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Wednesday, May 27th,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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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상념, 민노씨의 글에 부쳐

Friday, May 22nd, 2009

이건 순전히 민노씨 탓이다. 누굴 탓하는 일은 피하려 노력하나, 덕을 입은 탓은 해야 한다. 민노씨가 아니었더라면, 이제는 내 삶에 고유명사가 된 “오월”이면 여지없이 찾아와 짓누느는 감정을 발설하지 않고 지났을 것이다. 그의 부지런한 블로깅은, 덮고 가면 될 것들을 여지 없이 휘저어 놓는다. 그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물론 이는 그의 블로깅에 대한 찬사이다.

민노씨가 남긴 독서의 흔적을 따라가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 바빠 죽겠는데, 이때 이게 올게 뭐람!’하는 혼자 투정은, 이미 그에게 낚였거나, 정확히 발설되지 않은 어디에선가 그와 맞닿게 되었다는 걸 뜻하는지 모른다. 결국 한마디 남기려다고, 댓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늘어 놓았다. 그는 내 댓글을 보고 내 블로그에 직접 올려 놓는게 어떠냐고까지 하며, 거듭 옆구리를 찔렀다. 그 핑계로, 몇마디를 고쳐 올려 놓는다. 누구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누구에게는 영원한 주장이 되어버린, 5.18이라는 단순한, 그런데 여전히 짓누르는 숫자에게 관한, 여러 상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게 그의 기대대로 어떤 울림의 시작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민노씨의 격려에 감사.

민노씨: 5.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민노씨의 글은 다시 오래된 독서, 그러나 부족한 독서를 되새겨 주고, 무엇보다도 5.18에 대한 겹치는 상념들을 돌이켜주었다. 그가 독서의 자락으로 펼쳐 놓은 지라르(René Girard)는 그렇다 쳐도, 왜 김현에게 광주는 “그림자로만 머물러”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왜 광주 자체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르네 지라르라는 생소한(할 수도 있는) – 물론 대가의 통찰력을 가진 – 학자의 매우 파격적인 이론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했을까? 김현은 외국의 이론을 우리의 경험에 대비해 봄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더불어 이를 우리 삶에 대한 분석에 적용함으로써(문학 비평이든, 문화 비평이든) 생각의 방법과 지평을 넓히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이었을까?

내 독서의 한계 안에서, 김현은 이런 일을 이질감없이, 아니 적절한 낯섦을 이용해서, 우리 문학 평론을 통해서, 울림있는 우리 말 구사로 전개한 몇 안되는 평론가일 것이다. 다만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떤 이론은 그 발생학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맥락에서 동떨어진 이론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적용하는게 그리 적절한 것일까? 그리 하더라도 그 비판적인 거리두기의 지점은 어디일까? 그런 점에서 김현, 아니 나처럼 외국에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서구가 마련한 경험과 이론의 정치함에 눌려, 근본적으로는 어떤 이론의 보편성을 전제하는 일에 쉽사리 빠지지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까지 잡다하게 닿았다. 물론 논리적으로 익은 건 아니다.

그런 참에 다시 르네 지라르를 다시 들춰보며 생각했다. 그가 폭력에 대한 통찰을 신화 분석이나 그 밖의 인류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분석(이 아니고 그 전제를 무차별하게 적용한다는 비판이 있지만)을 통해서 길어올리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욕망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게 자리잡은 폭력과 그 은폐의 구조를 발본색원하려는 폭로의 전략으로서 매우 소중하겠다. 이 전략은 폭력에 의한 희생을 감추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 정당성이 도전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몰랐던 걸 이제 내가 알려주마’하는 지라르 특유의 단정적인 태도에 내 마음이 흩뜨러진 탓일는지 모른다. 다만 어떤 전제된 구조에 모든 것을 끼워맞추려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았다. 지라르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시원적’ 혹은 ‘창건적’이라는 수사는 어떤 천형처럼 박힌 어떤 폭력의 원형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그 자신 그리스도교 신자(천주교)로서 그 무의식에 내재한 어떤 원죄 신학이 비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그는 다른 종교는 악하고, 오직 그리스도교 전통(정확히는 유대-그리스도교적)만이 옳은 듯이 말하며,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다른 종교들을 다시 희생양으로 만드는 듯하다. 어쨌든 여전히 뭔가 빠진게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결이 겹친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나 같은 성서학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지라르가 자주 언급하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원형적인 시원을 밝혀주는 신화이기 이전에, 출애굽(Exodus)이라는 역사적(물론 해석된) 사건의 경험에 기반한 세계와 우주에 대한 해석학을 통해 생성된 결과물이다. 출애굽기의 경험과 그 이야기가 과거를 가리키는 창세 신화와 그 이후의 역사 해석의 원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해석학, 혹은 해석과 분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늘 반복되어 기억되는, “떠돌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해방된 사건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어떤 원형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떠돌이의 경험, 박해받았던 노예의 경험, 그리고 여기서 해방된 경험에 대한 풍요로운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원형 구조에 대한 관심과 분석의 과잉이 풍요로운 이야기의 기억을 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5.18 을 다시 돌아본다. 질문은 민노씨의 말마따나, 왜 우리는 “이제 합법으로 위장된 폭력의 구조는 죽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속수무책인가?

