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의 신앙 – 쓸쓸하고 아름답게 떠나는 일

May 13th, 2015

사도 17:22~34 / 시편 148:1~2, 11~14 / 요한 16:12~15

2015년 5월 13일 (부활 6주간 수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주 짓궂은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륜이 깊다면서 이래저래 지시하고 훈수 두는 일입니다. 충고가 쉬운 까닭은 자기 손에 어떤 책임도, 어떤 더러움도, 어떤 수고도 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땀과 수고를 더하지 않고,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 충고는 힘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조롱거리가 됩니다.

저 같은 여러 성직자는 종종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충고’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성직자와 교회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요? 또다시 짓궂은 대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성취, 땀 흘렸든 안 흘렸든 자신이 차지한 자리, 스스로 고생해서 이뤘다고 자찬하며 흐뭇해 하는 지위를 내려놓고 이별하는 일입니다. 내려놓는 이별이 가장 어려운 까닭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잊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뤄낸 일과 자신의 생이 다음 세대에서 무시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자리에 틀어 앉아 쥐고 있으면, 그 자리가 작동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추한 일이 됩니다.

저 같은 여러 성직자는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에 발목이 걸려 자신의 생존 영역을 지키려고 하나 마나 한 충고나 내뱉으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성직자와 교회는 추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우주 삼라만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표상을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찾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느님이라는 매우 기이하고도 이해하기 교리를 붙잡은 이유는 그 관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새로운 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이 아름다움과 새로운 도전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신비라고 부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본문에서 우리는 이처럼 신비로운 삼위일체의 관계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어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혼내시고 복을 내리시며 달래기도 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모든 일을 내어 맡깁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며 소유권을 주장하실 만한 분이 갓난아기로 태어난 나약한 한 인간에게, 갈릴래아 천한 시골 촌뜨기에게, 아직 새파랗게 젊은 미숙한 목수 청년에게 자신의 세상을 다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받은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낮은 인간이 되셔서 온갖 궂은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타고난 능력과 재산도 전혀 없이 바닥부터 맨몸으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의 결말은 고통과 고난 끝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생 값 받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닐까요? 그 고생의 대가였는지 성부 예수님은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싸움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승리의 기쁨과 전리품을 챙길 만한 자격과 지위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모든 것을 넘나드는 그 몸과 능력으로 홍길동처럼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면서 세상을 지배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운명에 닥칩니다. 승리를 누릴 충분한 시간도 없이 서둘러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름 없이 살아야 했던 삶, 특히 지난 3년 동안 온갖 죽을 고생, 아니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 죽어야 했던 모든 일을 마치고 부활의 승리를 겨우 얻어냈는데, 겨우 40일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운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승리와 성취를 성령님께 다시 맡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맡기는 일은 자신의 짐을 떠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생과 온몸의 상처로 얻은 지혜와 연륜을 고스란히 다음 사람에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별하기로 작정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그 말씀은 모두 하셔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몸과 능력은 이제 제한도 없이 자유롭습니다. 게다가 제자들과 오랫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서 그 누구보다도 친밀하지 않나요? 당신의 가장 힘센 능력을 갖추고 다시 돌아온 제자들과 멋진 팀워크를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는 성령이 오셔야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놀라운 변화와 새로운 관계는 이때 일어납니다. 새로운 사명을 맡은 성령님은 자기 멋대로 생각하거나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알려주실 것이라 합니다. 그 성령님은 자신이 아니라, 떠나고 물러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렸던 신앙과 행동이 성령님에게서도 되풀이됩니다.

이것이 새롭게 등장하는 삼위일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서열의 관계, 주종의 관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권력 세습의 관계도 아닙니다. 성부 하느님의 창조 세계가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활동의 무대가 되고,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성령님의 활동으로 이어져 확장되는 관계입니다.

이로써 다시 성부 하느님이 펼치신 창조 때에 우주 전체에 숨결을 불어넣었던 기운과 바람인 성령님의 활동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펼쳐지는 은혜의 힘이 되어 우리에게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몸소 피땀 흘리셨던 이 땅은 성령님을 통해 은총의 자리로 거룩해집니다. 내려놓고 떠남이 있어서 펼쳐지는 은혜입니다. 내려놓고 떠남이 만들어내는 신비입니다.

