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Sunday, December 27th, 2009

갑작스레 당한 집안의 슬픈 일로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 혼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은 아내와 함께 돌아오려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잠시 더 머물렀다. 그 틈에 분당 교회임종호 신부님께서 설교와 강연을 요청하셔서, 상중이었으나 오랜 우의로 받아들여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후에 잠시 임신부님과도 나누었듯이, 낯선 형식에 낯선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내 설교와는 달리 꽤 길어서 청중을 지루하게 했다. 내 여러 처지에서 비롯한 마음의 불안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 불안하게 떠도는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죽비 맞고 싶은 생각에, 설교문 전체를 올려놓는다.

성공회 분당 교회
성탄 첫 주일 (2009년 12월 27일)
1사무 2:18-20,26 / 시편 148 / 골로 3:12-17 / 루가 2:41-5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채 도착하기 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그 슬픔이 더 컸습니다. 이런 슬픔 탓인지, 마음에 휑한 구멍이 난 탓인지,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사회가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멀리 느껴졌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사회, 특별히 도시의 삶이 그토록 빨리 변했던 탓이겠고, 저와 제 가족의 마음 상태도 그전과 달라진 탓이라 생각합니다.

틈이 나서 다른 가족을 만나러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여러 곳도 많이 변해 있었더군요. 혼자, 혹은 가족과 거닐고 생각하기에 좋은 절집에 다시 가보았더니 그마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늘 보아 왔던 어떤 집이 기차길 옆에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대 숲을 뒤안으로 삼은 아름답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섬처럼 남아, 외곽으로 확장되는 아파트의 파도에 막 삼켜질 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삶의 변화 때문이든, 제 심경의 변화 때문이든, 저는 어떤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이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딘가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 느낌은 저 자신을 불안하게 하더군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습니다.

한편, 이런 낯선 거리감을 응시하다 보니, 제게 또 다른 시선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두거나, 바깥에서 보니 사물의 다른 면이 보입니다. 보는 각도 정도가 아니라, 위치와 처지가 달라져서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다른 시선은 신앙인의 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 가곤 합니다. 신(神)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 그 하느님이 살과 뼈를 가진 아기가 되어 한없이 낮게 왔다고 믿는 이 기괴한 종교를 가진 신앙인의 어떤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신앙인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낯설고 기괴한 사람입니다. 종교, 혹은 신앙이 이 세상과 사회와는 조금은 다르게 낯설고, 거리가 있지 않다면 이를 종교라고 부르기 참 어렵습니다. 성탄을 통한 성육신 사건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를 분리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사건 자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사건으로 남습니다. 세상 끝날에 이르러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하기까지 이 낯선 거리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가 깨지는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하는 또 다른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성탄을 통하여 솜 결보다 부드러운 아기 예수의 친밀함과 따스함을 느껴야 하는 마당에, 거듭해서 낯선 거리감을 말하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거리감과 불편함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중요한 물줄기를 마련해 왔습니다. 좀 잘난 체 하는 말로, 그것은 어떤 사태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해석학적인 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내내 뽀송뽀송한 편안함과 위안의 말만 건네는 성서 풀이나 어떤 안락한 경험이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역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참 종교를 식별하는 기준과 방법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20세기 서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거론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 그리고 참 종교를 구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종교적인 언어와 모양새, 교리 체계, 신앙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축복합니다. 좀 더 깊이 보면, 사람이 가진 어떤 욕망과 심지어는 욕심을 배불리는 일에 봉사합니다. 종내에 이 사이비 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축복, 자기 가족 혹은 자기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는데 몰두합니다. 나보다 큰 것, 어떤 초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해도 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화려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여러 종교가 이런 사이비 종교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는 자기와 같은 전략을 갖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생각을 협박처럼 퍼뜨립니다.

한편, 유사 종교는 종교의 형태를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나 예배 같은 것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자기 자신의 복지와 축복에 집중한다면, 유사 종교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예입니다.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 인류애, 아니면 사회의 체제 등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떤 가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종교보다 이런 유사 종교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이념, 윤리적 이념이 차라리 낫다고들 합니다.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무신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어떤 비판적인 이념의 확장 때문이 아니라, 실은 사이비 종교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참 종교는 그 형태와 논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쉽게 간파하기도 발을 들이기도 어렵습니다. 특정한 종교적인 언어나 신앙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의 축복과 어떤 집단적인 가치의 실현을 생각하면서도, 그 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어떤 것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것, 자기 집단보다 더 큰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바로 참 종교의 태도라고 합니다. 이 개방성이 바로 자신과 어떤 집단을 초월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 상상력입니다. 참 종교는 모든 바른 것이 자기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너머인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초월’이라고 합니다.