그동안 “5.18″은 숫자 그 자체로서 큰 울림과 떨림이 있었다. 그 숫자로서만도 떠올려지는 화면들(우리는 나중에 처참한 사진과, 질낮은 비디오로 숨어서 봐야 했으니까), 풍문들(우리는 몰래 귀속말로 전해들어야 했으니까)이, 그리고 거기서 나온 참을 수 없는 분노들(진보 논리 이전에 우리는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찢을 듯이 일어섰으니까)이 우리의 살갗과 눈물에 범벅이 되어 이야기로 남았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라면 5.18을 ‘사태’로 부르든,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든, ‘민중 항쟁’이라 부르든,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5.18이라는 숫자로서 우리에게는 5.18 의,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와 생생한 기억, 그 이야기와 그 기억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있었다.

한동안 “5.18″은, 출애굽 사건이 그리했던 것처럼, 우리 삶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해석의 토대로서 작용했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최소한 지난 25년여 동안 “5.18″은 이런 점에서 가장 극악한 폭력에 대한 폭로요, 진보적 운동의 근거였다. 이 참에 묻고 싶은 것은, 그 근거가 되는 그 경험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5.18을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았나, 우리는 자기 입맛에 따라 늘 멋대로 요리하고 치장하는데 써먹긴 했어도, 그 의미는 과잉되어 넘치는 대신에, 아직 펼쳐지지 않았던 그 속의 이야기들은 묻혀지고 잊혀지지 않았나, 아니 그 몇몇 의미들만 확대되어 곧장 주장이 되지 않았나, 그 사이에 망각의 시간에 몸을 던져서, 그 화면과 풍문과 분노로 몸에 새겨졌던 이야기들은 하나씩 잊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기억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기억될 지를 마련하지도, 아니 우리 스스로 그렇게 기억하지 않고, 점점 늙어가는 피부에 우리의 감수성을 내버려두고 둔감해지지는 않았는지 하는 상념에 이른다.

어찌보면 무엇보다도 그 살에 새겨진 이야기들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우선일지를 두고 말이 많을 법도 하지만, 폭로 전략의 효율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수성이 무디어져 그 폭로가 식상해진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석과 전략 속에서 우리는 비판의 대상을 늘 밖에 두다 보니,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거나, 쉽게 면책하고 만다. 폭로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니 결국 “매일 매일 투명한 죽음을 만들어” 내는 일에 공조하는 셈이기도 하고, 폭력을 까발기기는 커녕, 여전히 스스로 폭력 은폐의 주체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민노씨 글 탓에 아주 잡스런 생각이 부조리하게 일었다.

전례와 정치, 고문과 국가, 그리고 현실주의

Monday, April 20th, 2009

미국 언론은 지난 부시 정권 하에서 테러 용의자를 대상으로 고문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려던 법률 자문 메모 공개를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 이웃에 있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의 법과대 교수로 있는 한국계 미국인 John Yoo 는 그 메모의 첫 집필자로 진작에 드러났고, 이에 그의 교수직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더 파헤쳐서 부시를 반인륜 범죄 재판정에 세워야 할 참이다.

“고문”이라길래 당장 떠오른 책과 글이 있어서 다시 들춰 보고선, 기왕 번역까지 해본다. [고문과 성찬례](Torture and Eucharist)라는 책으로, 칠레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자행된 폭압과 고문, 그리고 이에 대한 칠레 가톨릭 교회의 대응과 저항을 신-정치학(theopolitics)과 전례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폈던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윌리암 카버너(William Cavanaugh)의 인터뷰이다. 인터뷰 제목은 [정치적 행동인 전례](Liturgy as Politics)라고 했지만, 전례와 정치적 참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국가의 폭력 문제, 대학의 정체성 문제, 그리고 현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들에 대한 짧지만 매우 탁월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정치적 행동인 전례: 윌리암 카버너 인터뷰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전례적 행동에 참여할 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얼마 전에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내 첫마디는 이랬다. “한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례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미사를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전례는 의미로 축소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거라면, 그 의미를 알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이유가 무엇인가? 의미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라면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주일마다 교회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게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전례와 사회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그저 전례의 상징과 의미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런 다음 그 의미를 뽑아내서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려 한다. 봉헌은 우리의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둥, 평화의 인사는 국제 관계 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둥, 이런 식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전례가 어떤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내는 행동이라는 점을 말하지는 않는다.

