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깅 – 변명 어린 잡감

Wednesday, February 10th, 2010

1.
블로깅에 대해서는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개운한 마음이 없었다. 그리 성실하지 않은 블로깅이었으니 쉰다고 해도 티 나지 않은 것이었다. 민노씨 같은 이가 베푼 선의의 과대평가가 쑥스럽게 퍼지긴 했지만,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으니 애써 모른 체했다. 독자들이 읽어보면 뻔히 드러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운치 않았던 것은, 내 안에 작동하는 여러 검열 기제 때문이었다. 특히 성직자 신분이 노출되는 처지에서 하고픈 이야기와 주장에 스스로 제동이 걸렸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 블로깅이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매우 위험한 이야기를 담아서 교회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짓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 검열의 압박에 굴복했다. 그 때문에 켕겼다.

2.
이런 내적인 검열을 강화하는 외적 요인도 있었다. 여러 통로로, 직간접적으로, 내 블로깅의 내용에 시비거는 일이 있었다. 아니 직접 블로그 안에서 토론이라도 했으면 했는데, 대체로 공격은 익명으로, 뒷구멍으로 와서 일격을 가했다. 마음의 상처를 애써 부인한다고 덮어질 일이 아니었다. 급속도로 보수화되고 있는, 아니 실제로는 그다지 진보적인 적이 없는 우리 교회(이 표현은 모두 ‘한국 성공회’를 가리킨다)에서 어느 사안 하나 차분하게 짚어보기 어려웠다. 어떤 이들은 필요할 때 내 블로그의 내용이나 논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구별 짓기’위한 허울로도 사용했다. 종종 같은 이들이 다른 이들의 악평을 이용해서 핀잔하기도 했다. 마음이 쓰렸다.

3.
허튼일이나마 블로깅에 일말의 책임감을 가진 것은 두 부류의 독자들 때문이었다. 숨죽여서 가만 읽고 가는 우리 교회 내의 독자들, 그리고 몇 안 되지만 허튼소리를 새롭게 들어주는 우리 교회 밖의 독자들이다. 공개 블로깅이니 애초에 두 부류의 독자들을 늘 염두에 뒀다. 숨죽인 교회 내부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논의의 맥락과 언어를 실험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그리고 외부의 독자들에게는 한 줌도 되지 않는데다 ‘성공회’가 무슨 ‘성공하는 모임’인지 ‘승공회’의 잘못된 발음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계에서 이름자 홍보라도 하겠다는, 내 안의 기대가 있었다. 이런 이기적인 기대를 알아차리고 여러 방식으로 호응한 이들에게 감사한다.

4.
교회의 독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저만치 앞장서 경계를 넓혀 놓으면, 다른 이들에게는 그만큼 여유로운 공간이 생기리라 여겼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보폭에 맞지 않게 앞서가는 이가 야속할 테다. 종종 주저 앉아버리거나, 뒤꽁무니만 바라보며 좇아오기에 바쁘다. 아직 나는 그 보폭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난처함을 되돌아 보되, 경계의 지경을 넓히는 일, 자기 보폭으로 부지런히 걷는 일, 풍경을 깊이 조망하며 관상하는 일, 섬세하고 자비로운 사목적 시선과 실천, 그 어느 하나를 그만둘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일이라 다짐하고는 있다. 이 난처함을 넘으려면, 좀 더 많은 이가 자신의 독특한 은사를 식별하고, 다른 이들과 다양한 은사의 끈들을 이어 얽어야 한다. 쉬이 한사람이 다 해주길 바랄 수 없다. 이 지점이 막혀 있다. 불평을 그만두려면 자기 은사를 발견하고 보완할 사람을 벗으로 삼을 일이다. 그게 연대다. 내 작은 호소이다.

5.
외부의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물론 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너무 성공회라는 특정 전통에 대한 홍보가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소수자인 교회 전통(한국에서는)에 대해 알리려는 동기가 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쓰는 내 마음이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계 전반이나 종교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도움은 주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다른 교회 전통(특히 한국 개신교의 주류)에 마음이 별로 가지 않는 탓이 크다. 한편, 이들에 대한 비판을 배경 삼아 우리 교회를 돋보이게 하려 했던 얄팍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곳곳에서 들켰다. 그런데도 선의로 발라내어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미안함과 감사함이 겹치는 와중에 우리 교회 외부의 독자(그리스도교 신자이든 아니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있다. 기회 닿으면 곧 쓰겠다.

6.
좀 쉬면 마음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더더욱 게을러지고 감을 잃었다. 되든 말든 써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감정의 쓰레기를 공적인 공간에 퍼뜨리지나 않는지는 살피겠다. 이 말은 내 안에서 ‘이제부터 좀 더 열심히 블로깅하겠다는 거냐?’ ‘이제는 주제나 독자 눈치에서 좀 더 자유롭겠다는 것이냐?’ ‘이제 좀 과격하게 속내를 내보이겠다는 것?’ 등의 물음을 키운다. 모르겠다. 개운치 않은 마음을 살피려는 내 안의 보호장치가 작동해서인지, 그저 오늘 이 변명 어린 잡상이 떠올라, 두서없이 적어본 것이다.

