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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수요일 – 배신과 어둠을 넘어

Wednesday, April 16th, 2014

이사 50:4~9 / 시편 70 / 히브 12:1~3 / 요한 13:21~32

2014년 4월 1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성주간 성 수요일은 배신의 수요일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계획을 세운 날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 복음의 장면은 아무래도 성 목요일 최후 만찬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였던 유다의 배신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은 대체로 성 수요일이었기에, ‘배신의 수요일’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사람 유다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받는 유대 땅의 현실에 깊이 마음을 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폭압적인 권력을 물리칠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 단체의 일원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곧 오실 정치적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며 로마의 지배 권력과 싸우던 혁명 단체의 일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그 제자단에 참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제자단 사이에 신임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돈이 오가는 재정 책임은 웬만한 신뢰가 쌓이지 않고서는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신임을 얻은 재정 책임 비서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 추측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먼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나 그를 만나게 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아직 그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서는 그 이유를 단순하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만 전합니다. 그에게 들어간 사탄은 지난 사순 첫 주일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만났던 그 악마였을까요? 잘 먹고 잘 사는 안녕과 권력과 명예를 미끼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고생했던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악마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탄 악마를 물리치셨지만, 안타깝게도 가리옷 사람 유다는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애처로운 일입니다. 특히 유다가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애처로움이 더욱 깊어집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과 제자단의 오랜 신임을 받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사고락과 친구의 신임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배신은 친구 사이에 일어납니다. 가족 사이에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깊이 마음을 두며 배려했고 보살폈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남남에게는 배신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배신은 안타깝습니다. 모든 배신에는 인생의 쓴맛과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때 배신자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알아차리는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할 자를 지목해 달라는 어떤 제자의 부탁에 신호를 줍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빵을 떼어 유다에게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그 일을 행하라.” 게다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호로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합니다. 입맞춤은 언제나 “평화의 입맞춤,” 즉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들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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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iel van der Borch,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에게 빵을 주시는 예수,” 14세기)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나오는 행동이 유다의 배신행위에 그대로 겹쳐집니다. 우리는 서로 웃는 얼굴로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식탁에 초대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그의 피에 적셔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유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그리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을 바쳐 따랐고, 예수님과 풍찬노숙을 같이했고, 함께하던 친구 동지들과 함께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유다는 여기에 모인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배신을 생각할 때,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은 배신의 잠재적 피의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무엇이 유다를, 그리고 오늘 우리를 배신의 행동으로 이끌까요? 사탄입니다. 광야의 금식 40일을 마친 예수님께 나타났던 그 악마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녕과 복지만을 신앙의 열매로 생각하게 하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닌 지위로 남들을 나무라고 호령하고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멋진 유혹입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려고 으스대는 근사한 유혹입니다.

오래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와 함께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이 달콤하고 멋지고 근사한 유혹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금세 배신자 유다처럼 악마에게 우리 영혼을 팔아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이요, 늘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유다는 빵을 받아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성 수요일은 어둠의 수요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어둠 속에 똬리 틀고 있는 배신의 그림자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어둠을 직시하고 살피는 시간입니다.

전례 전통의 여러 교회들은 성 수요일 밤에 ‘테네브레’(Tenebre)라는 촛불 예배를 드렸습니다. ‘테네브레’는 어둠과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이 예식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켜고, 이와 더불어 다른 여러 개의 촛불을 밝히고 그 둘레로 모입니다.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끄면서 드리는 기도의 예식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상징한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런 뒤에 갑작스러운 그 어둠 속에서 시끄러운 굉음이 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는 소음입니다. 어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예식을 통해서 많은 신앙인은 자신의 어둠을 되새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 즉 그의 나눔과 고난과 죽음을 닮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허공 같은 어둠만 남습니다. 거기에 배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웁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그때, 예수님께서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돌이켜서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므로 사순절 마지막 수요일인 성 수요일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이마에 재를 받는 순간을? 그때 들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은 인간 존재 조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다들 죽을 존재들이라는 운명을 되새겨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은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끝에 새로운 생명, 즉 우리가 먼지와 흙에서 창조되었듯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롭게 빚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삶에 대한 기대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회개하며 “돌아오라,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창조와 생명을 함께 만들자는 초대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학자이자 시인인 월터 부르그먼은 이 수요일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이 수요일, 우리는 재처럼 창백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드리나니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활 행진에 드리나니.
해가 지기 전, 우리의 수요일을 받아 주시고, 우리를 부활케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기쁨과 활력과 용기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두려움 없이 주님의 진리를 살게 하소서.
여기에 오시어 우리의 수요일을 부활케 하시고
자비와 정의와 평화와 너그러움이 넘치게 하소서.”

