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로깅에 대한 상념을 올리고 나서, 이상하게 오른쪽 어깨에 큰 통증이 왔다. 밤늦게 이메일을 열어보니, 그 상념에 트랙백된 글이 배달되어 있었다. 소요유님의 글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이라는 글이었다. 죽비로 시원하게 얻어맞는 듯했다. 물론 그 효과가 내 어깨의 통증을 없애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소요유님의 글에 대한 긴 댓글이다.
2.
죽비의 정체는 ‘기쁨’의 문제였다. 초심(初心)에 관한 일갈이었다. 처음에 품은 마음을 잊고, 몇몇 걸림돌에 예민해졌던 것이다. 사람살이 저마다에 감춰진 기쁨을 들춰내어 나누고 누리도록 부추기는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음을 보살피기 위해서 엄살 부리고 칭얼거릴 필요도 있지만, 그 본연의 기쁨과 그에 대한 희망이 그늘지도록 내버려 둬선 안된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분노’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짐짓 고상한 조언을 했던 일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죽비 한 대 얻어맞아 뻐적지근한 어깨가 풀리듯 블로깅의 목적을 다시 발견했으니. 소요유님께 감사의 합장.
기쁨의 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새로운 인연이다. 게시판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다, 블로그라는 도구를 발견하게 하고, 그 소통과 나눔의 의미를 가르쳐 준 지인들을 역시 블로그에서 만났다. 내 도량이 작고 내용이 부실한 지라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지 못했으나, 이를 헤아리면서도 함께 이야기 나눠 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공교롭게 소요유님이 언급한 분 중에 두 분이 내게도 특별하다. 아거(gatorlog)님과 민노씨(minoci)이다. 그동안 감사의 표현을 적당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서, 특히 두 분께 깊은 감사의 합장.
3.
소요유님이 ‘독립형’ 블로그에 대한 생각을 나눴는데, 나도 덩달아 유감을 덧붙여 본다.
1) ‘독립형’ 블로그 – 내 블로그 역시 외국 웹호스팅을 사용한다. 다른 관련 인터넷 프로젝트 관리 문제도 있지만, 계정에 대한 자유를 누구에게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검열에 걸릴 여지는 없겠으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 나마 항의의 표시는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메일도 한국의 서비스는 포털의 몇몇 카페/클럽 접속 말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리하고 있었지만, 지난 피디 수첩 사건 때 개인의 이메일을 열어젖히는 권력에 치가 떨렸다.
2) 한국의 포털 사이트 – 한국의 인터넷 포털에서 지원하는 여러 서비스 폐쇄성과 그 행태들 역시 용납하기 어렵다.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질적 수준을 가로막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만족할 만한 검색 결과를 얻은 적이 없다. 포털의 폐쇄성에 큰 탓이 있다. 이미 누차 지적되었지만, 내 블로그 글들이나 관련 검색도 다른 사람들이 퍼다 놓은 블로그나 카페에서 먼저 검색된다. 이런 황당한 서비스를 하는 곳에 기회를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생각 있다는 블로거들이 이런 포털 서비스에 둥지 트는 일이 그 블로거들의 몇몇 주장과 일관되는가 하고 슬쩍 참견해 본다.
4.
다시 돌아가, 블로그 초심을 소요유님의 글에서 되새긴다. “블로깅을 통해 좀 더 자유로와져야 하고, 블로그로 인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좀 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심할 말이다. 기쁨을 누리도록 비는 격려가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잠시 잊었으나, 나 역시 블로깅을 통해 숨은 기쁨이 크고 많았노라고, 대답해 드린다. 다만, 나는 누구를 “일깨울” 만한 사람은 아니니, 애초에 기대를 접으시는 게 좋겠다. 어떤 선한 이에게 트윗으로 ‘리플’한대로, 나는 그저 “적나라하게 명확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딴죽 걸고 희미하게 하고 의심하도록 대화하는 사람”일 뿐. 대화 상대로 여겨주시면 그걸로 넘치는 일이다.
5.
자칫 아래 상념이나 이 기이한 댓글 또한 소위 ‘인정 투쟁’으로 들릴까 저어한다. 그런 유치함이 발견되거들랑 한국식 말고 일본식 죽비로 후려쳐달라고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