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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비주의

Monday, March 8th, 2010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노라는 게 서구 종교 흐름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찰이다. 스스로 제도 종교에 속한 사람(religious)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사람(spiritual)이고 싶다는 이가 많아지고 있단다. 일전의 글에서 이를 두고 나는,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엮인 영성주의(spiritualism)의 확대라 했었다. 이 점에서는 메가 처치, 그리고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앙적 보수주의가 대체로 교리적 전통에 닻을 내리고 있고, 교회나 사회의 리버럴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가 차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모두 영성의 상품화, 그리고 그 소비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재 영적/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원래 영성과 신비주의가 가졌던 깊고 혁명적인 초월이 상실된 채, 오히려 훨씬 세속적이며 치료 요법의 한 형태로 소비되는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섯(Ross Douthat)이 묘사하는 바, 이러한 영성/신비주의 소비자들은 어느 날은 오순절 계통의 치유 예배에 참석하고, 이튿날에는 불교 강좌를 듣는다. 아침마다 요가를 하고, 주말에는 동방 정교회 피정 센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수피 기도법을 배우는가 하면 성체조배도 하고 밀교의 방중술도 배운다. 영적 관심과 훈련의 홍수라 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종교적 영성의 민주화’라고 표현하면서도, 원래의 종교 전통이 뜻하는 수행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이라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변화와 초월의 문제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다우섯은 미국의 한 진보적 천주교 저널에 실린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의 글을 언급한다. 존슨은 이른바 유일신 신앙 전통에 있는 3대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신앙적 동력을 외적 동력(exoteric)과 내적 동력(esoteric)으로 구별한다. 존슨은 이들 종교에 나타난 이 긴장 관계의 사례를 들면서, 그 바른 관계가 그 종교의 건강에 필수적이라 역설한다. 특히 외적 동력인 종교의 제도, 위계, 교리 등이 내적인 신앙적 갈망의 영적 운동들(하시딤, 신비주의, 수피)을 억압해 왔던 점들을 지적한다. 그 자신이 소속한 천주교의 제도적 교권주의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 흘렀던 유대교의 사례들 속에서 신비주의와 같은 초월의 영적 차원에 대한 고민을 전개한 것이다. 다우섯은 존슨의 지적을 존중하면서도, 실은 신비주의마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 안에서 그 대안적인 도전과 변화의 힘을 잃고 있다고 염려한다.

이 염려를 세계로 확장해 보면, 소위 몇몇 내로라는 신학자들의 종교 현상 진단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든 그 밖의 세계에서든 제 3천 년에 ‘신앙의 귀환’ ‘종교의 귀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필립 젠킨스와 하비 콕스 등은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의 주도권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물론 해방신학도 언급하지만)의 급격한 팽창을 그 예로 든다. 그러나 그 오순절 운동 자체가 콕스 자신이 비판하는 ‘번영 복음과 번역 신학’(성공의 사다리 복음)을 여러 모양으로 촉진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 소비주의의 한 형태로 변모하는 방식과 문제 등에 대한 지적은 찾기 어렵다.

이 처지에 이런 의문들은 단견이요, 편견일까? 제도적 교회와 교권주의에 대한 반대로 신앙과 영적 흐름의 종착은 개인주의에 엮인 영성주의라는 새로운 상품은 아닐까? 외부의 폭발적인 신앙의 힘을 보는 그 눈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과 이전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무의식의 향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과 한국의 오순절 운동과 시작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를 목격하는 처지에,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운동은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특히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지배가 강화되는 터에, 신앙적 열광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한편, 그 수와 힘에 기대어 차근차근 주류의 권력을 구축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강화되고 내면화되는 신앙이 자본의 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얼마 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자리한 성공회 트리니티 교회의 포럼에서, 자본의 시장에 포섭된 이런 소비주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고객과 공급자의 언어 논리가 우리 사회생활 전역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으며, 이는 우리 인간의 상호 관계가 물적 자원의 교환으로 교묘하게 측정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항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지배적인 모델이나 가치에 환원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또 다른 길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종교는 여전히 “자신이 지닌 행동 양식과 충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인간의 길”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그 진리의 답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 외침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인가? 종교는 어떻게 삶의 어떤 끝(end/목적/종말)을 되뇌고, 그 끝(의 가치)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가치와 삶의 실천들을 실험하고 펼칠 수 있는 사이와 공간은 어디이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공동체와 그 네트워크로서 교회의 역할과 또 나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가 대비되게 읽힐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Monday, January 11th, 2010

아거(gatorlog)님이 전문 번역한 뉴욕 타임즈 데이빗 브룩스의 [아바타]에 관한 글 “아바타와 메시아 콤플렉스”를 읽고 갑자기 부조리한 생각이 동하니 흐르는 대로 두드려 본다.

1.
영화 [아바타]는 ‘메시아 콤플렉스’의 영화일까? 그래서 어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화’일까? 아니면 이런 비판은 영화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그은 어떤 기술적 성과와 이미지의 풍요로운 혼성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일 뿐인가? 논쟁의 전선이 전자는 서구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읽기로, 후자는 엄청난 자본의 힘을 입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의 발로로 분명히 그어지기만 한다면, 논쟁의 독자나 관람자는 정작 내용보다는 치고받는 흥미로운 싸움에만 관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간단했으면 싶다.

