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서평

Tuesday, June 7th, 2011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 1939~ ) 신부는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성사적 사회주의 활동가요 신학자이다. 이미 그의 책이 우리말로 여러 권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한 소개와 우리말 번역서 목록이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의 저작 선집이 수년 전에 나왔고, 그에 대한 서평을 발견하여 여기에 옮긴다. 그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명료한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서평 - 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Prayer and Prophecy: The essential Kenneth Leech
David Bunch and Angus Ritchie, editors

피터 맥기어리 신부

케네스 리치는 위험한 인물이다. 예언자들은 대체로 그렇다. 그는 사목 활동 대부분을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서 보냈고, 거기서 그의 놀라운 저작들이 솟아났다. 슬프게도 그의 저작 대부분은 이제 읽히지 않거나 알지도 못한다(실은 피한다!). 영국 성공회가 점차로 신-국교주의가 된 탓이다.

이 때문에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케네스 리치가 쓴 글의 선집을 편집한 데이빗 번치와 앵거스 릿치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제 그의 여러 유명한 저작과 편지, 논문들, 다른 글, 그리고 그의 초기 시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선집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글들을 빼야 하니까. 그러나 편집자들은 리치의 미출간 글들을 들춰볼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은 지금 이스트 런던 성 캐서린 재단에 보관된 것들로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이 책에서 여러 부분을 나누는 일도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연결된 리치의 만다라 같은 글들은 기도와 행동을 분리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켄 리치와 같은 목소리가 오늘날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내게 명백함과 정직함과 진리다움을 늘 되새기도록 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신랄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긴 했다.

그의 입장은 값싼 성상파괴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장난감을 내팽개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본다면, 그는 예언자다. 모든 이들, 특히 권력과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항상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예배에 근거했다.

그가 지닌 사상의 주류는 무엇일까? 그것을 정확하기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 제대로 이해한다면, 공교회주의(catholicism)는 명백한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찾는 일이요, 역으로, 거룩함 속에서 일상을 찾는 일이다.
  • 교회는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 확신하면서 예언자적 증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특별히 권력과 부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평가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비판적 행동은 영국 성공회가 지닌 ‘국교’라는 지위 때문에 늘 훼손된다. 그러나 바빌론이 가져다주는 위안은 시온을 향한 싸움과 양립할 수 없다.
  • 기도와 관상, 성서와 성사에 끊임없이 기대는 일은 본질적이다. 급진적이 된다는 것은 사물의 뿌리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참여와 행동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관상적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관계가 아니다.
  • 우리는 사람들과 있는 그대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바라는 사람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을 사시라! 그의 다른 책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다. 재빨리 읽거나, 차례대로 읽지는 마시라. (내가 보기에 5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 리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생각을 얻기에 좋다.) 그리고 그대가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에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읽으시라. 그래서 이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대를 휘저어서 늘 새롭게 하도록 하시라.

저자: The Revd Peter McGeary, http://goo.gl/q95TC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 (서울교구, 대학로 교회)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Wednesday, May 18th, 2011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그 종교인들도 역시 종교가 허약한 진통제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임을 알았다. 적어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시작했던 모리스 신부(F.D. Maurice)와 킹슬리 신부(Charles Kingsley)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인 실체가 현실을 비추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고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가르침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은 잘 알려진 적대적 관계만큼이나, 그 친연성이 늘 큰 관심 주제였다. 지성사적인 근원과 근친 관계는 제쳐 놓더라도, 이 둘이 맺은 역사적 관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근대 서방 교회의 여러 개혁은 대체로 세를 넓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시작되곤 했지만, 실천 속에서 그 관심과 결과는 두 운동이 비슷했다. 천주교의 소위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교회의 변화와 대응의 촉구였다. 그 사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던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분인 안병무는 새로운 신학적 임무의 하나로 ‘반-공산주의’를 삼았다. 그러나 이후에 민중신학은 늘 ‘용공’ 신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당시 맥락화한 마르크시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학에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운동이요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마르크시즘에 관심했던 데 비해, 현실과 이념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대적이었다. 그 주창자와 이후 큼직한 추종자들이 만든 ‘아편’ 규정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모른다. 이런 처지에 요즘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를 제공하는 것은 격세지감이겠다. 학계의 마르크스 연구와 실천 현장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많고, 이른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이론을 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 논의와 관심의 방향에서 본다면, ‘진보적’ 신학 담론의 방향은 이제 교회 전통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른바 80년대 이후로 짓눌러온 ‘과학적 방법론’에 눌린 무의식의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테리 이글턴이 낸 최근작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의 발췌를 번역해서 올렸거니와, 이 책에 대해서 한 ‘리버럴’ 그리스도인이 쓴 서평을 소개하여 짝을 맞추려 한다. 서평자인 테오 홉슨은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 제목은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서평도 이미 쓴 바 있다. 이 글들과 아울러 몇 년 전 고종석이 쓴 글도 읽어보면 좋겠다. 아래에 그 목록과 링크, 그리고 새 서평을 아래에 남긴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 학자들의 아편? – 자신의 신앙과 씨름하는 테리 이글턴

