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November 1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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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마태 25:14-30)

교회력 막바지에서 우리 인생도 명백하게 마지막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을 책임 있게 가꾸는 삶의 준비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제 교회의 삶도 생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저마다 다른 달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는 잘 알려진 만큼이나 오해도 많습니다. 그 핵심은 우리 삶과 교회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깊이 변화하지 않으면 ‘통곡’하리라는 경고입니다.

달란트는 우리 삶과 교회에 맡겨진 선물이자 책임입니다. 한 달란트는 20년 동안 한 푼 쓰지 않고 벌어야 하는 큰돈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달란트 분배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차별이 아니라, 감당할 책임을 헤아린 배려입니다. 행운이든 능력이든, 재산과 학식, 지위와 명예가 높다면 그만큼 책임의 무게와 양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서 본문에 쓰인 ‘더 벌었다’(16절)는 말은 경제 용어가 아니라, 신앙 용어입니다. 투자 이익을 셈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 이루는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의 ‘확장’을 확인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과 교회가 하느님의 영광을 ‘두 배’로 드높이 보여주며 살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느님은 책임 수행의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얼마 뒤’라고 한 공동번역과는 달리, 원문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옵니다. 기회와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오래 견디며 계속 도전하는 일이 신앙생활에서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신뢰와 의지 안에서 우리 처지를 헤아리시어 하느님 나라 확장의 능력과 책임을 주십니다. 신앙인은 성급한 성과에 붙들려 서둘거나 남의 것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신 선물에 기대어서 새롭게 도전할 뿐입니다. ‘성공회다운’ 전통과 전례, 영성과 실천은 우리가 오래도록 견디면서 펼칠 달란트입니다.

시도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용서와 격려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실패의 두려움 속에서 용서의 은총을 맛볼 기회마저 잃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이를 일으키시는 격려의 손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두려움의 결과, 오히려 주인을 향해 비난의 논리를 펴니 애처롭습니다.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여 퍼뜨리는 시선과 언행은 신앙의 질병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야 할 교회가 시기와 질투, 자리 세습과 자기 영역 확장에 빠져드는 오늘입니다. 변화의 시도와 올곧은 비판을 두려워하는 소심함은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힐난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물을 파묻는 교회를 오히려 세상이 걱정하는 형국입니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 더 번 사람에게 주는 일이 부당할까요? 이는 신앙의 용어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머물면, 우리는 ‘통곡’의 자리로 쫓겨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은 매장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캐내어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덤으로 주어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이 세상에 더 널리 드러나도록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작은 인생과 작은 교회에 값진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우리와 교회는 그 선물과 책임을 다하는 신실한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변화냐, 통곡이냐. 이 선택에 응답할 마지막 때입니다.

개혁 – 오직 사랑만이

October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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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 오직 사랑만이 (마태 22:34-46)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습니다. 여러 개신교에서는 특히, 오늘을 종교개혁 주일로 성대히 지킵니다. 독일의 수사 신부 루터가 중세 서방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신앙 행태를 비판하며 개혁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줄을 잇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회와 교회를 둘러싼 크고 작은 정치적 변화를 겪느라 너무 바빴는지 모릅니다. 마련된 행사들은 많아도 개혁의 뜻과 가치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어디 시대, 어느 사회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가로막히거나, 인간의 자유롭고 정직한 감사의 찬양이 왜곡되고 억압당한다면, 개혁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번역어를 수정해야 합니다. 원래 말이 ‘개혁’(Reformation)이듯, 개혁을 종교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개혁은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새겨진 뜻과 질서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 교회와 공동체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개혁의 기준을 한목소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인간도 거룩하여라’(레위 19:2). 우리는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니 거룩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보살피는 사람’(1데살 2:7)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라”(37-38절). 하느님의 거룩한 존재를 서로 보살피며 사랑하는 일이 개혁의 기준입니다. 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사제입니다. ‘만인 사제’ 혹은 ‘신자의 보편 사제직’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여기에 근거를 둡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만든 논리를 개혁합니다. 고정관념처럼 되뇌는 교리와 신앙생활의 경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막는 걸림돌이기 쉽습니다. 혈연과 지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의 정통성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족보로 판가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선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족보를 넘고 인맥을 넘습니다. 하느님의 가치인 사랑 앞에서 누구든 무엇이든 굴복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개혁을 이끌고 완수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꿈과 미래에 식별의 기준을 둡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숨결이 깃든 인간 존재 자체에 판단의 기준을 둡니다. 이 사랑의 희망 속에서, 얼마 전 우리 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교개혁기념 음악회의 외침과 찬미가 우리 삶에 이어져야 합니다.

