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나바 사도 – 위로와 격려의 벗

Wednesday, June 11th, 2014

2014년 6월 12일 수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욥기 29:11~16 / 시편 112 / 사도 11:19~30 / 요한 15:12~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6~37).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키는 사도 바르나바 성인에 관한 성서의 첫번째 기록입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다시 말해서, 나라를 잃고 나서 세계 각지에 퍼져서 다른 나라 문화와 언어권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대체로 ‘바르나바’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제사장직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쳐서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도왔습니다.

그의 이름을 풀이하면 흥미롭습니다. 우선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더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요셉’이라는 이름은 ‘요세스’로도 쓰였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바르나바’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사람은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 이름값은 사실 자신이 얻은 지위나 재산으로 얻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도 부모님께서 소망을 담아 주신 이름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겠고, 그렇게 사는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이름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불리며 좋은 기억을 남기는 삶이라는 뜻이겠지요.

제 이름 ‘낙현’은, 아버님께서 돌림자인 ‘물 락’(洛) 자에 ‘밝은 현’(炫)을 붙여 주셔서, 제 이름을 뜻은 ‘밝은 물’이 되었습니다. 밝게 살지 못하고 어둡게 사시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아마도 당신의 운명을 짐작하시고 아들이나마 밝게, 그리고 남에게 좋은 물이 되어 살라는 소망을 담아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에 누를 끼치지 살지 않나 종종 돌아보곤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이름 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요셉’처럼 그는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더해주는 삶’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는 바울로를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추천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바울로를 두려워 했습니다. 이때 바르나바는 바울로의 회심 사건을 소개하고 그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더해’ 주었습니다. 후에 하느님께서는 바울로와 더불어 바르나바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선교가 더 넓게 퍼지도록 ‘더해진’ 일이었습니다.

바르나바의 그의 이름 ‘요세스’처럼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로와 선교 여행의 단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어린 동료 요한 마르코가 미덥지 않아 그를 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바울로와 잠시 결별하고 내쳐진 요한 마르코를 자기 동료로 삼고 선교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의 실수를 너그럽게 헤아려 주었습니다. 마르코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후에 바울로는 마르코를 다시 인정하며 칭찬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선교 활동에서 다시 협력한 것은 물론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바르나바’로 불렸습니다. 성서는 그의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 번역합니다. 그의 이름은 여러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 특히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을 위로했던 선교 활동과 잘 어울립니다. 그는 낙심한 동료를 위로하고 함께해 주었습니다. 실은 ‘위로의 아들’보다 더 좋은 번역은 ‘격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로를 격려하며 사도들에게 소개했고, 요한 마르코를 격려해서 새로운 기회를 주었으며, 안티오키아에 있는 젊은 신앙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격려는 특정 소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목과 선교 활동은 격려의 사목이요, 격려의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도움을 주어 성공한 다른 사람의 성취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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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의 친구 메나스 이콘, 5세기, 콥틱)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벗’이라 부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마저도 ‘친구’라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로써는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고 하느님께서 주신을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벗, 예수와 친구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었고 선배였지만, 당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정보를 앞세워 다른 이들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습니다. 터 놓고 나누었습니다.

세상은 선생이나 어른이라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으로 사람을 부리려 합니다. 세상은 경력이나 신분이라는 우위를 얻으면 그것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자신을 내세우려 합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나누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세상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성취한 내용을 서열이니 직위니 나이니 하는 것으로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차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동료와 나누는 것도 차단하고 경력을 내세워 선을 긋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마저 ‘벗’이요 ‘친구’라 칭하며 동등하게 대하셨는데도, 선배랍시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답시고, 서열이 높답시고 반말로 하대합니다. 그걸 뭐라 하면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 ‘친근한 말’이라고 억지 변명을 일삼습니다. 서열에 물들어 무의식을 파고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깨닫지 못한 처사입니다. 예수님마저도 당신의 어린 ‘벗’들과 모든 것을 나눴는데도,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는데도” ‘너희는 모르는 게 있어,’ ‘그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일’이라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막습니다. 그 신앙과 영성의 경륜과 깊이가 의심 가는 대목입니다.