이제, 이 성찬례에서 여러분은 배신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

퇴장하는 일 – 요셉 성인 생각

Monday, December 23rd, 2013

한 달 전에 결정했던 일을 정리하는 막바지다. 작년 여름부터 힘썼던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 공동체 설립에서 나 자신이 퇴장하기로 했다. 고된 식별과 기도를 통한 결정이었다. 사람 일에 아쉬움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다. 여전히 이미 난 결정을 멈칫하며 돌아보게 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지긋이 덮고 묵묵히 가야 한다.

이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말로 드리는 마지막 미사에서 나눈 이야기를 옮긴다. 너무 적게 와서 처음에는 스스로 민망했다. 내 그릇이라 생각하니 이내 편해졌다. 오히려 요셉 성인의 이야기에 더 적절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다. 성인은 몇 사람과 관계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강론을 겸한 작별 인사의 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말처럼 낯선 이를 품어주고 친구가 되어 준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그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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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넷째 주일 – 복음: 마태 1:18~25

사적으로는 다시 기회가 있겠지만, 이 시간이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여러분과 우리말로 드리는 마지막 미사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일말의 비애감이 서려 있기 일쑤입니다. 인생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여럿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을 끝맺는 일부터, 삶의 마지막, 곧 죽음까지 그 범위도 넓습니다.

지난 4월에 오클랜드 공동체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렸고, 10년을 함께했던 중국인 교회와도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과 드리는 이 ‘마지막’ 미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의 ‘교회 이름’인 요셉이 등장하는 오늘 복음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감회에 잠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제가 성공회에 들어와서 교회 이름, 즉 신명을 선택할 때 깊이 생각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라는 성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고, 그에 따라 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생각하게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족보를 논하는 사람은 대체로 부족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하려고 안쓰럽게 몸부림치기기도 합니다. 마태오 기자도 예수를 구원사의 연속선 상에 놓으려고 다윗의 족보에 요셉을 슬그머니 넣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라는 여인과 약혼을 했습니다. 중매였겠지요. 마리아는 아마도 14살에서 16살 정도인 아가씨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나이가 혼인 적령기였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인 채로 임신했다는 표현이 성서에 나옵니다. 물론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과학적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예수는 사생아”라고 단정합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입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기에, 혼전 임신, 특히 혼외 임신일 가능성이 높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러지 말라고 말립니다. 고민스럽습니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기를 자기 자식처럼 키워야 합니다. 평생, 아내인 마리아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형벌과 같습니다. 게다가 이는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대로 파혼하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셉은 이 난처한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받아들여라. 두려워하지 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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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모험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웠지요. 그러나 “있는 그대로” “그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 안에 작으나마 어떤 환대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의심과 불확실성을 참고 견디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내쳐질지 모르는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자신의 틈에, 의심과 불확실성의 공간을 마련하여 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의심과 회의와 불확실성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쳐질지 모르는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연민에 자신의 시선을 돌리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연약한 누군가를 자기 안에 받아들여 돕고 먹이는 일입니다. 여러분과 거듭 나누었거니와, 신앙은 연민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돌려 밖을 향하는 일입니다.

이때라야 비로소 임마누엘 사건이 드러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처소를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고, 하느님을 뵐 수도 없고, 하느님과 거닐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부탁하거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 연약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임마누엘 사건이 시작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이즈음에 그칩니다. 물론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가 소년으로 자라났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부모와 함께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름을 걸고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성서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의 탄생, 임마누엘 사건,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마리아와 갓난아기를 품었습니다.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폭압적이고 잔인한 헤로데 왕이 명령한 아기 학살을 피해서, 다시 한 번 연약한 마리아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한 일을 끝으로, 요셉은 성서의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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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젊었던 저에게 이 퇴장은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에, 시쳇말로, 꽂혔습니다.

이 퇴장이 용기있는 신앙입니다. 제때에 퇴장하지 않아서 생기는 나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친일의 망령이 아직 퇴장하지 않고, 한국전쟁의 모진 경험과 미운 오해가 아직 퇴장하지 않고, 독재시대의 폭압적 권력 행태가 퇴장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활개를 칩니다. “왕년에 내가 중요한 일을 했노라”고 우기며,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자신이 잡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또 우리 사회가 그런 망령을 되살리는 몰골을 보노라니 더욱 요셉 성인이 생각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이렇게 사라진 요셉을 전체 교회의 수호자 성인이라고 모셨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마리아와 갓난아기 같은 이들을 품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셉은 노동자의 성인입니다. 그 자신이 막일하며 살던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미래가 그리 환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의 노동으로 세상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교회 전통은 그 진리를 알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노동에 깃든 생명의 가치를 표상하는 수호자로 요셉 성인을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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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퇴장해야 합니다. 제 일이 끝났으면 요셉처럼 말없이 퇴장해야 합니다. 또 할 일이 남아있으리라 우기거나 억지로 움켜잡지 말아야 합니다. 이 또한 신앙의 용기입니다.

