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 토마스 – “시골 성직자”

Monday, August 23rd, 2010

최근 여러 차례 바다 건너로 여러 동료 성직자 벗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와 여러 고민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마당에 조용히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는 했다. 잠시 쉬는 참에 찾아 읽는, R.S. 토마스(성공회 사제, 시인)의 시 한 편은 그들에 대한 생각을 사무치게 한다. 시인의 얼굴처럼 그들과 나도 변하고 늙어가겠지.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허튼 번역을 올린다. 마지막까지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리니, 그들은 복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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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성직자

R. S. 토마스

보나니, 그들은 낡은 사제관에서 일하고 있네
햇살을 옆에 두고, 촛불을 곁에 두고
고귀한 이들, 그들의 검은 옷은
약간의 먼지에 덮이고, 색바랜 푸른 빛마저 감돌고
곰팡이마저 거룩하게 피어 있네. 그러나 그들의 두개골은
그 많은 기도로 원숙하나
무덤에 묻혔으니
무지렁이 시골뜨기들과 나누는 무덤. 그들은 아무 책도 남기지 않았네
그들의 외로운 생각이 담긴 비망록도
그 낡은 회색 성당에. 다만,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고결한 말들을 적었으니
너무 빨리 잊히리. 하느님께서 그의 때에
혹은 시간이 끝나는 날, 이를 고치시리라.


R. S. Thomas (1913-2000), “The Country Clergy” (1958)

교회와 사제직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Monday, June 28th, 2010

지난달부터 성직 서품이 곳곳에서 있다. 새로운 사제들이 나오고, 부제들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서품 전례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겼을 테다. 예년과는 달리 몸이 참석할 수 없으니, 멀리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합하여 축복한다.

어떤 이는 성직자들 안에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해온다. 한 개인의 지향과 영성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신자요, 사목자이겠으나, 특정한 전통의 공동체(성공회) 안에 녹아들어 그 책임을 지는 ‘사제’인지는 모르겠다는 고민 어린 비평이다. 어느 틈엔가 어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빌미로, 사제 개인들은 공동체의 전통 안에서 받은 사제직의 실천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곤 한다는 불만이다. 시쳇말로, ‘몸은 이 교단에 두어 옷까지 걸쳐 입었는데, 사고와 행동은 전혀 딴 동네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본다. 사제직 ‘본연’에 대한 끝없는 반성은 필수적이다. 규정된 기능과 행동만을 요구하는 교회 조직의 권위주의가 세를 부릴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런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 저항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만연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특정 전통의 공동체 안으로 서품받은 일을 잊거나, 애써 모른 체하려는 게 보인다는 걱정이 일기도 한다. 대체로 ‘본질주의’는 핑계의 한 방법이다. 사정이 걱정하는 그대로라면, ‘평신도’ 사목자로 남되, 그 특정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로는 자처하지는 말 일이다. 어쨌든, 그 의미의 ‘본연’과 그 특정한 공동체 전통의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매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사제직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평신도로 식별하여 살았던, 스트링펠로우에게서 몇 마디를 인용하여 되새긴다. 이는 교회와 사제직에 대한 ‘본연’의 고민일 테니, 다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이를 씨줄 삼아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성직자와 교회는 각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드러내야 하는 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는 교회 전통 안에서 경험하고 논의하며 정리한 내용들과, 서로 다른 맥락과 현장의 경험과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화를 부추겨 계속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서가 기술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교류와 격동, 갈등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대신해서 살아간다.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낯선 이요, 이방인이다. 사회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세상의 사람들과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져서 그 사회에 거스르는 행동을 피하는 도피주의의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은 성사적 예배로 모여서,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몸의 구성원들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사제직에 서품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그 사제직과 사목 활동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을 세상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임(congregation)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그 몸의 구성원에게 펼치는 사목 활동이다. 그 관계의 양상은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교회,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교회의 극도로 복잡한 생명 활동을 향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여, 그들이 세상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게 쓰도록 돕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고해 성사의 활동이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임무와 증언을 듣고, 그 몸의 구성원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뤄가야 할 다른 모든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사목 활동은 교회의 전통, 즉 성령 강림 사건 이래 펼쳐진 선교 사명과 그 일관성을 보살피며 지켜나가는 활동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과 거룩함에 투신하는 것이다.

William Stringfellow. A Private and Public Faith, 1962.

낙관과 비관 사이

Wednesday, May 13th, 2009

내용 없이 징징거리는 듯한 블로깅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돌이켜야겠다. 한 주 전 쯤 교회 내에 있는 어떤 분의 긴 편지에 교회의 여러 일들에 대해 답장하면서, 결국에는 ’잡감’에 대한 또다른 소회를 적는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올해 들어 잡감들이 더욱 밀려 옵니다. 블로그에도 적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잡스러운 생각들은 성직자들과의 관계, 교회의 문제, 그리고 성직 자체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옵니다. 남을 두고 비판하는 시점에서 나온 고민도 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잡감들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서로들 스스로의 도마를 마련해 보기를 권유하려고 미욱한 고민이나마 공개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내 무의식에 흐르는 것들을 들춰서 어떤 너머를 지향하고 살아가보자는 심산입니다. 그런 일이 쉽지 않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너머라는 초월을 종교인들 마저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면 누가 생각한단 말입니까? 신자 아닌, 성직자 아닌 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깊이 보고, 식별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뒤틀린 자의식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신자로서, 성직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뒤틀린, 혹은 가려진 무의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약한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공방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그냥 멈추는게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한편, 그렇게 쉬이 상하는 감정을 갖고 성직자 할 일은 아니라는게 제 최근의 결심입니다. 오해를 하더라도 창조적으로 하자는게 또 다른 결심입니다. 그런 창조적인 오해는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복합감정에 사로잡혀 오해를 양산하는 무의식의 구조가 밝히 드러나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아직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이렇게 긴 답장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제 한계를 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한계가 다른 이들과의 공명을 통해서 낙관을 비추지 못한다면, 아마도 저는 비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대로 제게서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소망을 없애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면, 그 비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돌이키는 시점의 마지막 푸념이길 스스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