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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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

전례 노트 – 순례자의 미사

October 18th, 2014

오늘 오후, 지난 9월 29일에 진도 팽목항에서 시작한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도보 순례단이 광화문에 도착했다. 광화문에서 보고회를 마치고, 도보순례단과 함께 참여한 선한 이들이 서울주교좌성당에 모여서 순례 감사 성찬례를 드렸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성찬례를 주관하기로 했다.

순례단을 받아들이는 사안을 둘러싼 여러 미안함과 면목없음에서 나온 주저함을 뒤로하고, 소탈하게 성찬례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순례의 주제가 제대로 드러나는 성찬례를 드리려 했다. 주교좌성당의 여러 신부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 피하고 싶었던 강론까지 맡았던 차에, 당일 새벽 3시 반까지 뜬 눈으로 버티면서도 글자 한자를 백지에 적지 못했었다.

이번 성찬례 기획의 초점 몇 가지를 밝힌다.

1. 환영예식: 창세기 18장,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입당 직전, 순례자 환영 예식으로 설정했다. 성당 정문 입구 성천(세례대) 주위에 순례자를 환대하며, 집전사제는 이렇게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이 말과 함께, 우리는 입당 행렬에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제대를 향하여 입당했다.

2. 강론: “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 4세기경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새로운 삶의 비전과 전례 행동을 보고 기록했던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모티프로 삼아, 순례의 신앙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와 연결하여 해석했다. (강론 전문 참조).

3. 신자들의 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의 성인 호칭 기도와 별세자를 위한 연도를 혼합하여,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한 명씩 정성껏 불렀다. 이는 우리 전통의 초혼(招魂)과도 닮아있다. 이 호명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로 함께해 주셨다.

4. 성체배령-영성체: 성찬례는 삶의 변화를 뜻한다. 지금까지 순례자들은 나그네로서 환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찬기도가 끝난 후, 이제 기존의 순례자들은, 성체를 모시기 위해 제대를 향하여 ‘순례’하는 이들을 환대하고 먹이고 보살피는 환대의 벗들로 변화된다. 이 변화와 아름다운 역할 나눔을 드러내기 위해 순례자들이 성체배령을 하도록 조정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순례자가 된다.

이 네 가지 초점의 기획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참여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모두 순례자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다.

잘린 머리를 들고서 – 성 데니스 축일

October 9th,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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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데니스 축일 (10월 9일)

성 데니스(St. Denis)는 3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의 주교로 활동하다 순교한 성인입니다. 로마 제국 발레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일어난 그의 순교에는 기괴한 전설이 따라 붙었습니다.

파리 시내의 한 언덕에서 동료 성직자들과 참수를 당한 데니스 주교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강론을 펼쳤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그가 처형된 곳이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순교자의 산)이며,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고서야 죽음을 받아들여 안장된 곳이 생-드니(Saint-Denis) 현(睍)입니다. 6세기에 이르러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서기 시작하여 지금의 생 드니 바실리카 성당이 자리 잡았습니다. 성 데니스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기괴한 전설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주교는 교회를 위해 동료 성직자와 더불어 순교하는 직분이고, 그 순교의 행동을 통해서라야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며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순교와 선교의 증언은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마티리아). 교회는 순교의 터 위에 섭니다.

순교는 신앙인의 죽음과 삶과 부활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깊은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며, 교회는 역사 속에서 그를 잊지 않고 하느님을 깊이 품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이 기억이 영원한 생명의 올바른 뜻입니다. 순교한 언덕의 이름이 지금도 남아 그를 기억하고, 그가 걸음을 멈춘 도시에 그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주 하느님, 성 데니스와 그의 동료들을 보내시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게 하셨으니, 우리에게도 성인을 따라 세상의 기준과 판단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