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Friday, February 3rd, 2012

어느 미주 한국 신문 샌프란시스코 지역 판에 인터뷰 기사가 오늘 나왔다. 한 달 전, 친분 있는 ‘객원’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인터뷰 형태로 정리했다. 몇 시간 넘은 대화였으나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도, 다 전할 수도 없다. 언론 인터뷰를 작정했다면, 이정환 기자의 “인터뷰 당하고 낭패를 당하지 않는 몇 가지 원칙”을 참고했어야 했다.

다행히,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내용을 살펴달라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깊은 배려라 생각한다. 그래서 틀과 기조는 유지하되 이곳저곳 바꿀 기회를 얻었다. 내 식대로 손 봐 돌려준 내용을 옮긴다. 최종 지면에 나온 기사와는 좀 다르다.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성공회는 한인사회에서 무척 낯설다. 성공회를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성공회는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교회이다. 개신교 단일 교파로서는 현재 세계 최대이다. 한국에서는 교세가 작아서인지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간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만 보더라도 미국 장로교와 비슷한 규모이고 미국 사회 내 영향력도 아주 크다. 교리적인 신학보다는 예배를 중심으로 그 영성과 복음을 체험하고, 이 체험을 삶으로 이어가려는 것이 성공회의 특징이다. 극단과 배타보다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중시한다.

성공회 입장에서 개신교가 일으키는 한국사회의 종교 갈등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모든 개신교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 종교는 언제나 갈등을 유발한다.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적인 문제인데, 한국 교회에 흐르는 배타적이고 과도한 선민의식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에만 있는 선민의식을 끌어들이고, 종교개혁기에 나온 선택적 예정론이라는 특정 교리를 결합해서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독단이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타 종교, 심지어는 이웃 교단들과도 갈등이 일어난다. 둘째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인데, 한국의 여러 교회는 반공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회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에 물들면 좌나 우나 눈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된다. 이러면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거나 대화할 수 없다.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에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잘못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사실, 한국 교회는 과거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교회가 그동안 보여왔던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를 반성해야 할 때다. 예를 들어,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 조찬기도회 등을 열어서 독재 정권을 축복했다. 타 종교에 그토록 배타적이면서도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진 독재 정권의 지도자들은 후원했다. 게다가, 그런 압제적인 정권에 반대하던 시민과 종교, 심지어는 같은 교단까지도 ‘용공’이니 좌파’니 하며 딱지를 붙여 몰아붙이며 독재 정권과 행보를 같이 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런 행태가 아직도 많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갈등이 있다고 보는가?

“한인 사회의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보다 배타성이 더 강한 것 같다. 이것은 모든 이민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한인들이 이민 생활에서 겪는 영적인 어려움을 이겨나가도록 종교적인 위안을 준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나? 이것은 잃어버린 욕구 충족의 길로 빠질 수 있다. 교회가 마련해주는 직위와 직함은 이민자가 주류 사회에서 얻기 어려운 지위의 대체품이기도 하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지곤 한다. 이민 교회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또 한국이나 이민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경우도 많다. 그 하나가 성공에 대한 집착이다. 자칫, 교회가 자기 기준에 따라서 성공한 교인들과 성공하지 못한 교인들을 암묵적으로 갈라놓지는 않은가,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

교회가 한인들이 쉽게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면도 있지 않은가? 많은 한국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물론이다. 미주 한인의 70%가 크리스천이라는 통계가 있다. 교회는 새로 이민 온 한인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포교적 목적이 지나치면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은 내면에서 갈등을 빚게 된다. 즉, 각종 서비스를 받게 되면 은연중에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되고, 교인이 안 되면 얌체같이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이 때문에, 기대와는 달리 이민자들은 생활이 안정되면 교회를 떠난다. 앞에서 말한 70%에는 이렇게 떠난 사람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이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한국 학교가 폐쇄 직전까지 갔던 사실이 떠오른다. 교세 확장 수단으로 한인 교회가 한국 학교를 난립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은 서로 지는 게임이다. 최근에는 ‘실리콘 밸리 한국학교’와 같이 특정 종교 색채를 제거해서 오히려 잘 운영되는 사례도 퍼진다고 들었다. 장기적으로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본연의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인 교회 안의 갈등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가?