늘 응원해 준 민노씨에게 이 글을 드린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이미지와 이콘 사이에서 –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3

Monday, February 23rd, 2009

이미지와 이콘에 대한 생각과, 우리 교회의 허명(虛名)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든다.

1.
한동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가? 2mb도 어떤 성공 신화와 삽질하는 이미지때문에 당선됐나 하는 생각이지만,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 삽질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만큼 자기 편한대로 조작가능한게 이미지다. 이게 앞에 언급한 천주교에도, 우리 성공회에도 해당이 되지 않나? 문제는 이미지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요즘 이미지는 위선과 동의어로 들린다.

2.
이미지와 말뜻이 같은 다른 말로 “이콘”(icon)이 있다. 특히 정교회 전통의 신학적 영성적 그림을 말하는데 쓰일 때다. 이때 이콘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성사(sacrament)와 그 정의가 가깝다. 감춰져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의 신비는 감춰져 있는데, 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이미지)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를 감상하려면 색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먼저 기이하고 불편한 상을 깊이 응시하여, 그것이 내게 말걸고 도전하는 것을 음미하는 일이다.

Rublev's_saviour.jpg

진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이콘이 우리 지각을 불편하게 할 것은 당연한다. 반면에 “이미지 정치”는 우리를 낭만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어떤 환상을 비춘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감추인 것은 무엇인가?

5.
남들 탓하자고 일련의 글을 올린 게 아니다.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질문은 대뜸 이렇다. “그럼 우리 (혹은 ‘느네’) 성공회는?”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들 한다. 가난하고 청렴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고,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의 삶을 생각하면 속 상해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그러나 더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작으니, 청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속에 여전히 “중산층 욕망”이 가득한데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에서 비판의 우위에 선 것뿐은 아닐까 하고. 그게 혹 허상은 아닐까? 허명은 아닐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성명서라도 내고 있는데, 그나마 그 입에 발린 말도 성공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우리 성공회의 정의평화사제단(예전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이었다)은 어디에 이름을 팔아 먹었는지, 그 안에서 애쓰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모르겠다. 천주교 주교회의의 성명서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신학적 반성의 언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어떤 신앙적 실천의 면모가 성공회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걸핏하면 87년도 6.10 항쟁의 구심에 성공회가 있었네 하고 짐짓 추억한다. [유월민주항쟁 진원지]라는 돌덩이 하나 구석에 박아두고 ‘왕년에 이랬네’하는 것인가? 왕년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왕년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없다. 그 왕년을 이야기한다 쳐도, 전체로서 교회가, 우리 성공회가 유월 민주화 항쟁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가? 아니, 그때 열심히 참여했던 이들을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 허명을 팔지는 말 일이다. 그 허명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치욕과 굴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울 수 있다. 불편함을 대면할 때라야, 그저 보이는 것 너머로 감춰진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속 어둠: 보수와 진보 사이

Tuesday, May 13th, 2008

자기 성찰 없이는 한발짝도 못 나간다. 어떤 사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도 개입과 거리두기가 동시에 필요하다. 특히 신앙적인 반성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이다. 공부나 논리나 체험이나 연륜이 딸려서 걸려 넘어지는게 아니다. 사회든 교회든 간에, 개혁 혹은 변화를 외치고 이를 끌고 가는 동인의 내막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일이다. 그 짐짓 심각한 의논과 표정과 “으싸, 으싸”하는 움직임 안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어둠을 덮어버린다면, 그건 변화가 아니라 곧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김치수는 탁월하게 그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via 김현 via 민노씨]

덧붙임: 돌아보니 이미 한 말이로구나. 다른 맥락에 언급한 것인데, 이 자리가 더 어울리겠다.

좋은 진보와 나쁜 보수라는 틀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바르지도 않다. 그건 경험해 봐서 다들 안다. 게다가 좀더 들여다 보면 “좋다-나쁘다”는 가치의 형용사를 자신있게 붙일만한 인간이 많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신앙 전통에 기대어 인간을 종교적으로 폄하하자는 건가? 아니다. 이건 평등의 원리에 대한 종교적 인식이고 표현이다. 각설하고, 좀더 느슨하게 “태도”로 표현하는게 더 수월하고 살갗에도 더 가깝겠다. 다시 말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는 것이다. 혼자 살지 않는 바에야 소통하고 관계해야 할 터, “열림”과 “닫힘”을 좀더 도드라지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닫힌 진보”(실은 진보로 자처하는)보다 “열린 보수”(실은 사람이 다 보수적이 아닌가?)에 더 미래가 있다.

이를 이어 가자면 “자기반성과 성찰”의 여부가 그 밑에 있다. 성찰(reflection)과 자기애(narcissism)는 한끝 차이다. 성찰없는 비판은 비난, 공격, 중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목소리 크고 좋은 말들을 한껏 쓸어다 동원하는 바람에 다른 성실한 비판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종교적인 성찰은 이런 말뿐인 공허한 수사학적 비판들에 인간의 하릴없는 어떤 속내 혹은 욕망이 작용하는가, 혹은 왜 거기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가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 혹은 종교는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나 광신의 상태와 쉽게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자) 혹은 무한(자) 앞에 서서 한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 혹은 무한(자)인 척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비춰보고(반성)하고 딴지(비판)를 걸어보는 마음가짐이요 행동이다.

http://viamedia.or.kr/2008/02/05/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