에 직면한 마음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도 잘 안나오고, 한편으로는 참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사목자이신 신부님의 처지를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슬픔에 기대어 투정을 좀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부분인 오늘의 본문(요한 17:6-19)을 요약하는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 주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우회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좀더 분명한 표현은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만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속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의식 속에서, 훨씬 예언자적인 표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많은 경우에는 세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들을 제가 명민하고 사려깊으신 신부님의 글에서 – 글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걸 알지만 – 쥐어 잡을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너머’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즉 우리의 위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별사가 예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어떤 위대한 구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편만한 위선의 폭로였습니다. 그 폭로인 그의 죽음에 우리를 비춰보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위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죽음은, 그래도 그나마 인간적이어서 정직하려고 몸부림쳤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신앙인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고라도 신앙인들은 이 점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의 성찬례에서 신앙인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고, 그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이 용기와 기쁨을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그동안 우리의 위선을 포장하거나 치장하는 메이크업 가게가 되었고, 우리의 음란한 욕망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흉물이 바로 2mb와 그 졸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종교인, 게다가 대형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어떤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한, 어떤 “우회”가 빈말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이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면서, 성직에 든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리고 그 기념일에, 제 자신에게, 제 동료 성직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교인들과 바닷가에 나와 거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입에 들쳐오는 모래를 씹으며 거듭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직자’ 잡감 2

Wednesday, April 29th, 2009

1.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은 무슨 파우스트적인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이라면 오히려 파우스트적인 도전과 고뇌를 칭찬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 불행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런 의지도 열망도 없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자신이 마주한 어떤 처지에서 자신의 본 생각을 숨기거나 타협하여 그것에 굴복하는 건 오히려 인지상정이겠다. 사람은 생존본능의 노예니까. 그러나 이게 습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타협과 잘못을 비난하는데서라야 자신의 본 생각을 드러내어 짐짓 옳은 체하고, 또다시 다른 처지에서 다른 식으로 타협하는 행태는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이다. 이 짓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일이 성직 사회에서도 넘쳐 나는 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음란한 짓이다.

2.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훈계할 때, 자신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근거를 두고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사태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태의 정황에서 늘 해석되고, 그 이해 당사자에 의해서 사실이 조작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말에 기대는 순간 그 자신의 신뢰를 깎아 먹게 된다. 이 역시 영혼을 팔아먹는 일의 일종인데, 이런 자기 모순이 그 자신의 비참에서 그치면 다행이련만,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공공의 적이다.

3.
성서의 기드온은 오합지졸 병사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 식별 기준은 병사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무의식에서마저 견지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도자는 바른 식별을 해서 이끄는 사람이다. 골라내거나 쳐내는 일은 그 어감과는 달리 식별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겁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삼백명의 정예 군사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렀다. 집으로 돌아갈 걸로 판정받은 병사들은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 성직은 식별을 따르는 행동이지, 고집 피우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간 전쟁도 지고 자기 목숨도 잃는다.

4.
어떤 전략과 전술도, 그리고 어떤 생존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밖에 나가서 정체성을 갖춰라, 성장시켜라 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앵벌이하라는 말이다. 그 앵벌이의 실체는 굽신거리고 거짓말하는 일이고, 좀 힘이 있을라 치면 그마저 없는 이를 ‘삥’ 뜯는 일이다. 앵벌이로 나서는 이들 역시 힘에 눌려 여기서 도망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 일이 반복된다.

5.
사목은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디서든 입에 발린 말들이 되기 쉽다. 그 속내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은 이면에 어떤 복합감정(complex)에 따른 질시와 무시가,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팽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위계질서와 섞여서 작동하면 사목과 교회는 치마만 슬쩍 두른 이전투구의 장이 된다. 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성직자 개인은 불행하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는 교회는 무너진다.

6.
질투와 시기는 차이에 대한 비교에서 비롯된다. 차이가 만만한 것이라면 바르게 경쟁하면 될 일이고, 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차이에서 배우는게 남는 일이다. 질투와 시기는 경쟁을 통한 발전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배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먹이지도 못한다.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다양한 은사를 늘 설교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에 절대로 순응하지 않기에, 결국 복합 감정의 노예가 된다.

7.
가까운 사람들,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좀더 인색한 식별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도전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가까움이 자칫 식별의 눈을 가리고 도전을 멈추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고 전해 듣고, 또 발견하게 된다. 그 잣대로 인해서 그와 멀어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역으로, 무엇이든 받아주리라 생각했는데 애정과 합리로 도전을 해오는 이가 있다면, 그를 붙들어야 하겠다.

8.
누가 그랬던가? “나쁜 사제는 없다, 다만 병든 사제가 있을 뿐.” 문제는 병자가 자신의 병을 돌아다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결과는 나쁜 일들이다. 당연히 사제는 나쁜 일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사제가 늘 옳은 의사로만 자처할 뿐, 스스로 병들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도 병들어 죽는다. 손 쉬운 자기 진단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질이 다른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가? 누구에게 먼저 부러움과 질시가 먼저 일어나지 않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나? 말과 행동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내리 누르려 하고 있지 않나? 사실과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솟아오른 감정으로 논리를 치장하지 않나? 등 등. 하기야 이런 것들을 물어서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병든 사람은 이런 진단 자체를 거부한다.

9.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이상 그리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노라 하셨다. 서로들 벗으로 여기지 않으니 불행한 일이다.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이 “벗”에 대한 갈망과 실천을 말과 몸에 속속들이 배이도록 하지 않는 한, 결코 예수를 따르지 못한다.

