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Saturday, December 24th, 2011

미국 성공회 캐서린 쇼리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이사 62:11).

예수님에 앞서 위대한 예언자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와 구원받은 받은 백성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성탄 성가를 부르며 그 열망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날의 희망과 두려움이 이 밤에 만나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랍 세계와 동유럽의 격변, 그리고 전 세계적인 점령 운동 속에서 그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의 모든 결정 과정과 창조 세계의 선물을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해하는 구원은 바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을 위한 도움과 치유가 성육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 가난하고 천한 부부 사이에 흉흉한 소문을 갖고 태어난 나약한 아기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성육신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방법만이 모든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내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구원은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성취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치유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미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선포(이사 62:6-12)는 성탄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행여 그걸 기회가 없다면, 전체를 찾아 읽어 봅시다. 그 구원이 어떠한지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셨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외국인들에게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이사 62:8-9)

이것은 순진하게 자기만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늘 고통당하고 외세에 점령당하며, 힘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로와 치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생산품을 권력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현실의 두려움을 이제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모든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오실 때, 그 사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너희를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이라 부르겠고,
이제 너희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이사 62:1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가진 열망을 선포하며 실현하십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마련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서로 맺는 관계를 똑같이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이 오십니다. 이 치유를 환영하시겠습니까?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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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ScsJn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 편지 2011

Thursday, December 15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벗들에게,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뭇 나라도 뒤흔들리라.” (하깨 2:6-7)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뭇 나라”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 유럽과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구조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되새겨주었습니다. 정치적 동일성이나 재정적인 안정성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만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여러 사상가가 최근에 사용했던 한 문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흔들리는 이들의 연대”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우며,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이루는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서로에게서 같은 연약함을 깨닫는 일은 정말로 깊은 의미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 연대는 인간이 지닌 조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전략을 세우든, 진실은 인간은 변화에 종속된 존재이며, 고통의 위험에 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깨지기 쉬운 우리 인간이 본질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그리고 모든 나라가 흔들릴 때, 우리가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는 우리의 궁핍과 우리의 가난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사회 개선 정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이 인간의 공통 숙명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위에 내리는 심판입니다. 그 복음은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복음은 또한 이러한 연결과 연대는 겸손과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탄의 복음은 인간 역사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을 거듭하여 지적하며 그 점을 우직하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대 세계의 현자들과 정치가들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이성,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가난한 아기를 참된 인간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나요?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태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 않나요? 이 점을 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 하느님과 같은 자유, 사랑을 주고받는 자유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이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터전에 서게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우리의 희망, 정의와 자비를 위한 우리의 행동을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이 터전 위에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우신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의 인사를 전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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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zfczX

성소 주일 잡감 – [주교] 성직 소명 체크 리스트

Saturday, May 14th, 2011

몇 년 전 천주교 신부 친구가 웃자고 들려준 말이다. 신학교 졸업 설교를 하던 학장 신부님께서 아주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여러분을 내보내는 제 마음이 두렵도록 떨리고 아픕니다.” 신학생(부제/사제)들은 마침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장)는 말씀을 복음으로 들은 터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 뒤, 학장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이리를 양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고 아픕니다.”

언제나, 특히 서품 기념일이 있는 5월이면 이야기가 떠오른다. 게다가 한국은 오늘 부활 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과 ‘성소 주일’로 지킨다(주일 복음 본문 요한 10:1~10).

성소 주일에 생각하는 ‘성소’란 무엇인가? 성소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이 나누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요, 선교 명령일 테다. 그 가운데 ‘성직 성소’가 하나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이지, 질적으로 다른 성소가 아니다.

5월이면, 이 착한 목자 주일, 성소 주일과 더불어, 성직 서품이 있다. 오랜 식별 과정과 기간의 중요한 마디점이다. 모든 성소 식별이 그렇듯, ‘성직 성소 식별’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성직 서품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그 계속되는 식별에 성직을 걸어야 한다.

이 식별이 늘 말썽거리란다. 우리는 어떻게 성직 열망자를 식별하여 신학교에 보내는가? 신학교의 성직 ‘양성’ 과정에는 어떤 식별 과정이 적용되는가? 졸업 후 다시 전임 전도사 생활 1년 반을 거쳐 성직의 첫 관문인 부제 성직, 그리고 다시 2년 후 사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식별의 과정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헤아려 보고 있는가? 이 성소 식별은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품으신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일 테다. 이 식별을 도와주는 성소위원회은 어떻게 운영되며, 성소위원들 자신은 어떤 식별의 훈련을 통해서 이 성소자 면접에 응하는가?

성직 성소의 식별은 부제품과 사제품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멀게는 십수 년 짧게는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주교를 뽑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선거가 되어 버렸다. 주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에 해당하는 성소 식별 과정이 존재하는가? 없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식별이어야 하고, 적절한 식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지도자를 식별하는 일에 그 교회의 미래가 달렸다.

이 과정에서 성소자 스스로 묻고, 그 식별을 돕도록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성직 서품받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개인 식별에 있을 이이든, 서품 기념일을 맞는 이이든, 주교직에 있는 이이든,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블로그 이곳저곳에 적었으니, 오늘은 다른 이의 말도 들어본다.

주교 선출을 맞아, 영국 성공회의 은퇴한 사제가 던지는 질문은 주교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성직후보자, 그리고 신자들이 늘 되새겨야 할 말이다.

주교 선출 위원회의 면접위원들은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첫째, [주교] 후보자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려왔는가? 과거의 고통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살펴보지 못한 고통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힘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보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을 잘 보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둘째, 후보자의 전반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그가 만드는 분위기와 환경은 어떤 것인가? 그가 가진 희망과 평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꽃을 피우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가 발설하거나 풍기는 비판 속에서 사람들이 말라 죽는가? 뽑혀야 할 사람은 예수 이야기를 멋지게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를 판단하려는 ‘영’은 종교적 권위의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늘 유혹이다. 이 판단하려는 영은 훼손된 영혼에 사로잡혀, 덕을 세우기보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셋째, 후보자가 면담하는 동안, 그 면접위원들에게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는 고향에 대한 독특한 열망에 관여한다. 사람은 그 내적인 열망의 불꽃이 있으나 사는 동안 이것이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주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복하도록 돕는 주교가 필요하다.

넷째, 그의 꿈(vision)은 무엇인가? 진실한 꿈은 다음 세 가지를 수행한다. 사태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의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연대하도록 연결해 준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꿈이 솟아난다. 사람들은 다만 그 지도자와 더불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것이다.

다섯째, 후보자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생각, 곧 무너질 내용, 전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멋지게 표현한 것일 뿐임을 지각하는가? 진실은 어떤 공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오직 그가 슬쩍 비추는 웃음과 인사, 표정 속에서 드러난다. 좋은 후보자는 말에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그는 여러 틈과 사이에서 삶이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이가 주교관을 써야 한다.

원문: 사이먼 파크, http://goo.gl/mXW74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송경용 신부 (서울교구, 걷는 교회, 나눔과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