앙리 드 뤼박(Herny de Lubac)은 말한다.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무슨 별장 같은 게 아니다. 교회는 그 원래 의미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행동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교회가 어떤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정당의 정치적 행동을 전례 안에 끼워 맞추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교회가 – 비그리스도인과 협력해서라도 – 평화와 자비의 공간, 정의로운 경제 교환의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광야의 목소리”(Voices in the Wilderness)포콜라레 운동(Focolare movement)의 경제 공동체 등은 예수 정치학의 좋은 사례들이라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회피하려는 종교 분파나 정적주의와는 달리, 이러한 운동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이다. 어떤 점에서 평화와 정의를 국가에 요청하는 운동들보다도 낫다.

근대 세속 정치학의 가정 가운데 하나는 국가는 세속적이며 종교는 사적(privat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16세기 유럽을 망쳐놓은 종교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다시 획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강제적인 권력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속 국가를 평화 유지자로 보는 신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종교 전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싸움, 그러니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전쟁은 서로 다른 신적 정치 질서들(theopolitical orders) 간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봐야 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자를 죽였는지 설명할 수 있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는 합스부르그와 부르봉 간의 싸움이었다. 두 가톨릭 왕조끼리 싸운 것이다.

교회는 이런 피투성이 전쟁에 책임이 없지 않다. 교회는 폭압적인 권력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 역시 죄없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국가의 전체 기구들은 군주들이 전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적은 대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근대 민족-국가는 폭력에 기반하여 세워졌다. 교회가 폭력에 저항한다면, 교회는 그 사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다시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해서 참된 말을 발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교회가 연루되었던 폭력의 죄과를 현재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을 거절함으로써 속죄받을 수 있다.

교회가 국가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종종 탈리반 형태의 정권을 예를 들며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합당한 염려인가?

분명컨데, 난 탈리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정권은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종교적 폭력에 관한 신화가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염려한다. 바로 이런 방식이다. “저기 있는 놈들은 종교적 광신자들이다. 그들의 폭력은 비합리적이며, 절대주의적이고 분열적이다. 우리는 민주적인 세속 국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폭력은 합리적이며, 온화하고, 화합을 도모한다. 그들은 우리가 배운 교훈을 얻지 못한 놈들이다.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들을 폭격해서 사람들이 한층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사고 방식이 이라크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한 공적인 담론의 근간이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이 신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군사비가 다른 모든 나라가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을 합리화하도록 한다.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은 폭력으로 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합리성과 평화를 확산시키는데 애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군과 그 대리자들에 진행된는 전쟁의 결과는 5만명이 넘는 이라크 시민의 죽음이며, 2백만명의 베트남 사람의 죽음, 그리고 2십만 명의 과테말라 농민들의 죽임이었다. 우리가 “종교적 폭력”을 악귀로 바라보는 한, 이러한 전쟁들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어떤 종류의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칠레의 폭압적인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연구했다. 칠레의 가톨릭 주교들이 했던 것처럼, 교회는 정치 권력 혹은 그러한 현상 이면에 있는 것들에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하나의 가정이다. 칠레에 관한 내 책에서,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사례로 삼으려고 했다. 주교들이 한 일과 풀뿌리 교회들이 한 일은 국가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을 때 이를 부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깨닫게 되었다. 국가더러 스스로 정의로울 걸 요구하는 게 쓸모 없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교회는 국가가가 정의를 구현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를 심각하게 어떤 공적인 몸,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몸이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조한다. 이는 종종 국가에 대한 저항을 수반한다. 칠레에서 몇몇 주교들은 고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풀뿌리 교회들은 정권의 희생자들을 돕고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변화는 조용하게 오지 않았다. 대체로 그런 일은 없다.

고문은 피노체트 정권 아래 정부에 의해 자행됐다. 미국 정부는 고문을 눈감아 주고 있다. 미국 교회들은 고문을 이용했던 칠레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부시(Bush)는 존 매케인 의원이 미국 요원들에 의한 고문 방지를 목적으로 한 수정안을 대상으로 부결권 행사로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점에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칠레는 예외적이라고들 생각했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군사 정권은 단기간으로 끝날 것이며, 그리 폭압적이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다. 미국 역시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자유를 위한 하나의 신호라고 여긴다.

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을 예외적이라 여기기 때문에, 미국은 법 위에 있고 예외적인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국가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말한 대로 미국은 “없어서는 안될 국가”이다 – 국가는 그 생존을 위한 이익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여긴다.

