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Sunday, January 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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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루가 2:15-21)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거리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 아래 고함치는 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마저도 당황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 ‘전도’ 열정을 마음으로 칭찬할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여러 종교의 포교 행태가 자칫 광신으로 그 가르침의 핵심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안에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기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부추기면, 그 종교 자체와 그 종교인마저 애꿎은 비난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민망할 지경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때, 신앙인은 우리가 믿는 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해 첫날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을 지키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그 다짐은 ‘예수-임마누엘-그리스도’의 이름 뜻을 되새기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 사건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사람이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일에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놀라운 행동이 아기 예수 안에서 펼쳐집니다.

새날을 여는 분은 이제 정치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우악스러운 외침과 강요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려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입니다. 춥고 배고픈 빈곤의 현실에 오시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 안에 머무십니다. 다르고 낯설다고 배척당하여 서성이는 이들 옆에서 걸으십니다. 진실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사랑을 회복하려는 수고와 땀을 함께 흘리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왕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동행하시며 부서진 세계에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분이 진정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동행을 걷지 않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 이들은 지배자들이거나 위선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은 우리 자신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창조 세계의 평등한 주역으로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시편 기자와 함께 새날 새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십니까?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교는 누구인가?

Sunday, October 3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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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는 누구인가?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서울교구는 오는 11월 26일 정기 교구 의회 중에 새 주교를 선출한다. 서울교구만이 아니라 전국 교회가 바른 주교 식별과 선출을 바라며 성령의 인도 아래 한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있다. 때가 가까워지면서 복잡한 논의와 민망한 논쟁도 적잖다. 바른 지도자를 뽑겠다는 신앙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참에 주교제를 없애면 안되느냐?’ ‘임기만 짧으면 된다’는 차가운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한다. ’주교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복음과 교회의 선교 전통 안에서 찾고 있는가? 이 물음과 대답이 없다면 후회를 되풀이한다고 역사는 말한다. 다시, 주교는 누구인가? 우리 기대와 판단 기준은 교회 전통에 근거가 있는가?

주교직은 교회 선교의 필요에 따라 마련된 역사의 산물이다. 성공회는 초대교회 신앙과 삶에 새겨진 주교 상을 온전히 담으려 했다. 복음의 전파와 교회 선교의 방편으로 주교제를 택했다. 그래서 주교제는 그리스도교의 필수 요소가 아니지만, 성공회 전통에는 필수 요소이다. 주교제를 포기하면 적어도 성공회는 아니다. 여기에 이견을 달 수 없다. 문제는 주교직을 바로 이해하고 세우는 일이다.

초대교회와 성공회 전통은 주교를 신앙의 교사, 공동체의 사목자, 복음의 진리에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로 가르친다.

교사로서 주교는 생각과 신념이 어지러운 신앙을 바로 세우고,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득하는 사람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태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경험을 분석하여 신학으로 정리하고 이를 신앙의 행동으로 이끈다. 주교는 현장의 신학 교사이다.

사목자로서 주교는 ‘교구’라는 한 교회를 신앙의 기준과 전례의 행동으로 아우르고 돌보는 사람이다. ‘교구’라는 한 교회의 책임 사목자인 주교는 자신의 대리자인 사제를 지역교회에 파송하여 주교의 권위로 신자를 보살핀다. 다양한 지역교회의 신앙과 선교의 일치는 전례 안에서 확인하고 쇄신한다. 이것이 선교를 위한 권위와 위계질서의 본질이다.

순교자로서 주교는 복음 전파와 선교에 삶을 바치는 사람이다. 여기서 권위가 선다. 순교(마티리아)라는 말은 ‘복음 증언’의 다른 말이었다. 순교자는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신앙을 세우고 이를 공동체가 누리며 증언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 밖의 일은 순교의 의지를 꺾는 온갖 유혹일 뿐이다.

