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어

May 24th, 2015

성령 –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어 (요한 15:26~27, 16:4~15)1

부활 50일의 대단원은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강림절, 혹은 오순절의 본래 이름은 “부활의 오순절”이라 해야 옳습니다. 성주간과 부활 성삼일이 구원의 역사가 새롭게 열리는 진통의 시간이라면, 부활주일 이후 펼쳐지는 50일의 시간은 부활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입니다. 부활한 예수의 생명이 사람들 안에서 퍼지고 스며들어, 저마다 외톨이였던 이들이 모여서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따로 떨어진 개인을 모아 서로 이어주고, 그 안에 새로운 핏줄과 숨결을 넣어주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령은 생명과 삶의 기운입니다. 성령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신 숨결이며, 희망 없는 사막의 마른 뼈들이 일어설 때 불어온 바람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맺힌 생명은 성령의 힘으로 일어났으며, 예수님의 세례 때에 내린 성령께서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는 힘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우뚝 서신 예수님께서는 창조에서 부활에 이르는 성령의 힘을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리라 약속하시며 성령의 내림을 청원하셨습니다.

성령의 내림은 늘 변화를 가져옵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 강림 사건의 무대는 번화한 국제도시 ‘예루살렘’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실력자들과 권력자들의 무대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천하고 차별받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이들의 입으로 복음과 부활은 세계로 펼쳐집니다. 교육받지 못한 ‘갈릴래아 사람들’로만 이 놀라운 외국어 현상이 일어났을 법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힘과 특권을 내려놓고 함께 모인 공동체에 내린 성령은 저마다 지닌 은사를 이용하여 서로 도우며 복음을 전하도록 모든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매 주일 생명과 변화의 성령을 청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성찬례 안에서 성령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찬례 안에서 성령은 하찮은 밀떡과 포도주를 고귀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진리를 되새기며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에게 성령이 내리시어 우리를 작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사람)로 세우십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제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 세상에 나가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교회 공동체로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이 된 우리도 성령을 받아 세상에 나가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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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24일 성령강림대축일 주보(↩)

일치와 진리 – 예수의 고별 기도와 성 알퀸

May 20th, 2015

부활 7주간(승천후주일) 수요일 & 성 알퀸 축일

사도 20:28~38 / 시편 68:28~29, 32~35 / 요한 17:11~19
2015년 5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본기도 – 요크의 알퀸 (Alcuin of York)

전능하신 하느님, 교만하여 무지한 시대에 주님의 종 알퀸 부제를 세우시어, 배움의 불꽃을 다시 붙여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 시대 속에서 흔들이며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늘 이별을 합니다. 함께 자랐던 동무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도 하고, 부대끼며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자녀를 지방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지방으로 유학을 보내느라 떠나보내기도 하며, 군대를 보내느라, 시집 보내느라 잠시 작별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생의 큰 작별을 해야 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녀를 잃는 충격에 휩싸이기도 하며, 삶의 동반자였던 배우자를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별의 목격자였던 자신이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합니다.

이러한 이별과 작별의 순간에는 늘 마음 절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유언으로 마지막 당부를 하기도 하고, 묘비명을 새겨서라도 깊은 부탁을 남기기도 합니다. 남은 사람은 그 당부를 마음 깊이 새깁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의 이별 장면이 눈물겹습니다. 다시 보리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기에 그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울며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습니다. 이 작별의 순간에 사도 바울로 성인은 절절한 부탁을 유언처럼 남깁니다. 바울로 성인은 신자들과 교회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성인께서 그들에게 주었던 가르침을 잊지 말고 되새기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성서 본문에서 발견하는 당황스러운 경고는 교회를 해치는 사람이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나오니 특별히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분명합니다.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해치는 일은 진리에 관한 그릇된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과 고별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가 눈물겹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눈물 어린 당부와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너무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탈하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교회가 할 일입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예수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길입니다.

교회는 일치와 진리로 예수님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오늘 성서 본문에서는 우리 삶과 우리 교회의 기쁨은 두 가지 길에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이탈하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지키며 물려주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교회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애쓰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저마다 성격과 견해와 생활 방식이 다릅니다. 자라난 환경과 교육과 경험이 달라서 다른 우리를 더욱 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명한 현실 속에서 ‘하나가 되어 일치’하라는 말씀은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십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가 깨졌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지고 멀어진 관계에 새로운 다리가 놓였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늘 밖 땡볕 아래서 경쟁하면서 서로 할퀴는 관계를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목격했듯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관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경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라고들 합니다. 늘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떠도는 그 말이, 누구를 흠집 내거나, 누구를 흔들거나, 누구를 질시하거나 비방하는 말일 때, 그 말 자체는 그 교회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요한 복음서가 늘 경계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은 생명의 영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악령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 악령은 삶의 여러 관계에 탈을 내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분란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비방하는 말을 자기 입에 담아 퍼뜨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말 많고 탈 많은 동네를 만듭니다.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일 뿐입니다. 서로 하나 되어 일치하는 교회가 되려면, 이런 악령의 꾀임과 행동을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대화하여 교정하고 물려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를 한 손에 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다른 여느 종교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생각에 마음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진리는 부단히 배우며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여러 다른 사람의 신앙에 담긴 작은 진리의 파편을 존중하며 자신이 지닌 진리의 파편과 맞춰갑니다. 마치 수천수만 개로 이뤄진 직소퍼즐의 그림을 둘러 모여 맞춰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진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걸으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행하면서 우리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 동행의 길에서 익힌 신앙과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더 큰 그림, 더 완벽한 그림을 만들도록 자신을 내어주고 기여하는 일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8세기 영국 출신의 부제이자 수도자, 시인, 교회학자였던 알퀸(Alcuin of York) 성인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력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알퀸은 8세기 서방 교회가 신앙을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다시 세우며 세상을 새롭게 이끌어 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성인이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닮았는지 모르겠으나, 교만과 무지도 비슷한 관계입니다. 교만하면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도 교만에 빠지면 배우기를 멈추거나 알량한 자기 생각에 고착되고 맙니다. 한편, 배우지 텅 빈 사람은 권위를 내세울 근거가 부족한 탓에 교만을 부립니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행동입니다.