초월에 참 종교의 길목이 있습니다. 이 초월을 향한 열림의 길로 들어서려면, 세상의 편하고 낯익은 것들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이 세상과는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 초월이 열립니다. ‘이곳’에 근거하여 축복을 끌어들여 만족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의 신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종교나 교회를 어떤 특정 이념에 다른 사회 변혁의 근거지로 만들려 하면 유사 종교의 활동가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참 종교인은 ‘이곳’이 불편하고 낯설고, ‘이곳’과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여러모로 매우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다른 외경 말고는 낯선 이야이입니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오늘 본문만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도 매우 이상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번 주일을 성 가정 주일이라고 칭하며 축하했습니다. 성탄 첫 주일에 그럴 듯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그 설정을 배반하는 듯합니다. 무슨 성 가정의 부모가 자기 아들 챙겼는지도 모르고 하루나 여행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까? 아니 무슨 아들이, 자식을 잃어버려서 애간장이 탔을 어머니의 염려에 뭘 모르는 소리 말라고 오히려 타박을 합니까? 이게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성 가정의 실체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을 좀 낯설게 보라는 초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조금은 낯설게 보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무엇을 당연하게만 듣지 말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 어떤 도전을 들으라는 말이 아닐까요?

3.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그 열림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보고 상상력을 키워나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교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신앙의 몇 가지 비전과 도전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운동에 대한 믿음이요, 이를 따르는 행동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눈여겨보면 좋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움직임에서 전체를 비추는 어떤 실마리가 드러나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서 지키기로 되어 있는 명절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세상의 공간을 떠나 거룩한 공간인 성전으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이 성과 속 사이의 지속적인 반복 운동은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원형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 적어도 매주에 한번 성찬례를 드리러 구별된 공간에 모이는 탓은 이러한 예수의 운동을 따르려는 중대한 훈련입니다.

다만, 하나 더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운동은 금세 매너리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얼른 정해진 일을 치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습니다. 아들을 챙겼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나홀로 집에’서나 보일 법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예수님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성전에서 기도하고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일이 자명한 대답을 건네주는 것이라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숙지한다고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포되는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석, 그리고 성찬례의 신비에 대한 경험과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으며, 그 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을 붙잡고 늘어질 때, 신앙의 발돋움이 있습니다. 바로 소년 예수가 보여주는 신앙 성장의 한 정점입니다. 여러 궁금증과 더불어 질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는 신앙생활의 운동은 정지하고 맙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명하게 주어진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시다. 교회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한 교회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한 비난과 그 생명력에 대한 비관이 넘쳐나는 이유는 하느님을 질문 속에서 찾기보다는, 자명한 대답을 주려 하거나 강요하고, 여러 질문과 씨름하지 않으려는 탓이 아닐까요?

둘째, 신앙은 균형 있는 긴장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조화입니다.

균형 있는 긴장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몸으로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긴장이 주는 조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낯선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오해받거나 욕먹기 쉬운 일은 갈등하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일입니다. 입장을 선택해서 주장하는 일은 쉬어도, 서로 다른 입장 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화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그 낯설고 힘든 화해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아프고 컸습니다. 그럼에도, 분열된 것들을 화해시키고 조화롭게 하기 노력은 우리 신앙인이 받은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바지에는 소년 예수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 사회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요? 몸을 극단으로 훈련하는 스포츠가 있는가 하면, 머리 사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놀라운 입시 지옥의 교육 현실이 있습니다. 몸을 가볍고 날씬하게 만들고, 예쁘게 고치는 일에 놀라운 투자를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국민 월평균 독서량은 한 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례와 예배 생활은 애초에 몸과 머리가 함께하는 일이지만,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좋은 ‘말씀’만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내 몸의 실천은 나 몰라라 합니다. 몸과 지혜가 함께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편, 하느님께만 잘 보이면 되고, 이웃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상실된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의 총애를 받는 소년 예수의 성장이 드러내려는 복음의 가치가 보이질 않습니다.