주교는 교사와 사목자와 순교자로서 일만 하면 된다. 신자들은 주교에게 다른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지위로 생겨난 여러 다른 일에 귀와 눈을 파는 주교나, 주교에게 불필요한 책임을 다 맡기면서 그 업무 수행을 비판하는 신자나 모두 주교직을 위험에 빠뜨린다. 주교에게서 최고경영자(CEO)를 기대하면, 주교도 망치고 교회도 망친다.

본연을 되찾아 거듭 물어야 올바른 주교 식별이 가능하다. 이제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1. [성공회신문] 2016년 10월 30일 치 – 서울교구 주교 선거를 앞두고 [성공회 신문]의 요청으로 짧은 글을 썼다. 이번 호에는 “주교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주교의 근본적인 직무를 되새기고, 다음 호에서는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주교 선출을 위한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거룩한 신앙 – 세속과 종교 ‘사이’에서

Saturday, October 8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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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신앙 – 세속과 종교 ‘사이’에서 (루가 17:11~19)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밖에서’ 옵니다. 신앙은 ‘밖에서 손 내미는 구원’ 앞에 자신의 연약함과 상처를 내어놓는 일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자기 내면의 고정관념과 안락한 영역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으로 한 걸음 발을 뗍니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과 새로운 사건에 ‘감사와 찬양’으로 답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따르는 일이 거룩한 신앙입니다. 오늘 구약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과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러한 구원을 맛본 거룩한 신앙인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재산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에게 닥친 ‘한센병’이라는 지독한 피부병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때 구원의 소식이 ‘밖에서’ 들려옵니다. 권력과 재산, 지위와 명예에서 전혀 동떨어진 ‘이스라엘 여종’에게서 말입니다. 이 비천한 자의 소식에 귀 기울일 때 나아만의 치유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가 자기 앞에 조아리지 않는 예언자의 명령에 토라져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려할 때, 치유는 다시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가 건네는 조언에 ‘장군’이 귀 기울여 초라한 강물에 몸을 던질 때 치유는 되살아납니다. 기존의 경험과 고정관념은 종종 신앙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립니다. 이때 세상 보기에 작은 이들의 지혜과 도전이 구원을 향한 변화로 우리를 이끕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납니다. 선민 유대인 종교의 땅도 아니고 이방인 세속의 땅도 아닌 ‘사이’의 땅입니다. ‘나병 환자’는 어디에도 들 수 없이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종교의 교리든 세속의 가치든, ‘전염’의 두려움에 휩싸이면 서로 편을 가르고 쫓아내고 소외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좁고 위태로운 ‘사이’의 공간을 걷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삶의 은총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 내리는 곳은 안녕을 약속하는 기존의 종교도, 성공을 보장하는 세속의 가치도 아닙니다. 고정된 기준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새로운 가치를 찾아 길 떠나는 나그네들이 매우 간절하고 위태로운 ‘사이의 땅’에서 만날 때 신앙이 싹틉니다.

신앙의 길은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 ‘사이’를 계속 새롭게 걷겠다는 다짐입니다. 치유를 받은 아홉 명은 옛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익숙한 자기 종교와 세속의 땅에서 기쁘게 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은 전혀 낯선 곳에서 다른 길의 선택으로만 이어집니다. 자신의 몹쓸 병 때문만이 아니라 이방인으로도 손가락질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길과 믿음과 생명”(19절)을 선물하십니다. 이 은총의 선물로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안락한 집을 떠나 이 간절한 기도와 호소를 드리러 ‘사이’의 공간인 성찬례에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에 귀 기울이며 우리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치유와 구원의 은총에 기뻐하며 성찬기도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선택 안에서 우리는 세속의 가치와 종교의 판단에서도 벗어나 진실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찮게 작은 밀떡과 포도주가 성체와 보혈로 변화하여 우리 몸을 만나고 우리 삶을 거룩하게 가꿉니다. 이것이 우리가 걷는 믿음과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