그런데 처지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어느 ‘세련된 보수 논객’과 한국의 어느 비판적 관람자의 비평이 한 쌍을 이루는 듯하고,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어느 비판적 블로거들에게는 영화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거나, 전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과도한 일반화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는 반박이 나오는 처지에서 보면, 도대체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몹시 ‘포스트모던’한 양상이 되어 버린다.

2.
여느 전문가적인 논쟁에서 느끼듯, 이런 화려한 논쟁의 수사와는 멀리, 나는 그저, 슬픈 일을 당한 우리 가족을 위로한다며 그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떤 이가 [아바타] 관람권을 손수 마련해 건네 준 탓에, 한 저녁의 호사를 누렸을 뿐이다.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가족 영화’였다.

열한 살 난 아들 녀석은 곧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만화’ 판타지를 넘어서 실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든 시각 효과에 압도되었다.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아내는 제이크와 나비 족 여인의 사랑과 그 배경의 아름다움이 선연한,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 영화로도 다가온다며 다소 엉뚱한 관람평을 내놓았다. 영화 막바지 제이크가 이끄는 전쟁 승리의 쾌감은 뒷전이었다. 영화를 잘못 보고 제임스 캐머런을 배반한 것인가?

내게도 역시 판에 박힌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현란한 수많은 이미지의 차용과 합성, 그리고 어떤 상상력에 따라 마련한 아름다운 배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끔 선연하게 등장하는 종교적인 상징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의례(ritual)들이 눈에 들어 머리를 환기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 영화 막바지 네이티리가 정신을 잃은 진짜 제이크를 안은 피에타(pieta) 이미지를 보고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영화라 불러야 할까 하는 다소 ‘스놉’(snob)한 얕은 잔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본 뒤 트위터에 몇 마디 보탰다. 이런 것이었다.

인태(@tuesdaymoon)님이 가족 위로차 마련해 준 극장표로 [아바타] 감상. 현실에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총집합하여 현란하게 요리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창조 질서’ ‘욕망’ ‘아름다움’ ‘구원’의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바타] 신학적 반성과 되새김의 이미지들: 신(God)이 아닌 신성(deity)과 그 여성성, 창조(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닌 교감, 공동체(네트워크)를 통한 서품(ordination) 의식,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피에타(pieta) 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온갖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로 모순되듯 교차하여, 뻔한 시나리오에 대한 판단을 교란하고 있었다. 줄거리나 시나리오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명백한 지루함, 혹은 발가벗은 메시지들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3.
데이빗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이 세련되고 명석한 보수 논객은 분명하고도 영리한 덫을 놓는다. 제목부터가 “메시아 콤플렉스”. 사람들은 ‘메시아’ 표상에 혹하겠으나, 그의 방점은 ‘콤플렉스’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는 뻔하다며 볼멘소리하던 그 줄거리를 주구장창 스포일러를 감내하며 풀어놓는다. 그것도 이리저리 비꼬는 투로. 마지막에 이런 논점이 불편할 정도로 공격적이라고 묻는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이 보수 논객, 웬만한 진보 논객보다 관점 좋고 훨씬 날카롭잖아?’ 이럴 만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캐머런 감독이 개과천선하여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혁명을 할 사람도 아니요,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우화라 할지라도, 그 우화에서도 우화를 넘어서 배울 수는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룩스가 이 영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바마의 대선 수락 연설을 비꼬아 중계하던 브룩스는 언젠가 부시(G.W.Bush)에 대한 심기 복잡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번 아바타 평과 제목이 비슷하다. 이른바 “부시 역설”(The Bush Paradox).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약점들이 어떻게 그의 이라크 전쟁 전략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를 설명하려 든다. “인생은 복잡한 거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유는 한 쪽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말 위험한 사람은 분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며, 부시가 아니라 독자들을 타일렀다.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복잡한 인생’과 ‘명백한 사실’ 운운은 실은 자신에게 돌려야 할 말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도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다룬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말들이 낯 간지럽다.

그나저나 ‘콤플렉스’를 겪는 이는 브룩스 자신이 아닐까? 그는 제 주장과 비판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어디에는 갖다 붙일 수 있는 ‘전능하고 보편적인 신의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모른다.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밑으로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부시와 빈 라덴의 사례처럼. 자기 말고는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아 예수를 죽였던, 그 어떤 무리처럼. 한사코 자신이 인정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선택된 민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린 시온주의자들처럼.

4.
영화를 두고 두어 마디 트위터에 적은 며칠 후, 전투적 여성 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를 되새기며 그의 책 어느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 그가 최전방까지 밀고 가 마련한 신학적 비판과 상상력의 경계와 공간 때문에, 여전히 마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같은 이마저 얼마나 너른 자유의 숨을 쉬었던가!

그러더니 다시 영화 아바타의 모순된 이미지들의 향연이 떠올랐다. 다시 트윗팅.

이미지들의 복합체인 영화 아바타의 궤도를 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역시 메리 데일리 같은 이들이 제안하는, 잊혀진 전통의 복원을 통한 상상력과 (남성적) 지배의 의미 구조와 역사에 대한 급진적(근본적) 비판과 반성이겠다.

중첩된 이미지들과 오염된(순수는 환상이니까) 이야기들이 겹친 시나리오는 언제나 ‘제멋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그 해석의 다양성은 좋은 작품임을 드러내지만, 종종 그 중첩과 오염 속에서 그 비판적 의미의 궤도를 잃기 때문이다.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렸다.”

(허튼 글이지만, 우리 식구를 위로하려고 영화표를 마련해 준 김인태(@tuesdaymoon)님의 따뜻한 마음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