테오 홉슨

대체로, 주장을 담은 책은 꽤 직설적이다. 저자란 그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에 펴낸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교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다. 최근작,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늘 지지했던 마르크시즘이라는 신조를 변호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열 개의 관습적인 반대 목록에 따라 이뤄져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더는 적절하지 않다, 폭력적이다, 경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불가능한 완결주의다, 정체성의 정치를 무시한다 등등. 인상적인 활력과 G. K. 체스터튼 풍의 익살을 이용하며, 이글턴은 이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전체로 보면, 그는 무비판적인 신봉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펼치는 주장이 좀 더 분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합리적인 마르크시스트인 것을 보여주려고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룬 것은 옳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 하나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즉 공산주의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2장, 즉 마르크시스트 혁명은 늘 불행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장에서 직면하는 문제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우리는 20세기 공산주의는 여러 조건이 완전히 잘못돼서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이렇게도 경고했다, 일국 혁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글턴은 여전히 마르크시즘이 ‘적절한’ 조건들에서 작동할 수 있고, 어떤 형태의 혁명(그가 말하는 대로 유혈 혁명일 필요가 없는)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고, 확실히 나은 정치적인 질서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자유 정치적 제도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까? 혁명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도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글턴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에 모호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텐가. 그건 변명이 안 된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이런 모호성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봤다.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자신의 중심 임무를 슬쩍 피해 가려 한다. 그 혁명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임무 말이다. 왜 그걸까? 그 자신이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혁명의 실제 가능성을 그가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다면, 왜 이글턴은 마르크시즘을 변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글턴이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진정한 비판적 관점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는 말은 너무 약하고, 너무 차갑다. 마르크시즘은 열정 어린 비판적 입장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 말고, 다른 이념들은 불평등이 만드는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 이 관습적인 생각은 근본주의적 자유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을 통제해서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부(富)가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긴박성과 열정이 부족하다. 기존 질서가 점차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두고 죄책감과 낭패감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관습적인 생각은 운명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수반한다. 결국, 운 좋은 계급이 있어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고, 운이 좋지 않은 다수는 불안정과 실업, 하급 문화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제적 처지가 만들어내는 인종 분리를 받아들인다.

오직 마르크시즘만이 이 운명론을 거부할 수 있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이글턴을 마르크시스트로 남게 하는 것이다. 온정주의적 운명론에 대한 이런 반대와 완전히 다른 질서에 대한 요구를 그는 높이 존중한다. 그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집착한다. 물론 여기서 신앙적인 도약이 따르기도 하는데(혁명은 가능하다!),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부정적(negative)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릴 수 있겠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덜한 것 같다. (후자를 믿는다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믿고 있는 바는 급진적으로 다른 질서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는 일이며, 기존 질서에 대해 반대하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이글턴이 손에 든 마르크시즘은 정확히 과학도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정치적 삶에 대한, 끝내 보편화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전망이요, 응시요, 담론이다.

이글턴도 잘 알다시피(그의 지적 뿌리는 해방신학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강한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기는 경계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안에 어떤 영성적인, 혹은 [초월적] ‘타-세계적’인 면이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들(parsons)이 생각하는, 그런 타-세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에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계이다.”

‘파슨스’(성직자들)라는 낡은 용어에는 어떤 기이함이 감춰져 있다. 이글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과 종교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앞으로 쓸 책에서 이 점을 좀 더 공개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원제: Theo Hobson, “Marxism, the Opium of the Professoriate?”
출처: http://goo.gl/k6DkT
번역: 주낙현 신부

부활절 서신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Wednesday, April 20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2011년 부활절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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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7).

세계를 둘러보면 폭력과 고통은 날로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전하는 ‘승리’의 약속은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가공할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고, 원자력의 재앙이 가져올 위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신이 불러오는 도륙이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샤바즈 바티가 비참하게 암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쓸어버리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압제자들이 권력을 움켜쥐려 하는 동안, 수많은 보통 사람과 그 가족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내전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백만 명의 생명과 안전을, 특히 어린이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성인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이미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바울로 성인의 삶과 그분이 살았던 시대를 알면, 이런 선언을 하기가 우리 시대보다 더 쉬웠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가 전하는 바는, 이 세계를 향하여 하느님께서 품으신 마지막 목적에 대하여 그 어떤 의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마지막 결과에 어떤 의심도 없습니다. 소름 끼치고 설명할 길이 없는 현재의 상태가 가져오는 고통을 멈출 간단한 처방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선언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어느 권력도, 그 어떤 환경도 그 진리를 정복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끝까지 조작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닻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위험하고 어려운 결정이나 심적인 혼란, 엄청난 슬픔, 그리고 이 세계의 고통에 대한 분노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다만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과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파괴의 힘과 끝까지 겨룰 일은 없다는 점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거절당하고 모욕당하더라도, 지독한 독재의 폭력이 쓸어버리려 할지라도, 그 사랑은 파괴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 생명으로 들어 올려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사랑이 이와 같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랑이 품은 지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영원한 자기 주심이 펼치는 관심과 기쁨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그리고 모든 인간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인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여전히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방식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포함합니다. 그 어떤 인간의 압제와 고통도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깊은 고통과 분노를 가져오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헌신과 파괴될 수 없는 사랑이 깊은 진리라면, 아무리 작은 봉사와 자비행도 가치가 있으며, 그 진리에 닿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작은 차이도 이끌어 내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앞서 우리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내세우면서 만들어낸 이 거짓과 불의의 사회에 영원히 저항하는 진리의 흐름에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설득과 변화를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위협과 공격 속에서 살면서도 예배와 봉사를 쉬지 않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용기가 그 증언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 아들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간증입니다.

이미 이겼습니다. 이 순간에도 참혹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진실은 그 어떤 위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신뢰와 희망의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처지 속에서도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기꺼이 펼치는 작은 행동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우리 하느님의 본질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단 한 번 전체를 위해서 일어난 그 사건에 보였던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어 고통과 불의의 멍에를 지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일하도록 힘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을 향한 치유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합니다.

부활절기의 축복과 기쁨이 여러분에 넘치기를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원문: http://goo.gl/xjrC7
*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