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찬례와 선교의 비전

아래에서 소개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인터뷰는 이런 저런 논란거리로만 언급되고 말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질문들 사이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아우르는 영성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성찬례의 신학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드러내곤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성공회 신학자다운 위험한 균형 잡기에서 신앙의 길을 찾고자 한다. 그 길은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고 교회 선교 사명에 대한 연대와 실천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한다. 몇 가지 내용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성찬례

Q. 한때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그저 그런 도덕 선생을 드러내는 신학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와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대주교는 성찬례를 통해 드러나는 “신비한 몸”을 통한 예수의 이해를 강조한다.

R.W. “예수의 신성은 신비한 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게 되면 삶의 목적으로서 예수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성찬레를 통해서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이다. 우리가 예수에 대한 신심에 대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전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바로 성사적 그리스도(the sacramental Christ)에 대한 감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 흘러나오는 생명이다. 성령은 이 생명으로 우리를 연합시키고 묶어 주시며, 우리가 제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예수의 기도에 참여하게 하며, 이로써 예수의 생명을 받게 하신다. 이것이 모든 개인적인 기도, 공적인 기도의 근간이요, 모든 것이다. 내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나 랑베르 보뒤엥(Lambert Beauduin)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전례 운동의 신학이다.”

Q. 미국 가톨릭 작가인 Flannery O’Conner는 성찬례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며, “내 인생의 핵심이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소진되고 말 것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R.W. 동의하지만, 세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다. 성찬례는 상징이다. 오코너가 상징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상징이 어떤 실재에서 떨어져 나와 그저 생각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상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찬례는 어떤 시각적 보조 장치가 아니며, 우리 기억을 잠깐 흔들어 되새겨 주는 것이 아니다. 성찬례가 이 세계를 뒤흔드는 어떤 사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그런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해 반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례에 대한 내 생각의 핵심이다.

Q. 그나저나 성공회는 화체설과 가까운가?

R.W.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앙 조항이 화체설에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탓에, 성공회는 특별히 그런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언가 일어났다는 식의 특정한 이론에서 사로잡혀 있어서 문제가 생겨난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픈 것은 떡과 잔이라는 성사가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예수의 힘을 담지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몸과 피가 그분의 힘과 정체를 온전히 담지했던 것과 같다.

2. 교회의 선교 사명

Q. 왜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는가?

R.W.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반발이라기 보다는, 여러 교회들의 물질주의적,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세속 사회와 결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책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러시아 혁명기에 유럽으로 이민 온 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볼세비키 혁명을 반대했지만 사회의 정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여러 공장주들을 찾아가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많이 호소했다. 공장주들이 “그들은 동물이나 다름 없는데 왜 그리 신경쓰느냐”고 묻자, 그는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게 내가 그들과 상관하는 이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비전과 상상력이다.

Q. 곧 교황을 만날 터인데, 그간 양 교회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은 명백하다. 가시적 일치가 요원해 보이는데, 도대체 양 교회 사이에 도대체 뭐가 남은건가?

R.W. 아직 많은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 여성 성직이 문제가 되는가 이야기해야 하고, 교회 일치의 가능성을 볼 수나 있는가 물어야 한다. 반면에 현재의 교황제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어떨게 될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이런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양 교회는 지금 시장에서 경쟁하는 처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속 사회 한가운데, 도대체 편안한 마음을 갖기 어려운 세계에 함께 서 있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주제는 기구적인 일치를 넘어서 좀 다양해져야 한다. 즉 구체적인 협력의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함께 할 일이 있고, 이미 수단에서는 양 교회가 함께 협력하고 있다.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많은 교리적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기구적 일치까지 가기는 넘어야 할 산이 많기 하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아프리카의 교육과 화해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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