신앙인은 벗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잘못을 용기 있게 지적하되 용서하고, 더 좋은 것으로 ‘더해주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모든 이들을 동등한 벗으로 삼아 자신을 열어 대화하고 도전받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우리를 벗으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인들의 관계를 친구 사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르나바는 그 뜻을 잊지 않고 더해주고 용서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벗으로 살았습니다. 신앙인이라 자처한다면, 우리 각자가 처한 조직과 단체와 사회 안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이름값을 하며 살고 있나요?

경계 – 신앙인의 자리

Saturday, January 25th, 2014

성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백성이 ‘보편적 사제직’(혹은 만인 사제직)을 나누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래전,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적었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여기 ‘문학’이라는 자리에, ‘신학’을, ‘교회’를, ‘성직자’를, 그리고 ‘신앙인’을 넣어도 되겠다. 나는 여전히 이 지점에서, 그동안 명멸했고 여전히 진행 중인 그리스도교 운동, 신앙 운동, 특히 소위 ‘진보적’ 종교 운동이 자기 자리를 굳건히 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관여’의 방식에서 ‘조짐’과 ‘상처’와 ‘의사소통’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변화를 향한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다 싶다.

오늘 외신을 통해, 그 ‘관여’의 상징적 이미지, 아이콘, 십자가, 아니 신앙의 자리를 발견한다. 시위대와 진압부대 ‘사이’에 우뚝 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사 신부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와 아이콘, 바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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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와 진압경찰 사이에 선 정교회 수사 신부들

종교는 ‘사이’와 ‘틈’의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대결하고 가르는 분열의 경계선 위에서,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함부로 도통하여 ‘경계를 넘는다’고 말하지 말 일이다. 그 가느다란 경계의 선 위에서, 그 사이에서, 그 틈에서 수없이 떨리고 긴장하며 고통당하며, 조짐을 보고, 상처을 껴안으며,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 아니다. 실은, 경계를 넘는 일은 없다. 그저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일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늘 경계를 걸으셨던 것처럼.

사제직 – 애틋함의 영성

Saturday, November 30th, 2013

한 달 전 한국 성공회 서울교구 성직자 모임인 “성우회”(聖友會) 소식지에 실을 글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거듭 고사했으나 외국에 계신 신부님들의 사소한 근황을 소개하는 특집이니 한 분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친구 신부님은 거듭 부탁했다. 마지못해 글을 편지 형식으로 적어 보냈다. 늘 글을 너무 무겁게 풀어간다는 말을 듣는 참이니, 편지 형식이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한 듯하다. 지난주에 소식지가 나와 배포됐으니, 이곳에도 올린다. (너무 사적인 한 문장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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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 – 애틋함의 영성

신부님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머뭇거렸어요.

그동안 몇 분과는 소식을 깊이 주고받았지만, 신부님께는 연락드리려는 손이 좀체 움직이질 않더군요. 한국을 떠나온지 10여 년이 흘러서 생긴 삶의 간극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처음 몇 년은 그 틈을 쉽사리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손을 내밀며 당기며 격려했던 시간이었어요. 활기와 의지를 다지며 나누기도 했지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인연에도 세월따라 부침이 크지요. 물리적인 공간의 간격이 너무 큰 탓에 긴밀하게 서로 보살필 처지도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바빠야만 일이 되는 듯한 강박증의 사회 속에서 모든 일에 마음을 주려는 신부님도 덩달아 바쁘실 테니, 그 틈을 노리거나 겨우 쉬는 시간을 훼방할 수 없노라 미리 판단한 탓도 있겠지요. 제 탓입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늦은 시각 원근에서 바쁜 일 제쳐놓고 찾아와 이야기 나누며 토로하던 시간들. 어느 가을 산속에서 며칠 동안 워크숍을 마치고 지쳐버린 저를 격려했던 눈길과 말. 말없이 다가와 손에 쥐여 주었던 작은 선물. 혹은 남이 볼세라 얼른 주머니에 쑥스럽게 넣어주시던 봉투. 바쁘지만 정성스럽게 쓰인 격려와 기도의 카드. 고마운 기억은 늘 애틋합니다.

