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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 초대하여 함께 벽을 넘는 신앙

Sunday, January 18th, 2015

1사무 3:1~20 / 시편 139:1~6,13~18 / 1고린 6:12~20 / 요한 1:43~51

2015년 1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연유와 내력이 있든, 신앙은 항상 누군가 마련한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떼어 어느 자리에 모이는 일로 시작합니다.

초대받아 모인 공간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성서를 통해서 선포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마다 지닌 기도의 제목을 이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 마음 깊이 하느님께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와 자매, 교회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서 주신 이 성찬의 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고 마시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리고, 말씀을 먹고 성찬을 나누는 곳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 초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초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질문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색깔이 독특합니다. 나름대로 지각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젊은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함께 사는 제사장 엘리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는 늙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이상한 음성을 들은 사무엘이 다시 엘리를 찾아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늦게서야 엘리는 자신의 오랜 신앙 경험과 경륜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의 음성에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도 알려줍니다. “하느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늙은 엘리의 시대가 가고, 젊고 활기찬 사무엘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나이 든 제사장 엘리의 효용 가치가 떨어져서, 더 쓸모 있는 젊고 새로운 사무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부족한 해석이어서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급한 해석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의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뜻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선을 바꿔서 돌아보면,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초대를 알아차리도록 돕고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도록 돕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라는 이름의 뜻은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지혜와 경륜으로 젊은이의 식별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장직을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엘리는 자식이나 가족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세심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물려주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엘리에 관하여 전하신 소상한 말씀을 자신에게 숨김없이 전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신앙이 곧 고상한 신앙입니다.

어쨌든, 사정을 모두 알아차린 엘리는 사무엘에게 조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합니다. 그 응답할 내용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줍니다. 매우 겸손하고도 성실한 어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고상하고 성실하며 연륜 깊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무엘을 눈여겨봅니다. 사무엘은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른이었던 엘리의 식별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식별 도움을 얻고서야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듣고 공부하고 새긴 만큼만 밖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이상한 고집과 주장으로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은 꽤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리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 경험에서도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밖에서,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서, 밖에 있는 지혜와 통찰과 경륜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서로 귀 기울이지 않고는, 서로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훈련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과 나 자신의 주장을 혼동하고 맙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이 서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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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먼저 제자가 된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전하고 기다렸던 ‘어떤 분’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의 초대에 친구도 초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돋보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자신의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을 드러냅니다. 우리 사회와 빗대어도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학력과 지역 차별, 재산과 지위에 따른 차별의식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기는커녕,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그의 깊이를 헤아려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에 관한 신앙인의 태도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경륜에서 얻은 확고한 신념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종종 ‘내 신앙 체험과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는 합니다. 밖을 향해서 어떤 판단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나타나엘은 깨닫습니다. 오히려 밖에서 오는 친밀하고 따뜻한 발견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오랜 지식과 체험은 종종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자기 내면의 눈을 가려서 사람 판단, 사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을 받아들이고 안팎으로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인 ‘율법’의 원래 뜻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일’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신앙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일이기에 앞서, 예수님의 삶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맺은 관계의 모본에서 배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당신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알 수 없는 탐험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탐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필립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와서 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드라진 표현이 사람의 움직임과 참여를 드러내는 동사인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몸소 걸어서 참여하고 관찰해야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로만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람을 가르는 차별과 사회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집니다. 대신, 초대와 환대, 그리고 친교가 어떤 학력과 출신과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전례 전통이 깊은 우리 교회는 “와서 보라”는 초대로 사람을 이끌고 환대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게 찬양하러 모입니다. 그윽한 연기를 피워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냄새를 맡고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며 참여하여 함께 그 깊은 맛을 느끼고,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고 그 길을 따르는 새로운 탐험, 신앙의 순례를 이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귀를 기울여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고상한 삶과 신앙의 조언을 건네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여 차별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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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은총 – 안과 밖을 함께 응시하는 일

Wednesday, January 14th, 2015

히브 2:14~18 / 시편 105:1~9 / 마르 1:29~39

2015년 1월 1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마르코 복음처럼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3년 정도 기간으로 그리는 다른 복음서의 구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지 없이 깨집니다. 예수님은, 시쳇말로, ‘짧고 굵게’ 모든 일을 1년 만에 끝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한가하게 예수님의 태어난 경위나 족보를 들먹일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자의 요한이 곧장 나타나 예수님을 예견하고, 그분께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첫 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고, 어부를 불러서 제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길을 서둘러 가십니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분입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분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빠른 발걸음과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장면 전환이 느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사건과 행동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여럿 등장합니다. 살펴보면, 호흡이 길어지는 곳에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르침 와중에 악령을 쫓아내서 사람을 정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여행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을 쓰다듬고 고쳐주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 예수님은 멈춰 서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깨진 곳에 예수님은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서는 큰소리로 꾸짖어 혼내시는가 하면, 몸이 아픈 곳에서는 조용히 곁으로 가서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는 길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짧은 생애의 긴박한 선교 사명 속에서도 그분의 눈과 귀와 감각은 늘 다른 사람과 그들의 처지를 향하여 세심하게 열려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의 방향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민감한 사람은 신경질적이며 자기방어적이기 쉽습니다. 자기만을 향하여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누군가 손만 대면 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그 처지에 민감한 사람은 그 사람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구석을 찾도록 이끕니다.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나 자신’도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이 정말로 아픈 곳이 어딘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동과 시선이 늘 두 겹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들어가서도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가르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찾는 공부와 대화 속에는 악령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령을 꾸짖어 내쫓았다는 점이 눈에 도드라집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쩌면 이는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생각과 고민을 함께 검증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며 종종 논쟁하는 일을 멈추면 악령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잡념이 악령이 되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설교 방송을 듣지 마시고 기도서를 읽으십시오. 솜사탕 같은 묵상집이나 예화집을 읽지 마시고 역사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면 좋은 선생이나 성직자를 찾아가 깊은 질문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령이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쉬러 들어가셔서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쉼과 치유는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쉼이 없으면 병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다른 사건입니다. 쉼이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손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쉰다는 일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박한 일에 눈감고 내팽개쳐 두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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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쉬어도 쉬지 않고 쉽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면서 쉬고, 온갖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쉽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급박한 부탁으로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방해받았다는 듯이 귀찮아하면서 쉽니다. 이것은 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 마음으로 소비하는 쾌락’입니다.

쉰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느리게 관찰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아내의 손놀림을 살피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선이 붙은 남편의 등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좁은 방에 들어가 수학책 영어책에 머리를 박고 말라가는 자녀를 잠시 불러내어 허튼 농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쉼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필요한 바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일이 쉼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치유도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의 치유를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자면,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에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당으로 모여서 성찬례로 새벽을 여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 이 새벽 미사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입니다. 예수님께도 그 빠른 길을 걷느라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 생각하기 쉬운 아까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잘 아셨고, 그 어둠 속에서 참 인간이셨던 당신이 지닌 어둠을 대면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어둠이든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든지,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조언과 겹치는 말입니다.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이것이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이 목표를 향해서 긴박하고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함에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이 비틀어지고 몸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 불완전함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완전성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대로 ‘피와 살’이 되셨습니다. 두 겹의 의미가 돋보입니다. ‘피와 살’은 불완전성과 한계, 유혹에 노출된 약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고통은 ‘피와 살’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살’이 되어서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피와 살’로 만든 이 성찬의 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 슬픔과 눈물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의 상처와 깨진 곳을 둘러보는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깨진 곳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구원이 빛, 치유의 빛, 너른 환대의 빛이 스며듭니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아직 소리 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어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바로 거기로.”

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Wednesday,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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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