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며 대화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January 28th, 2015

히브 10:11~18 / 시편 110:1~4 / 마르 4:1~2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2015년 1월 2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있고 입장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이미 있거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왜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이 생기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의문과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또는 더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궁색한 대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은 답이라기보다는 당장 겪는 시련과 고통에 어떤 위안을 주고 진정 효과를 내려는 진통제와 같은 위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가 치료 약은 아니라면서 처방조차 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문제의 원인과 답을 계속 찾고 그 치료책은 찾아야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을 살필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여러 종교가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종교의 유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여전히 중요한 일은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우리 삶을 멈추지 않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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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늘 복음 말씀은 매일 아침 성찬례에 참여하시는 열심을 지닌 신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태도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와 그 비유에 관한 풀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아 놓고 전하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왔다가 곧바로 말라 죽었고,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자고 씨를 뿌렸는데,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잃어버리는 씨도 많고 실패도 거듭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과 선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작으나마 좋은 땅에서 자라나 잃어버린 다른 씨앗을 보상하고도 남을 수확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 넘쳐나는 수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이제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기 하지 않겠다는 희망이 간절합니다.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겠다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 절망 끝에 나오는 희망의 수확으로 자기만 먹고살지 않고, 풍족하게 나누며 살겠다는 꿈이 다부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많은 분은 어쩌면 원래 비유 이야기인 첫째 부분보다, 하나의 해석인 둘째 부분에 더 익숙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풀어주신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 풀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쓴 마르코와 그 동료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전도와 선교활동의 어려움을 되새기면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땅의 여러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뜻을 붙여 풀어내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의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씨는 복음이고, 여러 가지 조건의 땅은 사람들의 신앙 태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신자가 되었지만 박해나 고생이 생길라치면 곧바로 포기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되 현실의 여러 걱정거리와 재물 욕심과 유혹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듬고 굳세게 하여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태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의 원뜻을 늘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온갖 고생과 절망의 상황이 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희망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확으로 많은 사람을 풍족히 먹이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꿈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뜻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지, 흔들리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해야 어려움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처지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다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일을 통해서 신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고 되돌아보게 하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바로 그런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특히 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가장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12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성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널리 퍼져나가던 설교 수도회 도미니코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머리를 흉하게 깎고 절제와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절제로 바로잡아 기운을 비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했습니다.

귀족이었던 가족은 토마스 수사를 잡아다가 집에 가둬놓고 수도회 생활 포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감옥을 탈출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쾰른과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를 넘나드는 굴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가 없는 교회는 그 기초가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부패와 타락이 스며듭니다. 토마스는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를 시기하며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러 번 교회 당국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당호하고 보호하며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토마스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제대로 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하며,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환히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축일은 성인 태어난 날도 아니요, 세상을 떠난 날도 아닙니다. 바로 <신학대전>이 처음 출간된 날입니다.

서방 교회 신학 전체를 주름잡던 그는 실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묻습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 토마스는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해 교회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뤄낸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교회 공의회에 참여하는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가 경험한 신비 체험을 적었습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이 쓴 것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맛보겠지요. 신앙이 흔들릴 일도 많고, 유혹과 시련이 많겠지요. 그때마다 새롭게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합니다. 온갖 시련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은 끝내 결실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여 반성하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쇄신해 나가는 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영급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감하게 자신 전체를 던지며 살아가다가, 삶 한가운데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수고를 잠시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의 말을 잘 따랐다. 너의 삶으로 나에 관해서 참 잘 썼다.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아무도 우리는 토마스 성인을 따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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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Crivelli, 토마스 아퀴나스, 15세기)