애틋함이었어요.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공부하며, 사목하고, 이민자로 살아가며 얻은 마음의 감기 같은 것도요.

공부는 대체로 새로운 지식과 그 지식의 효용을 목표로 하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은 그런 어려움을 훨씬 웃돕니다. 그런 공부를 친구들이랑 나눌 생각을 하면 더욱 힘이 납니다. 나눌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만 공부한 이들도 있는데, 입신양명을 위해 자기 살을 깍는 독종과 괴물로 변하는 일을 여럿 보았습니다. 어느 분이 현대 교회의 현실을 보며 개탄한 대로, 신학교의 교실과 성당의 제단과 세상의 거리가 따로 놀면서, 제 영역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그 안에 하릴없이 사로잡힌 일이 숱합니다. 이럴수록 제 공부의 근거와 내용, 방향과 목적을 늘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보살피는 이 없이 불꽃이 잦아든 신앙 공동체의 사목을 얼떨결에 맡은 것은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축복이었어요. 소속 교구가 눈길을 주지 않는 작은 신앙 공동체와 지난 10년 동안 살아왔어요. 작든 크든 사목은 마음을 주는 일이며 상처와 위로가 늘 교차하는 공간이니 시간과 에너지가 소진될 밖에요. 그러나 신학 공부는 이처럼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를 진단하며, 그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경험을 근거로 세워져야 할 테니, 그 10년은 사목자인 제게 뜻밖의 은총이었어요.

은총은 늘 가난과 주변부에서 다가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가 소수자 교단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듯이, 이민자의 성공회 사목은 이중으로 불리합니다. 미국 성공회가 미국 사회에서 꽤 영향력 있다 하더라도 이민 사회에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민 사회는 자기 본국의 문화와 종교의 지도를 재현하려 하니까요. 게다가 이민자의 성공회 사목은 미국 성공회 안에서 또 다른 소수자로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파격적 조치가 없는 한 이런 어려움을 가까운 미래에 이겨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이민 사회의 중심부에서마저 밀려난 이들을 신앙 공동체에서 만나며 사귄 은총은 제 공부와 삶, 그리고 사목에 큰 도전이요 배움이었어요.

(중략) 아이들이 그나마 불평 없이 무탈하게 자라니 하느님께 감사하고, 여러 어려움을 단단한 사랑과 신뢰로 이겨나가면서, 야위는 아내에게 고맙지요. 성직자는 가족에게도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하느냐는, 성공회 성직자의 보편적이고 쓸쓸한 물음을, 저도 신부님과도 매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애틋함이에요. 그 안에서라야 은총과 사랑이 눈물처럼 밀려오고, 눈물로 맑아진 눈으로 더 넖고 깊게 세상을 응시할 수 있으니까요. 경제적 효용과 성과를 따져 묻는 세간의 기준이 팽배한 시절인지라, 쓸쓸한 사물과 사람을 향한 애틋한 시선을 지켜나가는 일은 이제 몇몇 소수자의 일이 된 듯해요. 성직자들이나마 이 시선을 더 깊이 성찰하며 붙들어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져요. 공부에서든, 사목에서든, 일상의 생활에서든. 그 애틋한 시선이 마련하는 연대가 희망이라고 믿어요.

그 성찰과 다짐의 한켠에서 신부님께 편지를 쓸 용기가 났어요. “성우”라는 말이 성직자들의 친교와 우정을 뜻한다면, 앞에 적은 애틋함은 ‘서로 친구인 성직자들’의 영성이라고 믿어요. 그 촉촉한 영성에서라야 사물과 사람 사이를 잇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잇는 희망과 생명의 사제직이 자라날 테니까요.

곧 뵐 날을 기다립니다. 건강하세요.

주낙현 신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