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서' Category

[전례력 연재]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

Saturday, June 23r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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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실리아의 순교 – 스테파노 마데르노, 1600)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분단 70년 이후 이어진 대결과 긴장, 갈등과 위협의 어둠이 걷히리라는 희망이 크다. 몇몇 정치 권력자가 만든 일이 아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권력도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역사의 질곡을 통과한 이들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땀과 눈물과 피를 겹치고 포개어 기억하는 신앙 위에서 참된 평화가 싹 튼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희생을 따라 목숨을 바친 일을 순교라고 했다. 순교의 본래 뜻은 복음의 증언이다. 예수의 희생과 성인의 순교가 짝을 이룬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까지 초기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인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붉은 피를 흘렸다. 공인 후 피의 순교는 멈추었으나, 신앙인들은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기도와 노동으로 땀을 흠뻑 흘렸다. 후대에 이르러, ‘피의 증언’을 ‘적색 순교’로, ‘땀의 증언’을 ‘백색 순교’로 이름 붙였다. 교회 역사에서 피와 땀의 순교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번갈아 일어났다.

대한성공회는 한국 전쟁 중에 피의 순교자들을 냈다. 6월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 교회에도 깊이 새겨졌으니, 이 순교를 기억하며 예수의 희생에 드러난 사랑과 희생, 용서와 화해를 살아갈 책임이 크다. 교회 역사가 성인의 축일을 피와 땀의 순교일에 지정하고 기념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 축일은 역사적 사건에서 동떨어져 있다. 현행 기도서에 나온 9월 26일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은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들과는 관련이 없다. 이 날짜는 <1939년 공도문>에 ‘조선인 치명일’로 처음 등장한다. 그 기원은 1925년 조선천주교가 같은 날짜에 지정한 ‘조선 순교 복자 대축일’이 분명하다. 당시 성공회는 다른 교단을 존중하여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념했고, 전쟁 후에 나온 <1965년 공도문>에도 같은 날을 ‘한인 치명일’로 새겼다. 이 때문에 다시 2004년에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로 잘못 표기했다가, 수정판(2018년)에서 ‘한국의 순교자들’로 바로 잡았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는 1984년 ‘복자’들을 시성하면서, 이 축일을 폐기하고 9월 20일로 옮겨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을 지킨다.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 명단과 순교일도 논란이다. <대한성공회 100년사>(1990년)는 이원창, 윤달용, 조용호, 리도암, 홍갈로 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를 순교자로 명시하지만, 같은 해 함께 나온 <선교 백 년의 증언> 중 ‘6.25 동란의 순교자들’ 부분에는 임문환 모세 신부(1900-1950?)의 이름이 나온다. 전쟁 후 북한 지역 성직자의 생사를 파악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빼거나 단순 실수로 빠뜨린 모양이다. ‘납치 연행’의 날짜도 기록이 제각각이고, 홍갈로 신부의 순교 날짜 기록도 엇갈린다.

우리 신앙의 역사 속에 새겨진 ‘피의 순교자들’을 다시 확인하고, 순교자 후손과 상의하여 순교자 개인의 별세 날짜를 바로 잡거나 새로 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들’ 축일을 따로 지정하여, ‘피의 순교’를 기억하고, 역사에서 잊힌 이들의 아픈 ‘눈물의 순교’를 되새기며, 우리 신앙인이 이어갈 ‘땀의 순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6월 23일 치 (↩)

[전례력 연재] 전례독서 –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Saturday, May 12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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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독서 –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교회력)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구원의 역사를 축하하고, 주님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사는 일이다. 신앙인은 이를 전례 안에서 훈련하고, 성서 안에서 확인한다. 전례력에 따라 ‘전례독서’(성서정과)를 마련하여 복음에 드러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기고, 서신성서에서 교회의 신앙을 확인하는 이유이다.

‘전례독서’는 정해진 절기와 주제에 따라 전례 안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이다. 그 기원은 유대교까지 올라간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펼치신 구원 역사를 매년 되새기도록 1년에 걸쳐 ‘토라’(모세오경)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전례독서를 마련했고, 전례략이 정비된 5세기에 이르러 그에 맞는 ‘전례독서’가 자리 잡았다. 초기 전례독서는 복음과 서신서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약은 크게 중시하지 않았고, 시편은 성가대의 노래로 편곡하여 불렀다. 대체로 1년 주기 전례독서로 매년 되풀이하여 읽었다.

1960년부터 전례독서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천주교는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 개혁을 교회 개혁의 첫걸음으로 삼았다. 전통적인 1년 주기 독서를 개정하여,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에 바탕을 두고, 요한복음서를 주제에 따라 삽입한 3년 주기 독서를 마련했다. 1969년의 천주교 전례독서는 전례독서에 관한 이해를 크게 증진했다. 당시 기도서를 개정 중이던 성공회와 루터교가 이를 적극 수용했고, 다른 개신교들도 잇따라 도입했다. 이로써 3년 주기 주일 성찬례 전례독서와 2년 주기 매일기도(성무일도)의 독서가 마련됐다. 물론, 교단 전통에 따라 조금씩 수정하여 사용한다.

