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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고 환대하는 삶 – 성 안드레아 사도와 니콜라스 페라

Monday, December 1st, 2014

이사 52:7~10 / 시편 19:1~6 / 로마 10:12~18 / 마태 4:18~22
2014년 12월 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월요일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축일로 지키는 성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연결되는 지점에 성 안드레아 사도가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옛 시대의 끝이 새 시대의 시작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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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아 사도는 열 두 명의 사도 명단에서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핵심 사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 사도로 등장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지만,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활발해진 이후에, 안드레아의 활약이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그는 유럽의 북부 끝인 스키티아까지 올라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고, 지금의 동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 안드레아 사도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존경 받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당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대교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세계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선교사로 계속 활동하려고, 동료에게 주교직을 물려주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도시 파트라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X 모양의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서 처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로 X 자 모양은 성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자면, 안드레아의 별명은 “따르는 사람”이었을 법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의 장면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요한복음서의 설명이 더 그럴듯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상의 회개를 외치며 새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본을 따라서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지목하자, 안드레아는 요한 선생의 명을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외침과 생활에 자신을 던져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또한 이러한 삶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 베드로를 불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선생을 따르는 사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선생님을 내세우며, 초대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맡겨서 그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과 행태에 던지는 도전이 참으로 큽니다.

연원을 알 수 없지만, 교회는 11월 30일을 성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는 대림절로 교회의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 때문에,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은 한 해의 성인 축일 가운데 첫 번 째 성인 축일이기도 합니다. 따르고 환대하라는 교회의 사명과 삶이 교회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뜻을 되새겨 주려는 의도였을까요?

원래 11월 30일, 어제 지켰어야 할 축일을 오늘 12월 1일에 지키는 까닭은 축일이 대림주일과 겹쳐서 하루 미뤄서 지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12월 1일은 니콜라스 페라(Nicholas Ferrar: 1592~1637)라는 분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페라는 영국 성공회 초기 수도자입니다.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성공회 역사에서 니콜라스 페라는 매우 중요한 분이어서 그의 축일을 지키는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는 헨리 8세 이후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수도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첫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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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는 중세 교회의 재산 많고 권력이 찬란했던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제 성직을 받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과 함께 수도회 전통의 회칙에 따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교회를 다시 세워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웃의 건강과 복지를 살피는 사목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 생활에 충실했고, 성서의 이야기와 삶의 교훈을 그림으로 그려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수도회에 대한 호감이 거의 사라졌고,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금식과 절제 생활을 꺼리는 현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페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수도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수도원 생활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을 되살리는 사례였고, 2백 년 후인 19세기 영국과 세계 성공회 전역에서 다시 수도회가 부흥하는 영적인 자산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영미 문학계에서 최고 시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성공회 신자 T.S.엘리엇은 “리틀 기딩”(Little Gidding)이라는 긴 시를 남겼습니다. 이후에 그 유명한 <사중주>로 편찬된 시집의 마지막 네 번째 장입니다. 이 “리틀 기딩”은 바로 니콜라스 페라가 내려가 수도원을 세웠던 마을이요, 그 수도원 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시인 엘리엇은 “리틀 기딩”을 방문하고 이런 구절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12월은 교회 시간(교회력)의 시작 달이지만, 세상 시간(세속력)의 마지막 달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끝내는 시간에 겹쳐 우리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세상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따르기 시작하며 다른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초대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감과 시작이 겹치는 삶, 새로운 따름과 환대의 시작이 여러분에게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니콜라스 페라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끝내고 작은 시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과 영성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보살폈던 것처럼, 이 12월이 여러분에게 새롭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며, 이웃을 발견하고 보살피는 시간이길 빕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아멘.