바울로 성인께서는 오늘 서신 본문에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덕목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에서는 그저 말 뿐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말하고, 감사의 생활을 입에 달고 살지만, 우리의 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는 권고 있지만, 절대로 가르침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남의 어느 교회가 교회당 건축에 2천억을 들이는 동안에, 국가 예산 절감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사회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로 서신의 원문에는 “옷을 입어라” “옷을 벗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뒤덮은 몸과 머리의 불균형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분리라는 우리 신앙의 분열증을 벗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옷을 입어라”하는 권고를 듣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른바 ‘신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균형 잡히고 긴장감 있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앙적 결단과 실천 속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낯선 사람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되, 비판적인 거리 두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한 사람들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유사 종교를 넘어서서, 참 종교의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낯선 거리두기의 시선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서 낯선 사람들이기를 자처해야 합니다.

4.

우리 인생에는 모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슬픔과 실패와 배신의 고통이 우리를 뒤덮어, 이 세상이 낯설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이러한 낯설어짐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림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상식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미 떠나간 우리의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녀과 함께 하는 ‘성인들의 친교’는 이 세상이 주는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기괴한 신비 사건들을 믿으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백성만이 누리는 희망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낯선 이방인 여러분, 하느님의 집 안에서 머물러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즐깁시다. 집으로 향하는 길과 예배의 공동체로 향하는 길의 반복된 긴장과 균형 속에서 여러분의 몸과 지혜를 날로 키워나갑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놀라운 지혜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신앙의 실천이라는 몸을 단련합시다. 복음의 가치 속에서 피차 낯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내는 초월의 공동체를 경험하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합시다. 그 즐김과 키움과 단련과 분투 속에서,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역설의 사건, 임마누엘의 신비를 높이 찬양합시다. 오늘 시편의 가수와 함께 그 신비를 목청껏 노래합시다.

“이제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주시니,
당신을 가까이 모신 이 백성,
당신을 믿는 모든 신도들에게 자랑이로다.”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교회 일치 강연 전문 – 일러두기

Saturday, November 21st, 2009

지난 10월 천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그리고 [사도 헌장] 본문 발표 이후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의 전문을 번역했다. 그 참에 그와 관련해서 적거나 번역했던 내용을 취합해서 교회에 돌렸다.

아래 내용은 첨부한 내용의 일러두기 내용이다. 간단한 배경 설명과 강연 요약, 그리고 번역문에 대한 몇가지 유의 사항을 적었다. 첨부 파일에는 이전에 올렸던 글들도 모아서 전반적인 이해를 높히도록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강연은 교회 일치의 교회론적 토대를 매우 아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그에 바탕하여 교회 일치에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 일러두기 내용 (아래 본문)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 강연 내용 요약

  • 번역에 대하여

  • 용어 해설
  • 인용 및 배포

@ 첨부 문서 내용 (아래에서 pdf 다운로드)

  • 캔터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 주낙현 신부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논평 –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2009년 10월 19일 천주교 교황청 신앙과 교리 성성은,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들이 천주교로 들어오고자 할 때,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특별 관리 교구를 만들도록 하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 전례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번 조처는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이 지난 몇년 동안 요청해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조처를 담은 [사도 헌장]은 근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고, 2009년 11월 4일 “ANGLICANORUM COETIBUS”라는 제목의 교황령 [사도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이 조처를 발표하기 2주 전에야 이와 관련 사실을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 전달했습니다. 발표 당일인 10월 19일 영국 천주교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발표에 관한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 기자 회견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발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갑작스러운 발표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기자 회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조치가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처 발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이미 제가 10월 21일 관구 게시판에 올린 글과, 11월 1일자 [성공회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제 개인 블로그인 http://viamedia.or.kr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 첨부)

한편,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는 이 교황청 조처에 대한 논평을 짧게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이 조처가 양 교회 간에 있었던 교회 일치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 성과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조처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주교 신자일 뿐이고, 이 조처가 교회 일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평은 관구게시판과 서울교구 성직자 카페, 그리고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게시했습니다. http://liturgy.skhcafe.org (이 문서에 첨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한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미 계획에 잡혀 있던 대로, 로마에 방문하고 강연을 했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와도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 앞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요한네스 빌레브란트 추기경(교황청 교회 일치 평의회 초대 의장, 1909-2006)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11월 20일)에 초대받아, 교회 일치의 신학적 주제와 도전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여기서 교황청 [사도 헌장]의 파장에 즈음하여, 교회 일치 대화의 방법론을 재정리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주제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은 성공회의 주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 동안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교회 일치 대화 문서의 정신과 그 신학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최근 천주교의 행태들과 조처들이 그간 스스로 참여했던 교회 일치 대화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최소한 이와는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강연 내용 요약