퇴장하여 생긴 빈 공간에서 다시 새로운 역사가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체험과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며 기뻐하는 일을 남은 이들이 이끌어야 합니다. 요셉은 잊혀야 합니다. 요셉은 그 일을 다 했으니, 퇴장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요셉이 좋았습니다. 이런 요셉의 용기와 영성을 본받고 살고 싶었습니다. 역사의 한순간에 짧게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진 그의 매력에 끌렸습니다. 잠깐 등장해서 어느 때에 슬쩍슬쩍 오래 기억된 그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복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그의 신앙을 되새겼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사람을 품어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성공회라는 교단과 성공회 신부라는 사람을 받아주시고 어울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여러분은 요셉의 영성을 몸소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그 요셉의 영성으로 만든 공간을 더욱 넓혀 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 안에 함께할 수 있는 임마누엘의 공간을 더욱 깊게 해 주십시오. 저도 다시 완고하고 딱딱한 곳으로 돌아가 갈라지고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틈을 넓히고, 그 사이로 빛의 공간을 품는 요셉의 영성을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피정의 한 패러다임 – 성모문보 축일

Thursday, May 30th, 2013

영국에 머무시는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의 스테파노 수사님이 다시 연락하셨다.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옛 이름: 성모문보 축일)을 맞이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급히 번역했으니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기쁘게 받았다. 아침 시간을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을 글을 따라 읽으며 고쳤다. 이글은 피정은 굳이 성모문보 축일을 위해 쓴 것은 아니며, 피정의 의미와 실천을 위해 루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를 그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것이다. 기꺼이 나눠주시고 대화와 교정의 기회를 주신 스테파노 수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한편, 몇 해 전 성모문보 축일에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침 미사에서 나눈 강론이 생각났다. 다시 읽어보니 겹치는 고민과 발견이 많았음을 알겠다. “영혼의 친구: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 피정의 패러다임

보니 써스턴 Bonnie Thurston

몇 년 동안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인근에 있는 거룩한 섭리수녀회의 컨즈(Kearns) 영성 센터의 도움을 받고 협력하면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 영성 센터에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현대식 컨즈 채플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놀라운 만남을 묘사하는 예술작품들로 장식돼 있다.

채플 입구에는 전통 의상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뻐서 서로 맞이하러 달려가는 두 명의 아프리카 여인을 그린 미키 수사님(Br. Mickey McGrath, OSFS)의 훌륭한 ‘Windsock Visitation’이 걸려 있다. 채플에 들어서면 무릎을 꿇은 두 명의 여인 청동상이 있다. 엘리사벳은 머리를 숙였는데, 임신한 배가 볼록하게 불러있다. 마리아는 그 배에 손을 얹고서 생명의 움직임을 느낀다. 마리아는 경이로움에 차서 위를 올려다 본다. 채플 오른쪽 벽에는 타원형을 이루며 두 팔로 껴안고 있는 두 여인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실물 크기이다. 세 번째 원은 엘리사벳의 배이다. 그 구형은 엘리사벳의 옷단을 이루는 불꽃에서 일어나는 조각들을 압도한다.

Windsock_Visitation.png

예술은 세속적인 형태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 예술품 앞에서 기도할 때, 이 성모 방문 광경을 표현한 예술 작품은 피정을 위한 한 패러다임, 또는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의 노래(루가 1:46-56)가 들어 있는 루가 복음서의 성모 방문 이야기(루가1:39-45)는 피정의 이유와 본질에 대해 깨닫게 한다. 피정 방식의 한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래에 말하는 내용은 피정의 한 형태에 관한 스케치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나 세세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고, 스케치하듯 개괄할 것이다. 여러분 자신들의 기대와 상황, 그리고 경험으로 “그 공백을 채우기” 바란다.

