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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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신앙 – 교만 태만 기만을 넘어 걷는 일

December 12th, 2014

이사 48:17~19 / 시편 1 / 마태 11:16~19
2014년 12월 1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상당히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예수님의 불편한 마음,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마음을 한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는 복음서를 세밀하게 읽지 않고 대충 읽어서 크게 오해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불평이나 한탄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역할을 맡아서 노는 장면입니다. 아이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 역할극이 잘 진행되지 않자 서로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들이 제멋대로 역할을 만들어 놓습니다. “야, 나는 피리를 불 테니까, 너는 춤춰, 알았지?” “야, 이제 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소리를 내면,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신을 벗어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흉내를 내는 거야, 알았지?”

자기들이 역할을 일방적으로 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켜 놓고는, 잘 안 된다고, 잘 따라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비난하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장면입니다. 잘 보면, 그 역할이 아주 불공정합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피리만 불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춤을 춰야 합니다. 자기는 곡소리만 내면 되지만, 다른 사람은 몸을 움직여서 자기 가슴도 쳐야 하고 땅도 쳐야 합니다. 매우 불공평한 놀이입니다. 게다가 아주 일방적이기에 더욱 정의롭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멋대로 해석하여 만들어 놓은 율법을 자기는 잘 지키는데, 다른 사람은 잘 지키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겉보기에는 뭔가를 잘 지키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기 편한 대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만끽하며 살았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좋은 음식이 주는 편안함을 먹지 않고 들꿀과 메뚜기의 불편함을 먹고 살았습니다. 좋은 집에 앉아서 권력을 누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재산과 권력을 누리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외침은 어느 자리에 앉아 특권과 권력을 누리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세례자 요한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먹고 노는 역할은 자기가 할 일이라 정하고, 밖에서 땀 흘려 육체노동을 할 사람을 따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촌뜨기 예언자가 나타나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꼬드겨 ‘설’(說)을 풀고 다니고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습니다. ‘설’(說)은 자신들이 풀어야 하고, 더러운 사람들은 정결법이나 어기지 말고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도 먹고 즐길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리사이파가 예수님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의 편의를 기준 삼아서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변덕을 못 따라준다고 남을 핀잔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자기 멋대로 금을 그어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일이라도 할라치면 못 하게 막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부른 사람에게 금식을 요구하던 세례자 요한도 못마땅하고, 죄인과 먹고 마시기를 즐겼던 예수님도 못 마땅합니다. 다 자기 기분대로 판단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제 우리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죄는 마음이 닫힌 상태를 말합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여 마음을 서로 닫아서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입니다.

신앙인이니까 이런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신앙인이 죄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죄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태만, 기만입니다.

신앙인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성서를 잘 안다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위세가 되어버리면 이미 교만의 죄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태만하기 쉽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초월을 깊이 체험하는 일입니다. 이 체험은 개인적이기도 해서 그 깊이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신앙이 너무 깊어서 다른 사람의 신앙, 다른 사람의 경험, 다른 사람의 공부와 훈련에서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은 신앙의 출발인데도, 그것을 완성이고 종착지인 양 착각합니다. 신앙을 꿰뚫었다고 착각합니다. 도통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발견과 연구와 지식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태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만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교만을 떨면서 하느님을 기만하고, 태만하게도 다른 사람의 체험과 지식과 발견에 눈을 열지 않고 귀를 열지 않습니다. 이 태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합니다. 이러한 교만과 태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며 기만하는 길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기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대림절기는 우리 신앙인이 먼저 자신의 교만과 태만과 기만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과 행동을 고쳐 먹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정심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시 되새겨 봅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도 다 아시기에 우리 자신마저도 기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뒤따릅니다.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케 해 주십시오.” 내 신앙 체험이 나를 정결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나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송하는 일에서 태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며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습니다. 성찬례는 우리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오도록 나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구별을 없애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는 훈련이요 체험입니다. 주먹을 꼭 쥐고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손을 펴서 받들 때라야 그분의 몸을 받아 만질 수 있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서야 성체와 보혈을 모실 수 없습니다. 입을 열어 그분을 먹고 마셔야 그분을 맛보고 그분이 우리 몸과 피가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대로, 율법의 원래 뜻은 ‘길’입니다. 길은 미지의 세계요 여행입니다. 길 가는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길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발걸음을 부지런히 걷는 사람입니다. 자기 멋대로 걷지 않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을 받아들여 환대하여 대화하고 배우며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위로와 약속을 전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와 약속입니다.