위에 말한대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강연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등이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와 그 문서들을 되짚으며, 교회 일치 대화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발전시켰던 교회론(Ecumenical Ecclesiology)을 되새긴 다음, 교회 일치 대화에서 논란이 되는 몇가지 주제들,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교회론에 바탕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난 40여년 동안 그리스도교계는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어떤 수렴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교회는 하나인 이중적인 선교적 전망,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communion), 그리고 이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친교를 지니고 있다. 교회 일치 대화와 실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교회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2. 특히, 선교를 위해 일치된 교회를 향한 지난 40여 년의 대화 속에서 볼 때, 이 교회 일치의 선교적 교회론에 따라서,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식별해야 한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합의해 놓고서, 부차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타당한 일인가?

3. 이 점에서 세가지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권위의 문제(교도권, magisterium)), 수위권(primacy), 그리고 지역 교회(local church)와 보편 교회(universal/catholic Church)의 관계이다. 거듭하거니와, 이 신학적 주제들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가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의 어떤 합의 원칙에 바탕하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4. 권위의 문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를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적인 친교를 지탱하기 위한 책임이 바로 권위의 근간이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상호 협력으로서만 권위가 설 수 있다. 규율적, 위계주의는 권위가 아니다.

5. 수위권 문제: 수위권 문제는 교회 일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나 함께 친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룰 때, 수위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열린다. 한편 교황청의 [사도 헌장]에 말한 조치는,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배려한 사목적인 조치일 뿐, 교회론적인 근거는 없다.

6.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 교회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거룩함 속에서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를 나누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자체로 보편 교회를 담고 있다. 지역 교회의 어떤 결정, 예를 들어 여성 성직에 관한 결정은 바로 이 세례받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의 거룩함이라는 전망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역적 결정이지만, 역시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다. 최소한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은 교회론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의 성과와 원칙을 지역적으로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성 주교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를 훼손한 적이 있는가?

7. 불일치 속에서 갖는 일치에 대한 전망: 지난 40여 년 일치 대화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신학적 원칙을 되새기며 여기에 자신을 내어 놓고 성찰해야 한다. 다시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원칙들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모순된 일이다. 그간의 대화에서 확인한 영적이고 성사적인 전망이 가져다 주는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번역에 대하여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들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영어가 평이하지 않으니 우리말 번역이 힘겹습니다. 이번 강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의 한계도 분명한 터라, 옮기는 과정에서 곤란이 겹쳤습니다. 몇가지를 머리에 담아 번역했습니다.

우선 직역을 강조했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경계는 없고, 정확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만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자체에 담긴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우리말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능력의 한계(우리말/영어)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들은 풀어쓰거나 의역했습니다. 또한 이미 통용되는 번역어 가운데 잘못 번역되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썼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깊은 뜻들이 왜곡되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우선은 독자들에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오역이나 잘못된 표현은 지적해 주십시오.

용어 해설

번역어로 사용된 몇가지 용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입니다.

천주교: Roman Catholic Church 에 대한 우리말은 ‘천주교’이니 모든 “Roman 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단어는 ‘천주교’로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이라는 용어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우리말 음차로 쓰는 ‘가톨릭’은 catholic 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디에서든 ‘catholic church’는 “(Roman) Catholic Church”와 대비되어, ‘보편 교회’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은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쓸 말이 아닙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뜻으로 쓰입니다. 이 표기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서 한 적이 있으니 참조할 수 있습니다.