“또 다시 미래를 / 통계를 넘어 미래를 / 정치를 넘어 미래를 / 은하수보다 더 큰 미래를 / 그래, 또 다시 미래를 / 숨쉬는 모든 것들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

October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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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1

주낙현 요셉 신부 (전국 GFS 동행사제 ・ 서울주교좌성당)

이번 여름 나는 적잖은 특혜를 누렸다. 한국 GFS 동행사제인 탓에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성공회 GFS 대회에 참가했다. 푹푹 찌는 북반구 여름을 피하여 싸늘한 남반구의 늦겨울로 들어갔다. 허덕이다 풀린 땀구멍이 금세 긴장하여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짜릿한 피서의 특혜였다. 여성 대회인 탓에 우리 무리에서는 나 홀로 청일점이었다. 여성들의 까르르한 웃음에 두 주 동안 둘러싸인 경험은 늘 심각한 남성들 모임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유쾌한 특혜였다. 주요 회의 일정, 워크숍과 문화 체험은 내게는 도리어 나중 순서의 특혜였다.

불편하기도 했다. 남성 봉사자들을 한 데 구겨 넣은 침실은 좁고 추웠다. 예상했지만, 여성 대회인지라 남성인 나는 소수자로 왜소해지고 낯설었다. 남성들은 대체로 내 아버지 뻘 되는 분들이었는데, 여성 대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느라 바빴다. 회의 의제나 진행 방식이 생소하여, 그 어색함이 남성 회의와 여성 회의의 차이인지 잠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게는 꽤 지루한 회의 일정이었으나 너무도 즐거워하는 우리 GFS 회원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였다. ‘이분들이 원래 이런 분들이었나?’

불편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조금씩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 여성의 소소하지만 커다란 기쁨을 알았다. 집을 잠시 떠나, 가족의 세끼 준비 고민 없이, 줄만 서면 맛 좋은 음식이 나오니 여유로움이 넘쳤다. 이 작은 자유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올곧게 활짝 피웠다. 이 작은 해방의 기쁨을 한국 남성인 내가 그동안 잘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체로 나이 칠십이 넘은 다른 나라 배우자 남성들은 봉사자로 참여하여 싸늘한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도록 대회를 도왔다. 내가 한국에서 남성으로서 누리는 권리를 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 주름진 남성들의 얼굴에도 즐거움과 유쾌함이 가득했으니까.

이어지는 배움은 고통스럽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도 여전한 가정폭력의 실태, 이를 벗어난 후에도 후유증으로 여성이 평생 겪는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되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기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와 여성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다시 배워야 했다. 여전히 연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위태로운 생명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배움은 불편하고 낯설수록 더욱 값지고 기쁘다. 자신을 반성하여 고칠수록 보람차다. 신앙은 불편한 배움과 성찰로, 좁고 옅은 자신을 넘어 더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를 꿈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조금씩 우리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세계 GFS 여성 신앙인들은 빡빡한 일정 안에서도 도움의 살림살이를 계획하는 일에 지루한 내색이나 다툼 없이 선의의 협력에만 골몰했다. 교회와 세계 여성의 현실을 곱씹어 배우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에 땀 흘리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 까르르하는 즐거움이 교회와 세상을 바르게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 배움과 도전이 세계 GFS 여성 회원들이 내게 선사한 불편하고 아름다운 특혜였다.

  1. 한국 GFS 소식지 <우물가> 2017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