오그라진 손 vs. 오그라진 마음

January 21st, 2015

히브 7:1~3, 15~17 / 시편 110:1~4 / 마르 3:1~6

2015년 1월 2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그라진 손과 오그라진 마음” – 오늘 복음서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떠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어쩌면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본디 온전하던 것이 왜곡되고 뒤틀려서 제대로 구실 하지 못하는 것들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과 사람을 만드셔서 숨을 불어넣으시고 축복하시며 “참 좋다”고 연발하셨던 그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부서진 관계, 창조세계와 인간이 서로 해를 입히고 파괴하는 관계, 사람과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억누르는 관계는 모두 뒤틀려서 ‘오그라진’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를 바로잡는 일을 ‘치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악령을 몰아내는 것이든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든 모두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이러한 치유는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개인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왜곡과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이웃과 누리는 관계가 뒤틀려서 생깁니다. 예수님에게 치유는 개인을 넘어서 늘 한 사회와 세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때 대체로 어떤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않고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때로 죄를 용서하시며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더라도 그 죄의 내력에 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 이야기는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과 겪는 이상한 갈등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그라진 손’으로 고통받던 한 개인을 고쳐주시면서, ‘오그라진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과 사회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보여주십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처럼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기다려서 안식일 다음날 했어도 됩니다.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행동은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단을 만들고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중에 나도는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따위에 마음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비와 사랑을 바른말과 옳은 행동으로 밀고 나가신 분입니다. 이것이 뒤틀린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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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으로 ‘곧게 펴진 손’은 이제, 멀쩡한 겉모습 안에 담긴 ‘오그라진 마음’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잃은 나라를 다시 세우며, 세속화하던 유대교를 개혁했던 신앙운동가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뿐만 아니라, 성서에 관한 지식도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명예와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지위와 권력으로 더 나은 종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위와 권력의 맛에 심취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며 보살피라고 준 지위와 권력의 본뜻을 잊고 사람을 억누르고 부리는 힘으로 오용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은 탄식과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앙 운동이 부패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 운동은 이제 거드름 피우는 율법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힘없는 많은 사람이 비틀리고 오그라진 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종교와 사회를 바로 잡아 공동선으로 이끌라고 준 권한을 내팽개치고 직무유기하는 무책임한 집단의 방해마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직무유기가 “악한 일”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종교와 사회, 정치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과 분노가 선연합니다.

이 탄식과 분노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응책이 놀랍습니다. 자신과 늘 갈등하며 싸우고 지냈던 헤로데 당원들과 합작하기로 합니다. ‘예수’를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원래 이념마저 포기하고 종교와 정치가 합작하여 ‘죽이는’ 일에 작당한 것입니다. 악한 행동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지켜내기에 급급하여 만들어 낸 ‘오그라진 마음’입니다.

오늘 읽은 서신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멜기세덱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이 종교와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되새기게 합니다. 창세기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 멜기세덱이 왜 신약의 서신서에도 등장하는 것일까요? 멜기세덱은 사제이자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정의로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와 사회, 정치의 지도자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살렘’은 ‘샬롬’에서 나왔습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정의로운 권력만이 평화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그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바른 신앙의 싸움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을 떡과 포도주로 먹이고 힘을 돋우며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사제 멜기세덱이라 부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우리가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용기와 힘을 내라는 선물입니다. 신앙의 결단과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과 서신을 읽으며 우리는 304년 로마에서 순교한 아그네스 성인을 기억합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던 아그네스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부와 권력에 관한 관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자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청혼했으나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예수님과 결혼했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아그네스에게 치욕을 주려고 옷을 벗겨 거리에 끌고 다녔지만, 신비하게도 그의 머리가 자라나 온몸을 덮었고 금세 탈출했다고 합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겁탈하려 했지만, 신비하게도 그에게 가까이 오자 눈이 멀어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칼로 목을 쳐서 죽였지만, 그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옷을 적시며 순교의 신앙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아그네스를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羊)과 함께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양을 뜻하는 라틴어 ‘아뉴스’(angus)로 잘못 이해하거나 말장난을 하여 의미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원래 아그네스는 라틴어가 아니라, 희랍어 ‘아그네’(agne)에서 나왔습니다.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아그네스 성인의 삶에서 보듯이 이 순결함과 거룩함은 부와 권력의 포기를, 그리고 신앙의 용기를 뜻합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그는 연약한 소녀들, 미혼 비혼 여성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특별히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작은 무리로 이 아침에 모여있는 우리는 이제 ‘오그라진 손’을 바르게 펴서 어떤 손길을 세상에 내밀어야 할까요? 세상의 온갖 ‘오그라진 마음과 행동’으로 피해를 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어떻게 보살피고 치유하여 그들과 함께 서야 할까요? 정의와 평화의 사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사람으로 서야 할까요?

