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가 대비되게 읽힐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Wednesday,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

세계 성공회 분란을 보는 한 방법

Tuesday, September 11th, 2007

세계성공회 안의 적잖은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의의 여러 지형들과 그 얼개를 살펴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미 두쪽으로 결단난 마음들을 봉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일보다 힘들 게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만치 떨어진 일이라고 불구경하는 것도 게으름이거나 현실 파악 못하고 내용없이 고상한체 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어떤 입장을 더해봐야 두쪽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어 몰매맞기 십상이다. 이 논쟁의 속내가 무엇이고, 어떻게 연구하고 적용하고 관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길이 이 논쟁때문에 해칠지도 모를 우리 교회의 건강에 예방약이 될 것이다. 그러지도 저러지도 않고는 왈가왈부할 수 없는거다. 이 논란에서 비롯한 생각들에 스스로 질문하여 떠오른 문제들을 나열해 본다.

1. 동성애가 문제의 핵심인가?
그렇지 않다. 동성애는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논쟁이건 전쟁이건 기싸움이 있는데, 어떤 이슈/개념을 선점하면 유리해진다. 오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나온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이슈를 선점하면 절반을 이기고 갈 확률이 높다. 종교는 초기 “운동”이 끝날 무렵부터는 보수적이 되는지라, 새로운 주장을 이기려면 전통적인 오랜 주장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승산이 높다.

2. 이것은 신학의 문제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당연히 신학의 문제이겠지만, 어떤 신학이나 교리는 그 역사적 맥락이 있는 법. 오랜 동안 그것을 만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말해야 한다. 그 현재 논란의 맥락을 성공회 안에서 좁혀보면, 식민지 선교의 신학적 유산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대척점을 이룬 지역 성공회 관구들에게 선교했던 선교회들의 신학과 그 입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특히 자칭 “글로벌 사우스”에 처음 들어갔던 선교회들을 알아보면 흥미로운게 보인다.

3. 그럼 정치적인 문제인가?
과거의 정치적 유산과 현재의 정치적 갈등이 이 논쟁 안에 깃들여 있다. 한국만 보수-진보로 나뉘고, 보수 회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성공회 안에서는 이런 보수화가 전 세계적이라고 할 만한데, 위의 선교사 신학의 유산과, 새로운 힘을 얻고 있는 현재의 보수적 종교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 주목할 것은 미국 부시 정권을 지원했던 우파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전선은 그야말로 에큐메니칼하다. 서로 으르렁대던 이들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가 되었다. 이 전선 안에서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등이 한 솥밥을 먹게 된 시대이니, 가히 또다른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공이라 할까?

4. 뒤에 미국이 있는가?
최소한 이 논란을 일으키는 거간꾼을 보면 그렇다. 자기들 내부의 갈등과 싸움을 세계성공회로 확대시켜 대리전을 시키는 모양새다. 왜? 보수파들이 그나마 진보적인 미국성공회를 뭉개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다. 또 장기적으로는 세계의 미국적 보수화에 디딤돌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IRD (종교와 민주주의 연구소)라는 이 기독교 우파들의 싱크탱크를 접한 적이 있다. 언젠가 그 무량한 경험을 나눌 수 있으리라.

5. 뒷거래가 있는가?
예를 들어 아프리카 교회들은 미국성공회의 지원을 거부했다. 과연 “진리 수호를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실제로 많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다른 나라 성공회의 지원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 이런 용기있는 행동이 어디서 나왔을까? 최소한 앞서 말한 미국 보수적인 진영의 돈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6. 도대체 이런 싸움으로 얻는게 뭘까?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대로, 미국의 우파 기독교인들은 그들대로 얻는게 있다. 이건 여러가지 면에서 파워 게임이다. 아프리카, 특히 나이지리아 교회만 신자가 2천만명이 넘는다. 세계성공회의 3할이다. 이 싸움에서 손해볼게 없다. 지면, 독립 교회를 꾸릴 명분이 생긴다. 이기면, 전 세계성공회를 차지하여 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과거 제국의 식민지 선교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될 수 있겠다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교황권에 근접한 교회 정치체제가 나올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징직언 일치의 힘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대치할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서는 우파 기독교인들은 이로서 이로써 60년대로 이후로 잃었던 교계의 힘을 회복할 거다.

