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고치며 이어갈 순례의 신앙 – 히포의 성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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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며 이어갈 순례의 신앙 – 히포의 성 어거스틴 주교 축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북부 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라틴명: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은 ‘서방 교회’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꼽힌다. 그의 신학은 서방 교회의 형제인 천주교와 성공회, 그리고 모든 개신교에 영향을 주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성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어거스틴 신학을 다시 살려내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초대 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종합하여 중세 교회를 열었다. 그는 진리를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례를 새롭게 열었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변방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키웠으나 세례는 받지 않았다. 당시 최고 교육을 받으며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점차 플라톤 철학에 관심을 두고 학자와 교수의 길로 나섰다. 그는 한동안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져 어머니의 신앙에서 멀어졌다. 마니교는 세계를 ‘영와 물질’,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나누고, 두 세력의 싸움으로 우주와 인간의 흥망성쇠를 설명했다. 이 매력적인 이분법과 이원론은 세상을 확고하게 관통하고픈 젊은 어거스틴을 사로잡았다.

그는 마니교의 확실한 이론 체계가 실은 닫힌 사고라는 점을 서서히 알아차렸다. 스스로 영성 엘리트들이라 뻐기던 ‘영지주의자’들의 교만과 무책임한 태도를 확인했다. 그는 머물지 않고 배움의 여행을 계속하되, 얕게 걷지 않고 자신을 던져 그 깊이와 한계를 체험하며 나갔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로 돌아왔다. 어머니 모니카의 깊은 기도 때문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더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당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스 성인(340-397년)이었다. 처음에는 수사학에 뛰어난 주교에게서 논리 기술이나 배우려 했지만, 차츰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리와 깊이에 매료됐다. 그가 사막 수도자 안토니오 성인의 생애를 읽을 때 환청이 들려 펼쳐 읽었다는 로마서 구절은 그의 회심을 이끌었다. “진탕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그가 방탕하며 살았다는 고백은 신앙적인 과장도 섞여 있다. 결혼하지 않고 십수 년을 함께 살았던 연인과 헤어진 일로 마음의 큰 상처를 겪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여인이 받았을 상처에는 말이 없다. 그는 여기서 얻은 아들과 함께 암브로스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아들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 이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사제가 되고 4년 후에는 주교가 된다. 이후 탁월한 신학자 주교로서 성서 해석과 교리에 관한 저작으로 ‘서방 교회’ 신학의 주춧돌을 놓는다.

그의 유산에는 그늘도 있다. 그의 신학은 마니교의 이분법과 이원론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는 비판이 꽤 있다. 과거 생활의 죄책감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죄와 악에 관해 집착했다. 그는 교회에 ‘원죄’ 신학을 심어 놓았다. 결혼 후의 성관계도 불가피한 악이라며, 이마저 아기를 갖기 위해서만 용인된다고 했다. 급기야 원죄는 성관계로 유전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교회는 여기에 머물렀고, 바울로 신학을 어거스틴의 눈으로만 읽게 만들었다.

어거스틴의 순례는 계속돼야 한다. 그의 순례가 시대의 그늘 안에 갇히지 않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고맙게도, 마이클 마셜의 책 <순례를 떠나다>(비아, 2018)는 어거스틴과 함께 걷는 새로운 신앙 순례를 안내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8월 25일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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