알퀸은 교회가 교만과 무지로 고통받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샤를마뉴 황제가 서 로마 제국 패망 이후 분열되었던 유럽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 통일하던 때였습니다. 교만의 대결이 만들었던 정치의 오랜 분열을 마감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교부의 전통이 분열과 무지로 부서진 상태에서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때였습니다. 샤를마뉴 황제는 변방 영국의 학자로 알려진 알퀸을 불러, 무너진 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체계를 다시 세우게 했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워서 유럽 최초로 인문학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 대화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문장에 물음표를 처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수와 기하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은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자요,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향한 다양한 배움과 방법을 들고 그는 영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프랑스, 독일 지역을 돌며 학교를 세우고 지식과 학문의 방법을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알퀸은 이러한 배움과 교육과 탐구가 진리를 이해하는 바른길이요, 진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성찬례를 비유하여 노래한 시에도 담겨 있습니다.

내 아침의 세월, 혈기가 넘칠 때, 나는 영국 땅에 씨를 뿌렸지.
그리고 이제 내 저녁 시절, 내 피가 점점 차가워져도,
여전히 프랑스 땅에 씨를 뿌리고 있네.
하느님의 은총으로 두 곳에서 모두 씨가 자라나기를 희망하네.
그래서 달콤할 꿀 같은 성서의 맛을 전하며,
오랜 가르침에 깃든 잘 익은 포도주를 다른 이들이 마시게 하며
나는 여전히 씨를 뿌리고 있네.

우리는 이 아침, 어떤 희망 속에서, 성서를 읽고, 이 성체와 보혈을 마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성찬례 속에서 어떤 일치와 어떤 진리를 함께 배우고 다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고, 악마에게서 지켜주겠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머물러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부탁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쁨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만들어 내고, 도통한 척하며 패거리를 만들어 교회를 흩어지게 하고 일탈시키는 무지가 아니라 쉬지 않고 진리를 향해 탐구하고 대화하는 일에 있습니다.

알퀸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신앙의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세워 흐트러짐 없이 하나로 이끌고자 했던 알퀸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 먼지와 벌레와 재로 덮여있으나
내 이름은 알퀸, 늘 지혜를 사랑했나니
이 묘비를 읽은 이여, 내 삶과 영혼을 기억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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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 – 생명의 상승과 확장

May 15th, 2015

승천 – 생명의 상승과 확장 (루가 24:44~5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승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입니다. 그러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오해하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행동이 엇나갈뿐더러,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롱받기에 십상입니다.

승천은 한 처음 천지창조로 펼쳐진 하느님의 활동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면서 일어난 신앙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면,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승천은 인간의 잘못으로 부서져 내려앉은 창조세계가 새롭게 회복되어 상승하고 확장하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님 한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우리 모든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 전체에 일어났으며 계속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참 좋다’고 하신 창조세계가 인간의 욕심과 교만으로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예언자들을 당신의 손길로 쓰시며 갈라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세계를 끌어안아 올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 세계의 침울한 운명이 드러났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 세계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부활로 새로운 삶이 펼쳐졌으니 이를 즐기면 그만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창조세계의 주인공이 우리 인간이기를 바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저 바라보며 기대는 일만으로 우리는 참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명령하는 주인과 굽신거리는 종의 관계는 참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 몸으로 살 때라야 우리는 동등한 제자, 하느님과 벗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손쉽게 기대지 말고 우리가 함께 모여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죽음의 현장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와 도망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대로 그 현장에서 ‘서로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되풀이하여 보여주신 사랑의 본질입니다. 제자인 우리 또한 함께 서로 머물러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야 합니다. 이는 침몰하는 배 안에 ‘가만있으라’는 거짓된 약속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상처 입은 삶을 서로 초대하며 보살피는 일에, 서로 생명을 되살려 회복하고 확장하는 일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오월에 담긴 상처와 희생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하느님의 사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사명이 남았습니다. 승천이라는 작별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채워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보지 않고, 우리 주위에서 사람을 모아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땅끝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오르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리어 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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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17일치 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