상담의 필요성

루가의 성모 방문 야이기(1:39-45)는 복되신 동정녀가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 때문에 많이 놀란 수태고지 이야기(1:26-38) 바로 다음에 나온다. 생명은 우리에게 많은 놀라움을 준다. 때로 최상의 전략은 지혜롭고 믿을 수 있는 어른과 상의하는 일이다. 루가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도 놀라운 일들을 겪고 있는 사촌 엘리사벳(그의 특별한 임신 이야기는 1:5-24에 나온다)에게 찾아간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두 여인은 확신과 위로를 받는다.

피정에서 영적으로 연배가 더 높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피정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는 완전히 상호 의존적이다. 지도자와 지도를 받은 사람 모두가 그들의 만남을 통해 은총을 받는다. 마가렛 파즈단(Margaret Pazdan) 수녀님은 이렇게 썼다. “두 여인은 경청하는 귀와 집중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친척인 두 여인은 그들이 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서로 나눈다.”

여정과 기대

피정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란 동네에 살았다. 엘리사벳은 유다 지방 예루살렘에 가까운 뜨겁고 건조한 산골 마을에 살았다. 이 여행은 갓 임신한 여인에게는 멀고 힘든 남쪽 지방을 향한 것이었다(우연이었을까? 예수는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지난다). 마리아는 걸어갔을까? 혼자 가지는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갔을까? 그는 어떤 위험과 두려움을 겪었을까? 적어도 마리아가 “서둘러 급히 떠났다”(1:39)는 사실은 분명하다. “모든 여정은 첫걸음으로 시작한다”는 속담은 옳다. 마리아처럼 그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피정 여정을 준비하는 이들은 그 기대감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알았고, 곧 있을 그들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도우러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장 26절의 “여섯 달”은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1:36)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석 달 쯤”, 어쩌면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이 차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머물렀는지 모른다. 이 경우, 마리아는 1장 57-59절에서 말하는 사건들 현장에 있었으리라. 우리 역시 기대를 하고 피정에 들어간다.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 혹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거나 방문해 주길 바란다. 새로운 삶을 구하며 중요하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주기를 기대하며 피정에 들어간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을 돕기 위해 피정에 온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피정자 각자는 ‘협조자’이다. 각자는 자신의 기도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찾아 피정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책임을 져야한다. 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기다림과 알아봄

피정 여정을 떠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피정의 집(혹은 교회)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육체적 편의를 준비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피정 인도자나 강사는 우리를 위해 공부하고 기도했다. 우리를 알지도 못하고, 오든 안 오든 개의치 않는 일반 호텔에 예약한 휴가와는 전혀 다르다. 피정에서는 누군가가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루가는 갈릴래아에 사는 마리아가 유다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1:36)을 알았다고 분명히 한다. 엘리사벳도 어떻게든 마리아의 방문을 알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이가 뛰놀았다(1:40-41). 엘리사벳과 배 속의 아이(세례자 요한)는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알아봄은 피상적(‘아, 사촌 왔구나’)이지 않다. 더욱 깊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1:42-43)로서 “복되신”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보았다.

피정에 가면, 이를 준비하는 분들은 우리를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를 기다리고 인사를 건넨다. 피정을 인도하는 분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한 더 심오한 지식을 얻으려 하고, 우리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누군가 우리를 기다려 주고, 누군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기다림과 준비의 손님이 된다는 복된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으로 그 복된 선물을 나눈다.

정체성 질문

피정 진행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동안 우리는 때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위기’를 겪거나, 난생처음으로 우리의 참 자아를 찾느라 분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에서 “내 완전한 정체성의 비밀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피정은 알려지지 않은 우리 자신, 숨은 자아를 만나게 한다.

수태고지 이야기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체성 위기’를 미묘하게 묘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요구받은 일(1:29)때문에 당황했다. 가브리엘은 더 많은 정보를 주면서 마리아의 지도자 역할을 하지, 그 행동 여부는 전적으로 마리아의 결정에 맡긴다(1:30-37). 엘리사벳의 경우, 천사는 임신 사실을 그의 남편에게 알렸다. 이때 엘리사벳은 “나를 찾아 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일종의 정체성 위기를 말한다. 한 사람이 처한 삶의 상황들은 우리들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두 여인은 머튼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 우리의 참 정체성을 창조하는(이탤릭체 머튼 강조) 하느님의 일에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피정은 이러한 창조와 재창조의 시공간이어야 한다.