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Saturday,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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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 –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Sunday, October 5th, 2014

출애 20:1~4,7~20 / 시편 19 / 필립 3:4b~14 / 마태 21:33~46
2014년 10월 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해가 짧아지고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이 선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시간을 저마다 달리하여 꽃피우는 시간을 걷습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을 걷기도 하고, 열매가 여무는 장년의 시간을 보내기끝도 하며, 그 열매의 쓴맛과 단맛을 느끼는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무는 해의 아름다운 빛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황혼을 비추기도 합니다. 이 세월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이겨내서 여기까지 온 분도 계시고,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민을 안고 교차하며 걷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걸음걸이가 어떤 것이든, 성서는 우리가 걷는 모든 행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처럼, 그 나라는 쉬지 않고 달음질쳐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잘 따라서 약속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분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당연한 확신은 이제 예수님 때문에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도덕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성서를 정직하게 읽으려는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다른 비유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와 많은 설교자는 이 비유에 누군가를 하나씩 대입하면서 해석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소작인들은 유대인이며, 주인이 보낸 종들은 예언자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때에 이르러 유대인들을 버리고 도조를 잘 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소작인이니 주인에게 도조를 잘 내는 사람이 되자는 말로 설교의 교훈이 끝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세월이 흐르면서 엉뚱하게 적용되곤 했습니다. 이 대입법에 따르다 보니, 소작인인 유대인들은 주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교회는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들씌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주의, 유대인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1900여 년 동안 발전한 이 반유대주의 결과는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가 벌인 유대인 학살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겪었던 현대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서,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사람을 내쫓고 장벽을 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향해 총을 쏘고 민간인들에게도 폭탄을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복수를 하는 형국입니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성서 이야기에 누구를 끼워 넣어서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비난하는 일에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의 뜻과 이후의 역사에 비추어서 다시 봐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비유를 교리에 따라 대입하지 말고 좀 더 확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넓이를 조금이라도 헤아리면서 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이요, 우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어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탱탱한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널리 선사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입니다. 이 포도원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포도원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이를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며 누리려던 포도원이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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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손쉬운 대입법을 피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 안에 의식 무의식으로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춰봐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치고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여기서 영성이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그 신앙과 영적인 식별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이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지난 9월 30일 뉴욕 타임스에 쓴 칼럼을 나누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들”(Our Invisible Rich)입니다. 핵심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시민들에게 주요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일반 노동자보다 얼마나 높은지를 물어보는 설문 조사를 한 적 있다. 미국 응답자는 대체로 대기업 임원이 그 회사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더 많이 벌 거로 추정했다. 이런 추측은 1960년대에는 대략 실제 현실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격차는 급증해서 오늘날 고위 임원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회사 평균 노동자의 300배 정도이다. 40년 전인 1975년 미국 상위 1% 부자가 미국 전체 자산 총합의 2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40%로 늘었다. 그리고 이 늘어난 자산 대부분은 상위 0.1%에게 돌아갔다. 미국인은 우리 세상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벌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며, 부의 집중도를 과소평가한다.”

경제학자만이 세계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구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성직자들이 가장 영향을 받은 구약학자로 입을 모으는 월터 브루그만 교수는 최근 행한 “구약과 설교”라는 강연에서 현 세계를 이렇게 통렬하게 진단했습니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전체주의 안에서 살아간다. 특히 내가 사는 미국은 시장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군사적인 힘을 동원하여, 자신들만 예외적으로 세계를 지키는 경찰이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화를 가장하여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화와 전체주의는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대에 선 설교자는 이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언자의 외침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회중석에 앉은 신자들은 이 현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안녕은 예언자적 설교와 건강한 신앙에 서야 한다. 이것이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지탱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뛰어난 경제학자와 원숙한 신학자가 지적하는 세계의 경제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곧바로 배척과 폭력, 살인과 전쟁이라는 세계 정치의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사회이고,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염두에 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에덴동산인 포도원을 생명의 기쁨을 선사하는 포도원으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세계의 여러 개신교회는 이번 주일을 세계 성찬례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킵니다. 우리 성공회와는 달리, 성찬례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개신교계에서 이 날만이라도 성찬례를 지켜보자는 생각에서 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찬을 나누는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동등하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나누면서 한 식구가 되는 세계 공동체인 것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소유만을 늘리려다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경제와 정치 질서에 대항하여, 작고 부족한 한 몸, 한 잔을 함께 나누는 일로 일치하자는 깊은 소망입니다.

얼마 전 은퇴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은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합니다. 대신 우리는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화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간 교회로 모여 복음을 읽고, 우리 삶을 봉헌하여 변화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창조 세상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이 안에서 참된 소작인의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작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려다가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소작인의 포도원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을 서로 받아들여 서로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서로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길입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우리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맛보는 성찬의 잔치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