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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공간으로 – 동계재 수요일

Wednesday, December 17th, 2014

민수 11:16~17,24~29 / 시편 99 / 1고린 3:5~11 / 요한 4:31~38
2014년 12월 1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이 새벽을 밝히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잠시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 추운 아침에 이곳에 모여들게 했을까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마음속 대답에 더해 이런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아침 미사를 위해서 성당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어떤 의무감에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홀로 바치고, 하느님의 복을 빌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도 모두 훌륭하고 기쁘고 대견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추운 바깥쪽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홀로 저 추운 밖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종걸음치며 빨리 그 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칫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모여들어서 우리가 서로 온기를 함께 나눕니다. 저 바깥쪽은 춥고 어두운 곳이지만, 이곳 안쪽은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모여서 따뜻하고 밝은 안쪽의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좀 시시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날일수록 새벽 이불을 당겨서 몸을 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한 시도 아까운 소중한 아침입니다. 그 포근한 새벽 이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두운 새벽을 달려서 여러분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아늑함과 세상의 시간 계산법이 잠시 멈춘 곳입니다. 바깥세상은 시간이 쉼 없이 돌아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거룩한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춥고 홀로선 바깥의 공간과는 다른 따뜻한 안쪽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 자기만을 위해서 바쁘고 쉼 없는 시간과는 다른 멈추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세상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우리의 시공간 개념을 마련하여 누리는 일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신앙인은 그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전례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시공간을 새롭게 설정합니다.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간에 맞춰 살고, 이 시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공간을 만듭니다.

오늘은 사계재(四季齋: Ember Days)라 불리는 교회절기의 동계재의 첫 날입니다. 사계재는 네 계절에 각각 3일을 정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봄의 춘계재, 여름의 하계재, 가을의 추계재, 겨울의 동계재입니다. 이미 대림절기라는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걷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날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의문입니다. 실은 역사적으로 사계재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대림절기가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지닌 절기가 겹쳤습니다.

교회는 사계재를 지내는 의미를 조금 바꿨습니다. 사계재는 하느님의 백성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생각하고 되새기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성직자를 위하여, 금요일에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그리고 토요일에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소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 우리는 성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요일에 우리는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우리는 다른 많은 동료 신자를 생각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한 것입니다. 춥고 어둡고 바쁘고 쉼 없는 바깥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삶의 중심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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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서라야 우리는 오늘 구약 민수기의 사건, 사도 바울로의 권고,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던 사람들은 과거의 고생은 금세 잊고 고기 맛을 못 본 지 오래됐다고 불평하며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이 불평을 무마하고 다스리려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서 칠십 인의 원로를 뽑아 하느님의 영을 받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어떤 이는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을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모세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모자라고 거절하려는 사람인데도 불러서 성직자를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영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분파로 나뉘어 싸우는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깊으면, 배움이 깊으면, 연륜이 깊으면,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주장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 주장은 시작과는 달리 종종 ‘자기’를 세우는 일로 미끄러집니다. 이런 강한 ‘자기’ 주장은 자신의 성을 쌓는 일이 빈번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외롭게 만듭니다. 게다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를 외롭지 않고 더욱 넓고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럿이 함께 기초를 두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잡수시라’는 권고에 예수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일”에 삶의 중심과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대림절기와 동계재는 우리 삶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고,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함께 나누어 거룩한 시간을 살고,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우리 삶의 방향과 부르심을 ‘나’ 자신에게서 돌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 아침 시간, 이 동계재의 시간, 이 대림절기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곳은 낯선 하느님과 낯선 다른 사람을 초대할 만큼 따뜻하고 느슨하고 넉넉합니다. 이곳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힘을 얻으려고 그분께서 주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의 양식으로 먹고 함께 나누는 거룩한 시공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따르고 환대하는 삶 – 성 안드레아 사도와 니콜라스 페라

Monday, December 1st, 2014

이사 52:7~10 / 시편 19:1~6 / 로마 10:12~18 / 마태 4:18~22
2014년 12월 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월요일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축일로 지키는 성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연결되는 지점에 성 안드레아 사도가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옛 시대의 끝이 새 시대의 시작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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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아 사도는 열 두 명의 사도 명단에서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핵심 사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 사도로 등장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기지만,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고 교회의 선교가 활발해진 이후에, 안드레아의 활약이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그는 유럽의 북부 끝인 스키티아까지 올라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고, 지금의 동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 안드레아 사도는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존경 받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당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대교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세계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선교사로 계속 활동하려고, 동료에게 주교직을 물려주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도시 파트라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X 모양의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서 처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로 X 자 모양은 성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자면, 안드레아의 별명은 “따르는 사람”이었을 법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의 장면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래도 요한복음서의 설명이 더 그럴듯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세상의 회개를 외치며 새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본을 따라서 검소한 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지목하자, 안드레아는 요한 선생의 명을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외침과 생활에 자신을 던져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또한 이러한 삶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 베드로를 불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선생을 따르는 사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선생님을 내세우며, 초대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맡겨서 그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과 행태에 던지는 도전이 참으로 큽니다.

연원을 알 수 없지만, 교회는 11월 30일을 성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는 대림절로 교회의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 때문에,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은 한 해의 성인 축일 가운데 첫 번 째 성인 축일이기도 합니다. 따르고 환대하라는 교회의 사명과 삶이 교회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뜻을 되새겨 주려는 의도였을까요?

원래 11월 30일, 어제 지켰어야 할 축일을 오늘 12월 1일에 지키는 까닭은 축일이 대림주일과 겹쳐서 하루 미뤄서 지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12월 1일은 니콜라스 페라(Nicholas Ferrar: 1592~1637)라는 분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페라는 영국 성공회 초기 수도자입니다.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성공회 역사에서 니콜라스 페라는 매우 중요한 분이어서 그의 축일을 지키는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는 헨리 8세 이후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수도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첫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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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는 중세 교회의 재산 많고 권력이 찬란했던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제 성직을 받았지만, 결코 사제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과 함께 수도회 전통의 회칙에 따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교회를 다시 세워서 수도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웃의 건강과 복지를 살피는 사목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 생활에 충실했고, 성서의 이야기와 삶의 교훈을 그림으로 그려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수도회에 대한 호감이 거의 사라졌고,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금식과 절제 생활을 꺼리는 현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페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수도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수도원 생활은 초대 교회의 수도원을 되살리는 사례였고, 2백 년 후인 19세기 영국과 세계 성공회 전역에서 다시 수도회가 부흥하는 영적인 자산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영미 문학계에서 최고 시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성공회 신자 T.S.엘리엇은 “리틀 기딩”(Little Gidding)이라는 긴 시를 남겼습니다. 이후에 그 유명한 <사중주>로 편찬된 시집의 마지막 네 번째 장입니다. 이 “리틀 기딩”은 바로 니콜라스 페라가 내려가 수도원을 세웠던 마을이요, 그 수도원 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시인 엘리엇은 “리틀 기딩”을 방문하고 이런 구절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12월은 교회 시간(교회력)의 시작 달이지만, 세상 시간(세속력)의 마지막 달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끝내는 시간에 겹쳐 우리는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세상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따르기 시작하며 다른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초대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감과 시작이 겹치는 삶, 새로운 따름과 환대의 시작이 여러분에게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니콜라스 페라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끝내고 작은 시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과 영성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보살폈던 것처럼, 이 12월이 여러분에게 새롭게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며, 이웃을 발견하고 보살피는 시간이길 빕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 끝을 내는 일이 곧 시작하는 일 / 그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곳.”

아멘.

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Saturday,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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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