상호 의존성

우리는 종종 결핍감과 고갈된 감정 때문에 피정을 한다. 고갈과 비어있음(emptiness)은 때로 하느님을 위한 선물이다. 이미 채워져 있으면 받을 수 없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순결한 비어있음을 이용했고 채우셨다. 엘리사벳의 불임성이 열매가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갈과 비어있음을 이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성한 지혜와 에너지로 그 안을 채운다. 이것이 바로 성모방문에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 찬가의 핵심이다. 하느님은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고, “배고픈 사람(비어있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해주셨다(1:48-49). 피정의 목표는 하느님의 주심과 우리의 받음이다. 우리의 비어있음과 결핍과 혼란을 들어 올려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은총의 선물을 받도록 “준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거래에는 상호성이 있다. 거대한 신비 속에 든 진리는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시고 그 신성한 자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 은총의 선물을 받고자 열려 있는 태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때로 그 선물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1:41,44). 엘리사벳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이야기를 확신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물을 주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었고 서로 자아의 선물이었다. 때로 우리가 그 은총의 선물을 가져온다. 때로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의 선물 자체이다.

통찰과 응답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통찰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피정을 한다. 때로 우리는 어떤 응답을 바라면서 피정을 한다.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끔 그 응답을 받기도 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정체성과 본성을 보는 통찰(1:42-43)과 그의 뱃속 아이의 응답(1:44)을 통해 뱃속 아기가 지닌 특별한 속성을 보는 통찰을 얻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한 메시지는 마리아에 대한 사촌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두 여인은 그들이 받은 통찰에 강하게 반응했다.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쳤다.” 마리아는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1:46-55). 마리아를 비춘 조명에 대한 마리아 자신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성서과 조상의 신앙에 뿌리를 둔 찬가였다. 이 찬가는 사무엘 탄생에 대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시편들과 이사야서를 메아리쳤다. 마리아의 “새로운 통찰”은 믿음 깊은 여인 한나의 경험과 마리아가 물려받은 신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회향 – 다시 집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그 누구도, 심지어 복되신 어머니일지라도 영원히 피정을 하며 머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알 필요가 있는 내용을 배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자아의 선물을 받고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과 함께 머물렀다. 그런 뒤에 마리아는 길고도 더운 길을 산만해진 배를 안고(그동안 3개월이나 배가 더 불렀다) 거슬러 다시 나자렛에 있는 집, 그리고 요셉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좋아하는 그 동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또 다른 위대한 피정 패러다임은 “예수의 변모”(마르 9:2-13; 루가 9:28-35) 사건이다. 제자들은 ‘피정 중인’ 산 위에 머물고 싶었다. 베드로는 ‘초막들’을 세우고 그 경험을 제도화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산 위의 경험들’, 즉 우리의 가장 좋은 피정에서 얻은 경험은 평지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 돌려줘야 한다. 아마 시나이 산에서 모세(출애 34:29-34)나 변모한 예수(루가 9:29)처럼 우리는 우리 얼굴을 빛나게 해야 하고 우리 삶을 빛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조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피정에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큰 환호와 음악 밴드가 우리를 맞아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잡초가 멋대로 자란 정원과 텅 빈 냉장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와 밀린 일들이 우리를 환영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피정이 필요했던 이유와 피정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피정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피정의 성공은 피정 중에 느끼거나 경험한 놀라운 체험, 혹은 그분의 얼굴에서 나온 빛이 우리에게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피정의 성공 여부는 피정이 끝난 직후 며칠이 아니라, 6개월 아니, 6년 후에도 걸림이 없는 아량과 사랑의 삶을 사는지에 달려있다.

복되신 마리아는 제때에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2:4) 엘리사벳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로, 그리고 작은 동네의 삶으로 돌아왔다. 마리아를 향한 요셉의 사랑만큼, 마리아는 요셉에게 신실했다. 그래서 요셉을 따라 불편한 환경에서 출산해야 하는 유대 지방으로 여행했고, 아들의 할례를 보았고, 아들에 관한 괴로운 예언도 들었다(루가 2:1-40). 나자렛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 세 사람은 이집트로 탈출하여 이방인으로 살았다(마태 2:13-15,22-23). 결혼 생활 동안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2:42) 예루살렘으로 가곤 했는데 모든 부모의 악몽인 아이의 실종(2:41-50)을 경험했다. 이 모든 소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2:19,51).

피정에서 우리는 비어있음이 은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피정 중에 얻은 통찰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통찰은 우리를 훈련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곳(늙은 여인과 처녀의 임신, 배우자의 기이한 행동, 자녀의 반항 등)에서 새 생명의 움직임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고 참 자아를 살고 삶의 환경들에 무분별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뒤집어 “소중히 간직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피정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뤄지리라는 믿음으로 복된 사람으로, 즉 변화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지 않고 ‘이상한 방식으로’ 어설픈 약장수가 되어 돌아와서는 곤란하다.

(초벌 번역: 최스테파노 수사, 수정: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