칠레에서 배울 수 있는 또다른 하나 – 교회는 국가가 스스로 정의를 행하리라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억류자들에 대한 불의한 처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대통령에게 미뤄둬서는 안된다. 교회가 어떤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미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 정당한 전쟁 이론이 한치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라도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결정을 국가에 미룰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연예 산업, 특히 디즈니 기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여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분야에 관해서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 같다. 대중 연예 사업 속에서 복음의 신호를 찾든지, 아니면 그 부도덕성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 말이다. 당신 생각은?

전체 대중 연예 사업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디즈니를 비판하는 것은 그 영화나 다른 미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내용도 분명 비판의 대상이다. 디즈니에 관하여 내가 관심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다. 자유 시장이라고는 하나, 디즈니는 소수의 거대한 사업체가 소비 패턴에 영향을 주고 문화를 획일화하는 권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백만의 부모들은 디즈니가 뱉어내는 것을 구입하느라 안달이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라이온 킹이나 다른 상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강박감을 갖게 되는가? 이론적으로,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으로 좋다는 감각이 없는 문화 속에서, 남는 것은 힘이다. 의지는 좋은 것(선한 것)으로 이끌리지 않고, 마케팅의 권력이 의지를 움직인다. 거대 초국가 산업은 그 자라나는 권력으로 자유의 절단된 단편 만을 양산하고 있다.

당신은 또 교회와 관련된 대학들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기관들이 그 신학적인 근거를 굳건히 지키면서, 고등 교육 시장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 고등 교육의 큰 아이러니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면서, 대학들과 대학교들이 대동소이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들 안에서 인종적, 성적, 계급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에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명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학교는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 믿지 않게 된다. 진정한 다양성은 대학 내부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대학들 간의 다양성이다. 어떤 대학이 침례교이든, 천주교이든, 감리교이든, 대학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정체성을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곳이 독특하게 침례교적이고, 천주교적이고, 감리교적인 것에 따라서 모두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교회 관련 학교들은 그들이 독특한 선교 이념을 가질 때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정체성이 싫다면 그런 학교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기반한 학교들인 어떤 정통 교리에 입각한 엄격한 기준을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실무자들, 교수진, 학생들 사이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 일관된 대화가 지속될 수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우리가 바로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적인 방법들과 입장들, 그리고 세계관들을 뒤섞은 샐러드를 제공하고,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현대 대학들은 지성적으로 일관되지 못해서, 지성적인 활력이 아니라 냉소주의만 낳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가?

교수진 임용이 가장 관건이다. 많은 교회 관련 학교들은 현재 많은 수의 교수진과 실무자들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그 학교를 설립한 교단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의혹을 갖고 있다. 물론 모든 학교는 아웃사이더가 필요하다. 만일 내가 1950년대의 가톨릭 대학에서 가르친다면, 소수의 좋은 맑스주의자가 교수진에 있어서 여러 문제들을 헤집어 놓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시계추는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각각 학부 안에 가톨릭 관점으로 심리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몇 명 씩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큰 문제이다.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받는 교육이 학제를 넘어서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물학 시간에 창세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수업을 방해하는 이들처럼 취급한다. 교회 관련 학교들이 창조론자 만을 임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서 배운 것들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동감하거나 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와 같은 다원적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는 구절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 구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의 말이다. “하늘로 가는 모든 문이 하늘이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성인은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 사이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다리라 생각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다리는 이미 하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좋아하는 건, 이 말이 수단과 목적이라는 이분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을 지금 이 땅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실천 속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떤 멀리 있는 종말의 시점에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길이다.

이번 주일에 설교를 하게 된다면, 어떤 본문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

대림절이 가까오고 있으니, 아마 절기 독서에 있는 대로 이사야에 있는 위대한 본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 같다. 전체 전례력을 통틀어서 좋아하는 독서 본문들이다.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사야 11:1-9 를 선택할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어울릴는지 몰라도, 어린 양은 쉽게 잠들지 못할 걸?” 이사야에서 말하는 어린 양과 늑대가 함께 어울린다는 본문을 선택하면서도, 우디 알렌의 지적은 이른바 현실주의(realism)의 사례라 생각한다. 이 현실주의는 말한다. “순진하면 안된다. 현실 세계 속에서 어린 양은 늑대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꾸실 때라야, 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큰 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이사야서 해석으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셨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이미 햇순이 돋아났다. 대림(Advent)은 성탄에서 완성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 나라의 “아직 아님”(not yet)을 하느님의 행동 지연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도 지연시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인 아들을 주셨다. “아직 아닌” 것은 우리가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 살아가고 있다. 이사야의 전망을 하느님께서 이뤄주시겠지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미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 분 안에서 이사야가 바라보던 새롭게 변화된 현실은 완성되었다.

The Christian Century. Dec. 13, 2005:28-32. Copyright 2005 CHRISTIAN CENTURY. Translated and reproduced by Nak-Hyon Joo in Korean with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