떠나는 일과 작별은 세상에서 쓸쓸한 일로 보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맞이할 궁극적인 떠남과 이별인 죽음을 무서워 하는 까닭은 그 쓸쓸함에 대한 두려움일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보면, 신앙의 눈에서 보면, 떠나는 일은 아름다움이 커지는 일입니다. 자신이 선대의 지식과 지혜, 신앙과 실천 속에서 이어받은 것들이 더욱 넓어지고 더욱 환하게 꽃 피우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떠남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일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는 모습처럼 영광스럽게 하늘로 오르는 일, 승천일 것입니다.

신앙인은 떠남이 쓸쓸해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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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벗 되어 서로 머무는 일

May 10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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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벗 되어 서로 머무는 일 (요한 15:9~17)1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7). 그리스도교 신앙과 실천의 핵심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되새기며 실천하려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면, 여느 종교나 도덕의 가르침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뜻과 실체를 깊이 새기지 않으면, 세상에 흘러넘치는 빈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정한 테두리와 가치에 도전하고 초월할 때라야 새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특권과 차별의 벽을 넘어섭니다. 벽을 넘는 힘은 성령에게서 옵니다. 오늘 사도행전(10:44~48)이 전하는 성령의 내림 사건이 전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활동이 유대인의 제한과 벽을 훌쩍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성령의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이 일을 선민의식과 자기 신앙의 특권을 주장하여 막는다면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는 중죄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를 가르는 빈부, 세대, 지역의 분열과 특권을 성령과 함께 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을 입에 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환대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함께 머물러 달라’는 초대가 예수님의 삶에 되풀이하여 등장합니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낯선 나그네에게 머물러 달라서 청한 제자들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도 베드로에게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협조자 성령의 내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영’으로 더욱 깊고 친밀하게 머무시려는 까닭입니다. 요한 신학의 핵심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는’ 관계입니다. 서로 초대하여 함께 머무는 관계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서로 벗 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세상이 만든 질서는 ‘주인과 종’의 질서입니다. 한쪽은 힘을 부리고, 다른 한쪽은 굽신거려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롭게 펼친 질서는 ‘서로 벗 된 관계’입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벗’입니다. 예수님마저 우리를 ‘벗’이라 부르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종’ 부리듯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이를 ‘동등 제자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문에 어느 교부는 ‘우정’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극진한 표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성령은 온갖 차별의 벽을 넘어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머물라는 용기를 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서로 함께 ‘벗’으로 존중하는 삶을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초월과 환대와 우정이라는 새로운 삶의 관계를 몸에 익히는 일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를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 사랑은 서로 벗이 되어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10일치 주보(↩)

기름과 눈물의 환시 –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

May 6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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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1:5~10 / 시편 92 / 마태 20:20~23
2015년 5월 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오늘을 생소한 설명이 붙은 “라틴 문 앞의 성 요한 사도” 축일로 지킵니다. 이 축일 이름만으로는 오늘 축일을 오해하거나 혼동하기 쉽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사도 요한 성인은 12월 27일에 기념하는 복음사가 사도 요한 성인과 같은 분입니다. 교회력에는 한 성인의 축일이 여럿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물론이려니와 세례자 요한 성인이나 바울로 성인이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특별한 신앙의 사건이 있을 때, 그에 얽힌 성인의 신앙을 기념하려는 뜻입니다.

“라틴 문 앞”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는 로마 제국의 관문인 로마 입구 “라틴 문”(Porta Latina)이라 부르던 성문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름이 끓는 가마가 있었고, 거기에 요한 성인을 넣어 죽이려는 참이었습니다. 결국, 군인들은 성 요한을 기름이 끓는 가마에 집어 넣고, 끓는 기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어 성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성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은 전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려고, 오늘 성인의 축일이 한 번 더 마련됐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라틴 문 앞에서 고난받은 사도 요한 축일’이라고 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앙인들은 그가 유배지인 파트모스 섬에 갇혔고, 거기서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요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도 요한은 성서에 등장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과 전설이 혼합하여 생겼습니다.

요한은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첫 제자단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어떤 교부는 요한복음서를 쓴 사람이 바로 이 요한 사도라고 했고,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바로 이 요한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분이 요한 복음서를 썼고, 내친김에 요한 1서와 2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도 합니다.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입니다만, 이런 주장의 객관적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이름을 통해서 여러 사건과 의미를 손쉽게 하나로 엮어 보려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뜻이 중요합니다.