갈등이 없는 사회가 있겠는가. 다만, 신앙은 그 갈등을 함께 견디고 그 방향을 공동의 선을 향해 조정하는 훈련이요, 능력이다. 이민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소수자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소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을 함께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특별히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세례는 크리스찬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는 상징이다. 성찬례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잔과 떡을 나눠 먹는다. 이렇게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이 교회의 선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성숙할 수 있다. 이것이 이민 사회의 힘이어야 한다. 종교나 그 지도자들에게만 답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를 성찰해야 한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다른 이웃과 대화할 때 한인 사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긴다.

북가주 한인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경험과 시야가 좀 더 넓어져야 한다. 한인 사회나 교회에서 듣고 보는 것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한인들만 울타리를 두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미국 주류 사회 안에서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살아가야 하는 자녀들를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다. 미국 사회나 교회에서 논쟁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한인 사회나 교회의 한정된 시야로만 이해하지 말고, 좀 더 넓게 바라보고 대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키울 때라야 미국 사회 안에 바로 서서 공헌하는 한인 공동체가 될 것이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

그녀의 “잔인한 달” – 우리의 황무지

Tuesday, March 8th, 2011

늘 스산한 소식만 전해오는 소식에 귀 닫고 살고 싶었다. 신문도 안 열어보고, 트위터도 안 켜고, 그저 침잠하며 살고 싶었다. 누구의 처신대로 “누구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고, 속마음을 절대로, 끝까지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된 사회와 조직 속에서, 이미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리 지쳐버린 것 같았다.

“제 성직의 소명이 하느님께서 제게 품은 희망과 닿을 수 있도록 식별하고 실천하려 한다. 그런데 여러 처지 속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일삼아 그 식별과 실천을 보류하다가, 우리가 은퇴한 뒤에야 회한의 소리로 그런 목소리를 낸다면 매우 무참한 일이 될 것”이라 항변하면서도, 그렇게 지쳐버린 마음을 따라가고 싶었다.

닫은 귀를 비집고 들려오는 소음들. 그 소음에 깨어 가끔 열어보는 이야기들에는 끔찍한 야만의 기록들이 선연하다. 관음증일까? 남이 남기고 간 편지를 들춰 읽는 일. 2년 전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한 연예인의 편지를 읽는 일. 친필인지 확인되지 않았다고들 하는 그 편지를 읽는 일. 그러나 그 관음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는 내려읽을 수 없었다.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

이 대목에서 나는 치가 떨렸다. 가슴이 막혀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생각을 더 뻗어볼 수 있을까?

숨 막히지 않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말을 위해서 이렇게 쓴다. 그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T. S. 엘리엇을 되새겨 주었노라면서, 관음증에 이어 먹물인 것을 젠체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겪은 “잔인한 달”이 지난 세기 대 시인의 목소리보다 더욱 선명하도록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로 ‘열두 달’ 내내 이어졌음을 되새기려는 것일 뿐이다. 대 시인의 역설적인 절망과 희망이 오늘에 겹치 내 마음을 후벼 파지 않는다면, 그런 시 읽기는 뽐내는 일일 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T. S. 엘리엇 <<황무지>> – <죽은 자의 매장> 부분

계절은 얄밉도록 황무지에도 생명을 가져온다. 망각 속에서 가녀리며 질긴 목숨을 구차하게 살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을. 망각 속에서 힘센 놈들이 휘두르는 힘과 착취에 굴복하여, 그들이 던져주는 것들로 따뜻하게 살면 될 것을. 왜 우리의 기억과 욕망을 후벼 파는 것이냐, 이 계절은, 이 편지는.

시인의 계절은 눈으로 감춘 망각을 휘젓는 생명에 대한 자각이라도 되련만, 우리 현실의 그는 싸늘한 눈물과 죽음을 남겨서, 오랜 시의 주인공이 되었으되, 힘 없이 가련하기만 하다. 그의 죽음과 편지는 정말로 우리의 ‘무딘 뿌리’를 휘젖는 봄비가 될 것인가? 이제 그에게는 그 잔인한 세월이 그만 멈추고, 봄비로 휘젓힌 우리 욕망과 기억으로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남긴 한마디를 이제 한국이라는 황무지의 첫 구절로 삼자.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