자녀됨을 통한 공동의 거룩함: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거듭되는 말입니다. filial and communal holiness 등의 표현을 우선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친교 / 친교적 공동체: 이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친교’라는 말은 ‘communion’의 번역말입니다. 그저 ‘코뮤니온’ 혹은 원어를 따서 ‘코뮤니오’로 쓸까 했지만, 친교로 정했습니다. 좀더 설명이 깃든 번역어라면 ‘친교의 공동체’ 혹은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면 좋겠으나, 어수선해 보여서 그리 했으니, ‘친교의 공동체’ 쯤으로 읽어 주십시오.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교회론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라는 말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와 함께 쓰여, 삶의 맥락에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지역 교회’는 개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혹은 관구 같은 개별 교회의 지역적 연합을 가리킵니다.

인용 및 배포

이 번역문은 주낙현 신부의 사적인 공부와 성공회 성직자 및 신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원저자 및 번역자의 허락 없이 내용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인용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또한 번역문 위치 링크 이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배포하지 말아 주십시오.

PDF 다운로드 연결: 
http://bit.ly/8hHPxj
ABC_R_Williams_on_Ecumenism_Rome_2009.pdf

“화해를 위한 기도 요청”

Tuesday, March 10th, 2009

일전에 교회에서 내는 최소한의 성명서에 대해 운운했는데, 때마침 이메일로 “기도 요청”을 호소하는 글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 교회가 냈던 여느 성명서들과는 다른 시각과 맛과 호소력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언급하면서도 무엇보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거니와, 단문들에, 넘치지 않는 은유와 수사가 적절해 보인다.

참으로 다행이라 보는 건, 남북 화해에 대한 응시가 예전의 낭만적인 통일 운동의 시각을 많이 벗어났다는 인상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화해의 문제가 여전히 큰 화두다. 남과 북이 한 혈육이요, 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은 이 통일지상주의의 “뒷구녕”에서 남과 북은 독재를 일삼았다. 압제자는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정치의 거름으로 삼으니, 최근의 남북 대결 양상은 양쪽에 있는 두 사회가 한줌 밖에 안되는 지배 세력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뻔한 책략에서 비롯했다. (이런 점에서 반목과 질시를 에너지로 삼아 분열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의 화해는 더이상 어떤 압제의 핑계를 만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요 출발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이 화해의 문제는 우리 “남한” 사회, 그리고 우리 교계 안에 더 큰 화두로 남아 있다.)

스스로 참회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며, 좀더 너그러운 신앙과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자는 주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생각을 깊이하자는 이 호소는 아직 성글지만, 이 사순절에 참 반가운 격문이다.

그런데, 이 격문을 어디에다 붙였나? 유통의 방법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성직자들에게만 이메일 “한방”으로 던지고는 말았다. 교회 주보에 싣든지, 웹사이트에 싣든지, 아니면 미사 때마다 드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의 형식을 빌도록, 좀 친절했었으면 싶다. 고마운 마음에 던지는 투정이다.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안 좋아서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했는데, 그게 좋아질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맘몬적 경제 논리로만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 보니, 그것과 맞물려 있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 주권 재민의 문제, 생존권, 역사, 교육, 인권, 언론의 문제, 공정성, 국가폭력, 생명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개발독재의 야만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야만의 잔재들을 문신으로 새긴 천박한 폭력적 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개발독재의 망령이 국토 개조란 허망한 이름으로 이 강토와 생명을 향해 폭행을 가하고 있습니다. 맘몬에게 얼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와 생명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는 멀어지고 갈등이 깊어갑니다. 한때 개선되었던 남북관계가 대결 상황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암울했던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일그러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생애 처음 광야에서 맘몬의 손짓을 물리친 서른 살 청년 예수를 생각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교회)는 그 맘몬의 손짓을 현실론과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의 삶의 자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맘몬이 던져놓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현실론의 올가미에 걸려들자마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뒷전으로 밀쳐놓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원죄이며, 우리(교회)가 안고 가야 할 시대의 고통입니다.

맘몬주의가 세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곧바로 평화의 문제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평화가 한없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었던 화해의 분위기가 와해되는 상황을 목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를 위해 부르셨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도의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지금까지의 죄책에 대한 고백과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 자유의 근본적인 가치를 불편해 했던 이기심과 안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에 기초한 맘몬주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먼저 남쪽 내부에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화해 이전에 남쪽 내부에 오래도록 얽힌 증오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남쪽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귀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생각의 차이를 담아 들을 수 있는 신학, 신앙적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편향도 담아내는 큰 그릇(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넷째, 생명의 문제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상에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2009년 3월 10일

TOPIK

대한성공회 평화통일선교특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