“나 야웨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이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리라. 너의 정의가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리라. 네 이름이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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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고 환대하는 삶 – 성 안드레아 사도와 니콜라스 페라

December 1st, 2014

이사 52:7~10 / 시편 19:1~6 / 로마 10:12~18 / 마태 4:18~22
2014년 12월 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월요일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축일로 지키는 성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연결되는 지점에 성 안드레아 사도가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옛 시대의 끝이 새 시대의 시작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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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아 사도는 열 두 명의 사도 명단에서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핵심 사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 사도로 등장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지만,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활발해진 이후에, 안드레아의 활약이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그는 유럽의 북부 끝인 스키티아까지 올라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고, 지금의 동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 안드레아 사도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존경 받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당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대교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세계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선교사로 계속 활동하려고, 동료에게 주교직을 물려주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도시 파트라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X 모양의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서 처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로 X 자 모양은 성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자면, 안드레아의 별명은 “따르는 사람”이었을 법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의 장면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요한복음서의 설명이 더 그럴듯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상의 회개를 외치며 새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본을 따라서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지목하자, 안드레아는 요한 선생의 명을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외침과 생활에 자신을 던져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또한 이러한 삶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 베드로를 불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선생을 따르는 사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선생님을 내세우며, 초대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맡겨서 그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과 행태에 던지는 도전이 참으로 큽니다.

연원을 알 수 없지만, 교회는 11월 30일을 성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는 대림절로 교회의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 때문에,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은 한 해의 성인 축일 가운데 첫 번 째 성인 축일이기도 합니다. 따르고 환대하라는 교회의 사명과 삶이 교회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뜻을 되새겨 주려는 의도였을까요?

원래 11월 30일, 어제 지켰어야 할 축일을 오늘 12월 1일에 지키는 까닭은 축일이 대림주일과 겹쳐서 하루 미뤄서 지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12월 1일은 니콜라스 페라(Nicholas Ferrar: 1592~1637)라는 분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페라는 영국 성공회 초기 수도자입니다.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성공회 역사에서 니콜라스 페라는 매우 중요한 분이어서 그의 축일을 지키는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는 헨리 8세 이후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수도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첫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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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는 중세 교회의 재산 많고 권력이 찬란했던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제 성직을 받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과 함께 수도회 전통의 회칙에 따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교회를 다시 세워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웃의 건강과 복지를 살피는 사목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 생활에 충실했고, 성서의 이야기와 삶의 교훈을 그림으로 그려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수도회에 대한 호감이 거의 사라졌고,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금식과 절제 생활을 꺼리는 현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페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수도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수도원 생활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을 되살리는 사례였고, 2백 년 후인 19세기 영국과 세계 성공회 전역에서 다시 수도회가 부흥하는 영적인 자산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영미 문학계에서 최고 시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성공회 신자 T.S.엘리엇은 “리틀 기딩”(Little Gidding)이라는 긴 시를 남겼습니다. 이후에 그 유명한 <사중주>로 편찬된 시집의 마지막 네 번째 장입니다. 이 “리틀 기딩”은 바로 니콜라스 페라가 내려가 수도원을 세웠던 마을이요, 그 수도원 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시인 엘리엇은 “리틀 기딩”을 방문하고 이런 구절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12월은 교회 시간(교회력)의 시작 달이지만, 세상 시간(세속력)의 마지막 달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끝내는 시간에 겹쳐 우리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세상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따르기 시작하며 다른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초대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감과 시작이 겹치는 삶, 새로운 따름과 환대의 시작이 여러분에게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니콜라스 페라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끝내고 작은 시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과 영성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보살폈던 것처럼, 이 12월이 여러분에게 새롭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며, 이웃을 발견하고 보살피는 시간이길 빕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