북미 그리스도교 연합 모임인 ‘공동전례문위원회’는 수년의 노력 끝에 1983년 ‘공동전례독서’를 출간했다. 이후 다른 영어권 교회들과 협력을 확대하여 1992년 ‘개정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 RCL)를 내놓았다. 성공회는 대체로 이 전례독서를 따른다. 대한성공회는 1983년부터 ‘공동전례독서’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일 전례독서는 3년 주기이다. ‘가’해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는 루가복음서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걷는다. 요한복음서는 주요 절기들(대림/성탄, 사순/부활)에 사용되며, 짧은 마르코 복음서를 보충하여 ‘나’해에는 요한 6장을 덧붙여 사용한다. 전례력의 주제는 같지만, 복음서의 특성에 따라 해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최근 전례독서의 큰 변화는 구약성서의 재발견이다. 구약과 신약에 드러난 구원 역사의 일관성을 확인하고,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전통적으로 구약을 복음서의 주제에 따라 배열한 ‘선택 독서’가 있고, 새롭게 구약의 흐름을 존중한 ‘계속 독서’가 있다. 천주교는 전자를 고수하지만, RCL은 ‘계속 독서’와 ‘선택 독서’를 모두 제시하여 설교자가 선택하도록 배려했다. ‘선택 독서’든 ‘계속 독서’든 한 방식을 선택하면, 한 해 동안 유지하는 것이 좋다.

‘전례독서’가 3년 주기로 반복되는 탓에, 사목 상황과 사목 주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성서 본문을 선택하는 개신교 예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데 많은 성서학자가 동의한다. 세계 여러 교회가 같은 전례력을 지키며 같은 성서 본문을 두고 성찰하는 일은 한 분이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함께 고백하고 따른다는 중요한 징표이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5월 12일 치 (↩)

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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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아멘.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이 시간 이 공간에 당도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이고 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시작했던 길이었습니다. 극기와 절제, 기도와 봉사로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끝에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우리 발을 씻겨주시는 은총을 경험하고,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양식으로 베푸시는 마지막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셨던 한 청년이 정치와 종교 권력의 시기와 모함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장면을 멀리서,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때로는 비겁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절망 속에서 말입니다.

세상이 승리와 성공을 자축하며 자만감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의 영은 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해 침묵의 무덤에 갇힌 모든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성 토요일은 어두운 침묵과 희망 부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된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밤을 목격했던 세 여인처럼, 우리는 역사 안에서 부활을 새롭게 목격했던 성공회 신자 세 명의 음성을 만나려 합니다. 그들이 남긴 증언 속에서 부활밤에 담긴 아픈 상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희망과 치유를 나누려 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20세기 영미 시단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이라 불렸던 T.S. 엘리엇을 만납니다. 그는 연작시집 <황무지>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무슨 일 때문에 시인에게 4월은 그토록 잔인한 달이었을까요? 시인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생각했습니다. 병사만 9백만 명, 민간인 1천 9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 탓에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4월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너무도 깊고 아픈 상처가 어린 시간입니다. 4월 3일, 4월 19일, 그리고 여전히 가슴 저며오는 4월 16일. 신앙인은 우리 삶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은 고된 삶의 여정과 동행 속에서 얻은 상처 위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과 나눔, 희생 사랑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두 번째 인물은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 신부입니다.

“그 누구도 섬처럼 떨어진 사람은 없나니,
인간은 하나인 전체요, 한 사람은 그 대륙의 한 부분일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17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던 존 던(John Donne) 신부의 설교 한 대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제목이 되어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스페인 민중은 물론, 헤밍웨이 자신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던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군사 쿠데타 세력과 싸웠습니다. 소설가는 모든 사람이 불의에 저항하는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의 전쟁 경험에서 존 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삶에 이뤄야 할 사랑과 정의와 자유는 어느 사람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동떨어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돕고 연대하여 이뤄내야 해야 할 하느님의 일입니다.

존 던 신부 자신은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통을 통해 들여다보고 깊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과 그 생명은 뿔뿔이 흩어진 개체가 아닙니다. 그 한 인간 자체로 온 창조 세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입니다. 역사와 현실의 교회는 뿔뿔히 흩어진 생명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례에 초대하여 먹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을 축복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전례와 성사를 그 행동으로 삼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둠을 깨뜨리며 울려 퍼진 부활의 종소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의 세례를 받아 여기에 모인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라고. 한 몸인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놓인 존재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정의와 자유를 함께 축하하며 누려야 한다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시작이었던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활의 증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입니다. <생쥐와 인간>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인벡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신앙인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놀라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모르며,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인공 톰 조드는 권력에 쫓기는 몸이 되어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이제 너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냐?”
어머니의 애타는 물음에, 톰 조드는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엄마, 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어떤 사람을 때리는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거기서 나를 찾으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예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남녀의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의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오늘 여러분은 무덤가를 찾은 세 여인과 더불어,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바라보았던 세 명의 성공회 신자와 함께 부활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는 기억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호흡에 담긴 하느님의 숨결을 믿고, 그들과 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절망이 어둠처럼 지배하는 시간에도, 진실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세월을 견디며 세상의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세례받는 이들과 함께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악은 사라지고 죄가 씻어졌으며, 죄인에게는 용서를, 우는 이에게는 기쁨이 펼쳐지는 밤, 교만과 미움을 쫓고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주는 밤”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8년 3월 31일 부활밤 전례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