10.
성직 10년이라는 무게가 나를 무섭게 짓누르는 해에, 되돌아 보고 있는 것들의 편린이다. 이런 수준으로 밖에 돌아보지 못하는 게 스스로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오늘의 부끄러움을 넘어 내일 주님 앞에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으면 한다. (그러니 이 잡감을 오해 마시라. 아니다. 오해하신다면 더 큰 영광이겠다.)

관련 글: ‘성직자’ 잡감

종교: 위로와 도전 사이에서

Monday, May 12th, 2008

아무리 시급한 걱정거리라 해도, 아무리 친형보다 가까운 신부님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객지에서 만난 분을 붙잡아 두고 따져 묻고 비판을 하는 일은 성급하거나 철 없는 일이었다. 그리 행동했기에 일말의 후회가 밀려오고, 잠시나마 함께 말없이 바닷 바람 쐰 것으로 무마하고 싶은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속한 작은 것 안에서는 아웅다웅하다가도, 자연이 주는 신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분을 보내드린 뒤, 여러 생각과 함께 돌고 돌아서 다다른 생각의 편린은 종교의 근본적인 행동적 기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태에 관한 성찰들이었다.

종교의 “기능”에만 집중해서 깊이 내려가면 두 가지 근본적이며 대립적인 면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곧 “위로”와 “도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를 “사제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두 관계의 긴장 혹은 균형이 무너질 때 종교는 한쪽으로는 사이비 종교 집단, 다른 한쪽으로는 사회의 한 운동 단체가 된다. 이럴 바에는 종교에 참여하기 보다는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봉헌하거나, 시민 운동 단체에 기부하는 일이 “실용과 효과” 면에서 훨씬 낫다.

종교가 사회에 대한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근대” 이후, 종교는 그 여러 기능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분야들에 기득권을 내줘야 했다.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가? “그래도 그렇다”고 당연한 말로 대답하기 전에, 그 근본적인 “위로”와 “도전”의 긴장감이 어떻게 작동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자기 변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은 종교가 사회와 정치에 도전할 때, 영적인 책무와 ‘위로’를 꺼내들어 맞불 놓는 일로 드러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을 향한 위로를 말할라 치면, 교회 안에서는 전통 교리에 입각한 심판으로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회 운동 진영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는 해묵은 명제로 종교 자체에 도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참에 그 사이에 선 선한 사람들의 자리는 좁아진다. (그래,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직자든 신자든 이런 자기 변명에 스스로를 적절히 적응시켜 살아가는 일이 편만하다. 적절하게 눈 뜨고 눈 감거나, 짐짓 모르는 체 사팔뜨기가 되기로 작정한다. (신자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성직자의 잘못은 신자들 탓이 아니지만, 신자들의 잘못은 성직자들 탓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은 뒤로 미루고, ‘위로’와 ‘도전’을 적용하는 기준 설정이 최우선이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말들 앞에 있는 어떤 수식어들을 늘 염두했다. 그 제한적 수식어들이 사라지는 과정과 교회 권력의 보편화는 같이 갔다. (모든 일반화와 보편화는 항상 위험하다! 그 안에서 어떤 작은 목소리들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잊혀졌던 수식어들을 성서와 복음에 비추어 되살려 본다면,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위로”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위로과 보살핌은 약한 이들이에게 우선적으로 가고, 도전과 비판은 힘 있는 자들을 먼저 향한다. 물론 그 약함과 힘 있음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모든 약한 것이 다 위로의 대상이 아니요, 모든 힘 있는 것들이 도전의 대상도 아니다. 어떻게 약하고, 어떻게 힘 있는지를 따져서 그리 한다. 여전히 식별의 문제이다.

궁한 백성의 배고픔과 아우성은 위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기적인 욕망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군중의 이름으로 누구를 십자가의 못박는, 하나된 욕망의 분출이 되면 그것은 비판과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한편,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그 억압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도전해야 하지만, 그 힘의 구조 안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입하여 자유롭지 못한 약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위로와 보살핌도 함께 가야 한다([대장금] 정상궁의 대사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여기서 여전히 유효한 식별의 기준은 영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약함과 권력에 관한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가 이 식별에서 엇나갈 때, 본의든 아니든, 그 적용은 전혀 반대의 행동을 낳는 일이 빈번하다. 사실 계급 의식 혹은 의식화 같은 거창한 말의 본연은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결과는 작으나마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고 영성 수련하고, 때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말씀 읽고 듣는게 아닌가? 그러자고 신학하고 대화하는 것 아닌가?

우리 성공회 안을 들여다 볼까? 치부 자체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른체 하거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 여기서 그만 두고, 몇 사람의 글을 인용하여 마친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가 종교보다는 도덕론이 낫다고 생각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기도가 쉽기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기도를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은 좀더 신랄했다.

인간의 영혼에 관여한다고 고백하는 어떤 종교가 그 인간들을 내치는 빈곤과, 그들을 목 죄는 경제적 조건과,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메마른 먼지 같은 종교일 뿐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떠오르는 정상궁([대장금])의 마지막 부탁

그러나 어릴 적 내가 본 화려한 궁은 허상이었어.

늘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궁(宮)은 외로웠다.

모두들 아마도 그 외로움에 지쳐 그렇게들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 게야.

외로움에 지쳐 승은이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등바등 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부(富)라도 얻어야 겠으니 남에게 빌 붙었을테고
외로움에 지쳐 권력이라도 얻어야 겠으니.. 권모술수라도 써야했겠지..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네가 네 원칙을 지키고싶은 것만큼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러지 않으면 네 단호함이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낮설 게만 느껴질게다.

쉽지않지! 단호하게 하는 것과 융통성 있게 하는 것!

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져!
그게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