와서 보라! – 초대하여 함께 벽을 넘는 신앙

January 18th, 2015

1사무 3:1~20 / 시편 139:1~6,13~18 / 1고린 6:12~20 / 요한 1:43~51

2015년 1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연유와 내력이 있든, 신앙은 항상 누군가 마련한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떼어 어느 자리에 모이는 일로 시작합니다.

초대받아 모인 공간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성서를 통해서 선포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마다 지닌 기도의 제목을 이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 마음 깊이 하느님께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와 자매, 교회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서 주신 이 성찬의 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고 마시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리고, 말씀을 먹고 성찬을 나누는 곳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 초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초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질문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색깔이 독특합니다. 나름대로 지각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젊은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함께 사는 제사장 엘리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는 늙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이상한 음성을 들은 사무엘이 다시 엘리를 찾아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늦게서야 엘리는 자신의 오랜 신앙 경험과 경륜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의 음성에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도 알려줍니다. “하느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늙은 엘리의 시대가 가고, 젊고 활기찬 사무엘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나이 든 제사장 엘리의 효용 가치가 떨어져서, 더 쓸모 있는 젊고 새로운 사무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부족한 해석이어서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급한 해석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의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뜻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선을 바꿔서 돌아보면,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초대를 알아차리도록 돕고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도록 돕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라는 이름의 뜻은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지혜와 경륜으로 젊은이의 식별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장직을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엘리는 자식이나 가족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세심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물려주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엘리에 관하여 전하신 소상한 말씀을 자신에게 숨김없이 전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신앙이 곧 고상한 신앙입니다.

어쨌든, 사정을 모두 알아차린 엘리는 사무엘에게 조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합니다. 그 응답할 내용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줍니다. 매우 겸손하고도 성실한 어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고상하고 성실하며 연륜 깊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무엘을 눈여겨봅니다. 사무엘은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른이었던 엘리의 식별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식별 도움을 얻고서야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듣고 공부하고 새긴 만큼만 밖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이상한 고집과 주장으로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은 꽤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리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 경험에서도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밖에서,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서, 밖에 있는 지혜와 통찰과 경륜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서로 귀 기울이지 않고는, 서로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훈련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과 나 자신의 주장을 혼동하고 맙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이 서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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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먼저 제자가 된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전하고 기다렸던 ‘어떤 분’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의 초대에 친구도 초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돋보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자신의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을 드러냅니다. 우리 사회와 빗대어도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학력과 지역 차별, 재산과 지위에 따른 차별의식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기는커녕,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그의 깊이를 헤아려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에 관한 신앙인의 태도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경륜에서 얻은 확고한 신념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종종 ‘내 신앙 체험과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는 합니다. 밖을 향해서 어떤 판단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나타나엘은 깨닫습니다. 오히려 밖에서 오는 친밀하고 따뜻한 발견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오랜 지식과 체험은 종종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자기 내면의 눈을 가려서 사람 판단, 사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을 받아들이고 안팎으로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인 ‘율법’의 원래 뜻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일’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신앙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일이기에 앞서, 예수님의 삶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맺은 관계의 모본에서 배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당신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알 수 없는 탐험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탐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필립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와서 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드라진 표현이 사람의 움직임과 참여를 드러내는 동사인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몸소 걸어서 참여하고 관찰해야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로만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람을 가르는 차별과 사회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집니다. 대신, 초대와 환대, 그리고 친교가 어떤 학력과 출신과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전례 전통이 깊은 우리 교회는 “와서 보라”는 초대로 사람을 이끌고 환대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게 찬양하러 모입니다. 그윽한 연기를 피워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냄새를 맡고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며 참여하여 함께 그 깊은 맛을 느끼고,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고 그 길을 따르는 새로운 탐험, 신앙의 순례를 이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귀를 기울여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고상한 삶과 신앙의 조언을 건네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여 차별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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