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향한 십자가와 변모

March 1st, 2015

부활을 향한 십자가와 변모 (마르 8:31~38, 9:2~9)1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어둠, 세상의 어둠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의 빛과 생명을 향해서 걷는 삶’입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광야에 나아가 우리의 슬픈 어둠과 세상의 아픈 어둠을 제대로 경험하고 깨닫는 사순절 신앙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신앙 여정의 조건과 목적지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고통과 세상의 아픔을 연결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새로운 생명의 계획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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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활의 삶을 기대하지 못하고 ‘십자가’가 드러내는 어둠과 고통에 사로잡힌 신앙이 눈에 자주 띕니다.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는 인간이 지닌 어둠과 잘못에만 집착하여 자기 삶에 벌이 뒤따를까 두려워하는 종교심이 즐비했습니다. 이 벌을 없애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다는 교리가 자라났습니다. 이런 생각에 머무는 태도는 신의 진노를 피하려고 종교를 찾는 여느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 속 좁게 이런 위협으로 우리 신앙을 이끌어내시려는 분일까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소재 정도로 이해하면 부활에 관한 이해도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인간의 고통과 이웃의 고난을 잊고서 ‘부활의 축복’을 구하는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십자가에 새겨진 인간 예수님의 고통이 세상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보는 창(窓)이 되지 않으면, 부활은 여느 기복 종교가 던져주는 개인의 ‘값싼 은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온세상에 두루 미치도록 풍성한 하느님의 은총을 사적인 이익과 복에 제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한 장면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벌이는 한판 논쟁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서야 넓고 깊은 생명이 드러날 테니 그 수난의 길을 걷겠다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려다가 ‘꾸짖습니다’(성서 원어: epitimao). 예수님도 질세라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꾸짖습니다’(epitimao). 자신의 고통을 피하거나 세상의 어둠에 눈감지 말고, 오히려 대면하여 ‘짊어지고’ 가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신앙이라고 일갈하십니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는 지우개로 신을 기대하거나, 벌을 피하는 수단이나 제 이익에 따라 신을 이해하려는 종교 행태를 향해 던지는 도전이자 대결입니다.

오늘 복음의 또 다른 장면인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부활을 예견합니다. 그 부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 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이집트 노예 탈출을 이끌었던 해방의 지도자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악행을 저지르는 권력에 맞서 싸우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예언자가 아닙니까? 이들과 함께 등장하신 예수님은 성서에 면면히 흐르는 인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전통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종교적 두려움으로 대하고, 종교의 ‘초막’에 안주하려는 제자들에게 하늘에서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의 고난을 보고,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귀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두려움을 이기고 세상이 겪는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의 희망과 생명을 향해 걷는 순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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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1일치 – 수정(↩)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February 22nd, 2015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마르 1:9~15)1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선언과 함께 이마에 재를 받으며 사순절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절기는 40일 동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인생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성찰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신앙을 되새기며 걷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경험, 갈릴래아 선교는 사순절 여정의 흐름과 본뜻을 알려주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에 초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는 과거를 씻어내고 청산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아울러 세례의 좀 더 깊은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세워주신다는 은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굳게 닫혀 무서울 것 같은 하늘을 ‘가르고’ 비둘기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려왔다는 장면의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은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성공과 성취, 안녕을 보장하리라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례의 성령은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를 힘겨워 흔들리기 쉬운 광야로 이끌어갑니다. 그 광야는 무서워 피하고 싶은 곳이며, 외롭고 갖은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세례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은 축복의 보장이 아니라 여전히 광야 경험의 연속이기 일쑤입니다.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실까요?

광야는 우리가 저마다 지닌 내면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이를 보듬어 다스리지 않고서는 우리 신앙의 도약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온갖 어둠과 두려움, 여러 유혹이 넘실대는 광야의 추운 어둠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그 눈물은 이제 우리 마음의 어지러운 눈을 씻어내는 세례의 물이 되어 세상을 새롭고 청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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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둠은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세상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대면하고 만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고통과 어려움의 눈물을 흘려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요, 그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서로 발견하며 연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겪는 광야 경험은 수고스럽고 고통스럽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얻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전도와 선교도 어둡고 추운 광야에서 흘린 눈물 머금은 시선과 용기에서 비롯합니다. 아름다운 친구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순간에 등장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외침과 고난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는 유혹과 위협이 계속되는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의 선교를 감당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와 광야와 전도가 이어지는 장면은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먼저 이루고 알려주는 듯합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광야의 눈물과 용기와 연대로 이제 부활을 향한 발걸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순절 신앙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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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22일치 – 수정(↩)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February 15th, 2015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마르 1:40~45)1

오늘 구약성서와 복음서 본문에 나온 ‘나병’의 실체가 현대인이 아는 ‘한센병’과 같은 병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이 불편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한 피부병이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한센병이든 심한 피부병이든 이런 병을 매우 무서워하며 그런 병자를 차별하고 모욕했던 역사와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삶을 더욱 비참하게 했던 병을 두려움과 차별의 눈으로 ‘하늘의 형벌’[天刑]이라 부르며 그 병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과 수도자, 성직자가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과 그의 동료 수녀님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한국 성공회도 일찍이 남양주 마석에 한센병 음성인의 마을인 ‘성생원’을 마련하여 이분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고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차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삶이 신앙인 것을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신앙인의 삶과 증언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닮아가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나병 환자’의 고통과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마르코 복음서의 호흡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만큼은 느리고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옮을까 무서워 손대기 주저하는 병든 몸에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갖다 대시며’ 치유하신 행동을 기술합니다. 마음의 측은함과 두려움을 넘는 몸의 친밀하고 세심한 행동이 함께 어우러져 치유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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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치유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치유는 한 사람이 사회에서 처한 지위와 현실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정결법’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던 사람의 지위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라고 하신 까닭입니다. 한 사람의 치유는 몸과 마음, 공동체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여러 사회 정치 문제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면모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치유를 위한 측은지심과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한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우리 신앙인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주시는 깊은 당부처럼, 신앙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우리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후기: 이 짧은 글을 쓰며, 나는 한하운 시인(1920~1975)의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1949년)을 떠올렸다. ‘전라도’와 ‘소록도’가 우리 사회에 대물림되는 고정관념과 차별의 행태 속에서 포개졌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나병 걸린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도 겹쳤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나아만 장군이 같은 병으로 절망하는 순간,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의 노획물(패배자)인 유대인 ‘몸종’(노예) ‘소녀’(여성)로 바뀐다. 예언자 엘리사의 명령에 거만한 나아만이 여전히 권력의 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할 때, 그를 설득하는 이들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었다.

이 역설과 전복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에 면면히 흐른다. 하느님 나라는 이 전통을 사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와 ‘소록도’가 상징하는 역사와 기억의 실체 안에서 이 신앙의 역설을 알아내고 삶의 전복을 마련하며 남은 발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문화와 사회는 먼 일이 된다.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15일치 –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