7. 정치에 신물난다. 신앙적 진정성이 있지 않나?
누구에게라도 신앙적 진정성이 있다고 믿고 싶다. 문제는 그 진정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 진정성을 확인하고 설득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최소한 성공회는 신앙을 ‘순례의 여정’으로 보면서, 이 입장에서 교리와 신학을 본다. 교회 역시 순례하는 교회로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을 보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걸어간다. 그러니 지금은 판단하고 정죄할 때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서로 연구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례는 열린 길인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정성에 대한 주장은 이런 대화 없이는 불순한 거다.

8. 신학 연구, 성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서의 문자, 교리, 전통, 신학, 이런 것들이 통째로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을 바로 잡지 않고 자기 주장만 되뇌어서 진전이 있을 턱이 없다. 누구는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성서적”이라고 하는 주장들, 교리적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이 내내 어떤 뿌리와 맥락이 있다. 자기 주장에는 기원들이 있다. 그걸 열어 놓고 검토하고 연구하여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범주들을 벼려 내어 접근하야 한다. 신학의 방법의 차이도 있고, 신학의 정보량의 차이도 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열린 자세로 신학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선동하는 거다.

9. 그러니 이 참에 “계약 문서”로 선을 그으면 되지 않는가?
최소한 성공회 전통은 이른바 “고백 문서” 전통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성공회는 이런 종교적 문서에 따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우리 성공회 신자는 성서와 더불어, 우리는 기도서가 우리 성공회 신학과 전통과 삶을 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참 좋은 “언약 문서”를 우리 기도서에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 언약”이 그것이다.

10.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고 있는데…
세계성공회 역사에서 이른바 4개의 일치 도구로 여겨져온 것들, 즉 캔터베리 대주교, 람베스 (주교) 회의, 세계성공회협의회(ACC), 그리고 관구장 회의 가운데서, 관구장 회의가 가장 늦게 생겼고, 원래 친교 모임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기 시작해서 급기야, “계약 문서”에서는 관구장 회의가 세계성공회 회원 자격 결정 여부 권한을 갖도록 제안하고 있다. 관구장 회의 자체에는 그런 어떤 권한이 없다. 관구자들의 힘의 과시인가? 힘의 집중화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게다가 일치의 도구가 회원 자격 박탈을 결정하는 분열의 도구로 등극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가운데서 세계성공회의 일치에 가장 구체적인 일을 해왔던 가장 중요한 기구인 ACC (주교, 성직자, 평신도, 여성, 청년 대표들로 구성)가 약화되고 있다. 세계성공회의 권위주의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세계성공회 안에서 회원 자격과 관한 논란은 ACC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관구장들의 목소리에 가려져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다른 여러 교구와 교구장들의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11. 어쨌거나 문제는 동성애다.
그렇다. 역시 문제는 남는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해서 논의하려면 그걸 좀 알아야 한다. 교회를 결단낼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어떤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에 근거해서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자신이 읽은 이 주제와 관련 책이나 정보들을 나열해 보자.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학적 주장들의 큰 맹점 가운데 하나는 이미 폐기된 의학, 심리학 전제들을 이용하고 있으며, 대중들의 이해, 그것도 감정적 이해 수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갖고 말하려면 거기에 대해서 최소한 다양한 정보를 갖고 말해야 한다. 결론이 아니라 출발부터 되짚어 보자는 거다.

12. 동성애는 성 도덕의 문제 아닌가?
윤리이건 도덕이건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다. 혼자살면 윤리나 도덕이 필요없다. 그렇다면 성도덕의 문제로서 동성애는 이런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악영향이 있는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폭력, 강압, 착취와 관련된 성 문제가 성 도덕/윤리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인간 존엄이 잣대이다. 이 틀에서 동성애건 이성애건 성 도덕을 볼 일이다. 어떤 사안의 범주들을 흐트려서 고정관념에 기대에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몹시 위악한 일이다.

13.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여전히 이 논란에는 성서가 가르치는 것, 혹은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되어 온 것, 교회의 전통, 적용 맥락의 상이성, 그리고 사회 공동체 자체의 이해 등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점 있다. 바로 “인간의 하느님 경험”의 문제이다. “불받는 경험,” 이런 매우 협소한 종교적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 세계 전체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추동하는 경험이다. 성서는 이런 하느님 경험의 기록이다. 전통 역시 그 맥락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을 앞선 경험의 기록인 성서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일이었다. 결국 하느님이 주도하는 한 그 경험은 늘 열려 있는 것이다. 문자와 교리와 전통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사건이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사람마다 다양하니 그 경험이 다양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사건이 펼쳐지는 그 구원의 경험에 먼저 귀를 기울인 후에라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할 일이다. 지금처럼 귀막고 눈막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귀와 눈까지 막아가면서 진리의 수호를 외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경험들에서 서로 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두려움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