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분단 70년 이후 이어진 대결과 긴장, 갈등과 위협의 어둠이 걷히리라는 희망이 크다. 몇몇 정치 권력자가 만든 일이 아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권력도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역사의 질곡을 통과한 이들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땀과 눈물과 피를 겹치고 포개어 기억하는 신앙 위에서 참된 평화가 싹 튼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희생을 따라 목숨을 바친 일을 순교라고 했다. 순교의 본래 뜻은 복음의 증언이다. 예수의 희생과 성인의 순교가 짝을 이룬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까지 초기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인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붉은 피를 흘렸다. 공인 후 피의 순교는 멈추었으나, 신앙인들은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기도와 노동으로 땀을 흠뻑 흘렸다. 후대에 이르러, ‘피의 증언’을 ‘적색 순교’로, ‘땀의 증언’을 ‘백색 순교’로 이름 붙였다. 교회 역사에서 피와 땀의 순교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번갈아 일어났다.
대한성공회는 한국 전쟁 중에 피의 순교자들을 냈다. 6월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 교회에도 깊이 새겨졌으니, 이 순교를 기억하며 예수의 희생에 드러난 사랑과 희생, 용서와 화해를 살아갈 책임이 크다. 교회 역사가 성인의 축일을 피와 땀의 순교일에 지정하고 기념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 축일은 역사적 사건에서 동떨어져 있다. 현행 기도서에 나온 9월 26일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은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들과는 관련이 없다. 이 날짜는 <1939년 공도문>에 ‘조선인 치명일’로 처음 등장한다. 그 기원은 1925년 조선천주교가 같은 날짜에 지정한 ‘조선 순교 복자 대축일’이 분명하다. 당시 성공회는 다른 교단을 존중하여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념했고, 전쟁 후에 나온 <1965년 공도문>에도 같은 날을 ‘한인 치명일’로 새겼다. 이 때문에 다시 2004년에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로 잘못 표기했다가, 수정판(2018년)에서 ‘한국의 순교자들’로 바로 잡았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는 1984년 ‘복자’들을 시성하면서, 이 축일을 폐기하고 9월 20일로 옮겨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을 지킨다.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 명단과 순교일도 논란이다. <대한성공회 100년사>(1990년)는 이원창, 윤달용, 조용호, 리도암, 홍갈로 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를 순교자로 명시하지만, 같은 해 함께 나온 <선교 백 년의 증언> 중 ‘6.25 동란의 순교자들’ 부분에는 임문환 모세 신부(1900-1950?)의 이름이 나온다. 전쟁 후 북한 지역 성직자의 생사를 파악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빼거나 단순 실수로 빠뜨린 모양이다. ‘납치 연행’의 날짜도 기록이 제각각이고, 홍갈로 신부의 순교 날짜 기록도 엇갈린다.
우리 신앙의 역사 속에 새겨진 ‘피의 순교자들’을 다시 확인하고, 순교자 후손과 상의하여 순교자 개인의 별세 날짜를 바로 잡거나 새로 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들’ 축일을 따로 지정하여, ‘피의 순교’를 기억하고, 역사에서 잊힌 이들의 아픈 ‘눈물의 순교’를 되새기며, 우리 신앙인이 이어갈 ‘땀의 순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 성공회신문 2018년 6월 23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