후대의 교부들이나 신앙인들이 요한 성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성서에 나온 이야기와 교부들이 전해준 전설을 통해서 요한 사도의 삶을 우리 신앙의 태도에 비추어 볼 뿐입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부름 받은 요한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며, 2천 년 후 똑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을 되새겨 봅니다.

첫 단계 –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던 어부였습니다. 못 배우고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던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제자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일으켜 세우실 때, 요한은 다른 두 명의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빛을 내며 변화한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게쎄마네 동산에서 괴로운 기도를 하실 때 함께 기도해 달라고 초대받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핵심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매일 아침 성찬례와 나오시는 여러분이나, 우리 교회를 이끄는 여러 지도자처럼 중요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단계 – 요한은 이처럼 제자단의 핵심적인 위치를 지니고 권력과 자리를 바라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보듯이, 어머니까지 나서서 요한에게 한 몫을 떼어달라고, 한자리 얻게 해달라고 부탁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나 이런 청탁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신앙의 내력과 친분이 있으니 이렇게 요구할 법합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핵심 제자였고, 이 교회를 오래 지켰고, 가문과 신앙의 내력이 길고 하니, 당연히 한자리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엿보입니다. 사람은 종종 이처럼 자기 신앙의 열심과 내력을 내세워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주장하고는 합니다.

이런 점에서라면 교회도 세속의 정치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자리싸움과 권력 싸움으로 진흙탕이 된 한국 교회의 추태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성공회는 여기서 자유로울까요? 신앙의 부르심은 순식간에 권력 추구와 다툼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첫 소명과 부르심을 늘 되새기면서 이러한 권력의 유혹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권력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낯두껍고 뻔뻔한 사람일 뿐입니다. “너희는 이 고통의 잔을 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실 때, 그 고통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 들 수 있습니다” 하며 대답했던 제자들의 뻔뻔함을 우리는 늘 되새겨야 합니다. 이처럼 권력을 바라고 자리를 얻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 우리 교회의 현실에 던지는 뜻은 무엇일까요?

세번 째 단계 – 어떤 변화의 사건을 통하여 요한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 성인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요한만은 성모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참혹한 현장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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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부활한 빈 무덤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렸습니다. 첫 부르심으로 핵심 제자단이 되어 으스대던 모습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 잘 되면 자리하나 주세요’ 하는 마음을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드러내던 그 뻔뻔함이 무엇인지 다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힘을 드러내는 기적의 현장에 등장해서 으스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실 고난의 깊이를 함께 느껴달라는 초대는 잊고, 잠에 빠져들어 자신이 권력을 갖는 꿈만 꾸었던 제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이가 힘을 보고 들떠서 몰려다닐 때가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도망쳤을 때, 그 고통을 목격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남몰래 홀로 감당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바로 여기서 ‘라틴 문’ 앞 끓는 기름 솥에서도 살아난 기적 이야기의 뜻이 풀립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요한을 죽이려고 끓는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그 기름은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성령의 기름, 작은 그리스도로 새롭게 부음 받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를 죽이는 기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해 진리를 들고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를 갖게 하는 기름이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요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핵심 제자단이라는 서열의식과 대대로 신앙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때, 두려워서 모두 도망친 십자가 밑에서 가녀리게 떨며 우는 여인들을 내 어머니, 내 형제자매로 삼아 보살필 때, 요한 성인은 다시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져 빈 무덤만 남았을 때 요한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자신 안에 기름 부음 받은 예수님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있듯이, 예수님 안에 제자 요한이, 요한 안에 예수님이 이미 자리하여 살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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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몸에 모셨던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혔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환시(幻視)마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갇혀 있었기에 요한이 지닌 상상력은 사람을 옭아매는 현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억압의 현실을 넘어서는 신앙의 희망을 더욱 깊이 갈망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은 환시 속에서 현실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무서운 힘과 권력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요한은 새로운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괴롭히고 짓밟은 힘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과 계획 안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깊은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의 자리나 힘도, 작은 사람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눈물과 함께하며 이 슬픔을 보살피는 일에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나누시려는 잔은 바로 이러한 슬픔과 눈물의 잔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의 권위와 자리를 포기하고서 그 눈물의 잔을 진실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