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한 영성주의

August 22nd, 2014

소위 “영성주의”의 폐해가 심각하다. 그리스도교 내, 아니 우리 교회 안 이곳저곳에서 영적 멘토니 지도자니 하는 ‘도통한’ 자들의 성서 이해와 영성 이해는 순진무구한 수준을 넘어 가히 자기기만의 수준이라 하겠다. 역사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성서 텍스트가, 유사 심리학과 뉴에이지의 풍의 근거 없이 야릇한 틀을 뒷받침하는 비유나 증거 구절(prooftext)로 전락하는 일이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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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가슴’을 울리는 듯한 화법과 언어적 농간을 유심히 들춰보면 여느 종교에서 흔히 보이는 수준 낮은 미끼와 비슷하다. 이를 깨달음이자 경지 높은 영성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행태가 가관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현실 인식이나 문제 해결 방식은 매우 얕거나 훨씬 타협적이라는 것. 깊게 살펴보는 척하면서 엄청나게 에두르는 화법은 궤변으로 판명 나고, 겸손한 듯 도통한 듯한 태도와 해법 제시는 현상 유지(status quo)이거나, 자기기만적인 타협이다. 자기기만에만 머물면 좋으련만 남들을 무시하는 거만함도 보인다. 자신의 눈과 귀가 막혔는지도 모른다.

이 태도는 비성서적이며 몰역사적이다. 그것이 어떤 신흥종교 풍의 영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육신의 영성이요, 그래서 육체와 역사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성이다. 여기서 한치라도 벗어날라치면 대체로 현대판 영지주의로 전락하거나, 그 안에서 도통한 체하며 스스로 만족하며 산다. 그들의 행복 선택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도전하고 변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스스로 곤두박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영성은 바로 이를 식별하는 힘이다.

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August 15th, 2014

해방과 전복의 어머니 – 성모 안식 축일 (8월 15일)1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이 기쁘고 즐거운 날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모 마리아 안식 축일과 겹쳐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송가’(루가 1:46~55)는 광복절을 되새기기에 좋은 해방의 복음이요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51~53).

성모 마리아의 삶은 이 ‘마리아 송가’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양 중세처럼 성모 마리아에 관한 잘못된 신심과 미신적인 숭배를 낳기에 십상입니다. 마리아는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녀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작고 가녀린 몸을 당신께서 몸소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뚜렷합니다.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천주교만 유독 이날을 ‘성모 승천’ 축일로 지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인데, 중세기에 생겨난 생각입니다. 1950년 천주교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무리한 주장을 펴며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가르침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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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정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의 ‘안식’(dormition) 축일로 지킵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잠들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신자는 모두 잠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쉴 뿐입니다.

정교회의 ‘성모 안식’ 이콘은 이 신학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아기 예수를 낳았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로 예수님 품 안에 안깁니다. 지상의 성모님이 천상에서 아기가 되고, 지상의 아기 예수님이 천상에서 마리아를 안은 ‘어머니’가 됩니다. 이 역전이야말로 성모 안식 축일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뒤바꾼다는 뜻입니다. 낮은 이들을 들어 올려서 하느님께 함께하도록 위치를 바꾸는 사건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가난하고 힘없는 종을 도우셨습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10일 치(↩)

복음의 기쁨을 향한 기대 – 교황의 한국 방문

August 14th, 2014

비 내리는 남도 땅. 비에 갇혀 빗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휴가 차 이십 여 년 만에 다시 들른 남도 기행 일정을 다듬으며, 천주교 교황 한국 방문 생중계를 본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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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참 훌륭한 분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줄 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이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향할 때, 그의 입이 권세 부리는 자를 향해 비판을 토로할 때, 그것이 복음의 정신에 따른 언행일 때, 그는 참된 권위를 얻는다. 참된 권위에 따른 권력은 ‘함께하며 보호하는 권력’이다.

한편, 그의 한국 방문(사목적 방문)에 관한 사람의 기대는 참 크다. 한국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언행에 따라, 세계 최대 종교 지도자, 그것도 중앙집권적 조직의 지도자가 던지는 발언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교황의 관심과 발언에 기대하는 바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그는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정치적 ‘힘’에 대한 기대의 방향은 대체로 동상이몽이다. 정부는 교황을 국빈 이상의 예우를 갖춰 환대한다.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니 국빈 자격을 받을 만하다. 이번 방문이 ‘사목적 방문’이라 하더라도 국빈 자격을 잃지 않는다. 정부는 오히려 국빈이 다른 목적으로 온다고 해서, 통상적인 국빈 예우 이상으로 대접할 여유까지 얻은 듯하다. 대통령 박씨가 서울공항까지 영접을 나간 것이 그 예이다. 공교롭게도, 80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을 방문하러 공항까지 나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이다. (이들의 집권 시절에만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다.) 이 영접에는 독재의 피가 흐르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참으로 인간적인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교황이 지난 1년 반 동안 보여준 행보에서 나온 기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세월호의 비극과 관련하여 ‘교황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으면 한다’고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해할 만하고 정말 그래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그 기대가 그의 대중적 인기와 그가 지닌 권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가 그런 기대에 따라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교황이 세월호 가족이 단식하는 곳에 그저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상징적인 영향력이 될 것이다.

이미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에 관하여 여러 염려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나왔다. 장애인 방문을 위한 단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고, ‘태아 동산’ 방문이라는 천주교 교리의 상징적 시위도 마련됐다. 그가 검소하게 작은 한국산 차를 탄다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체로 헬리콥터로 이동한다고 한다. (추고: 이 계획을 뒤로 미루고 실제로는 KTX로 이동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정작 기대와 희망과 염려가 겹치는 부분은, 교황 방문으로 한국 천주교와 천주교인들이 실제로 어떤 도전과 변화를 가질까 하는 점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천주교의 성장은 놀랍다. 그러나 천주교 예수회 박문수 신부님의 지적대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천주교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 천주교가 하나의 ‘중산층 이상 계층을 위한 문화적 상징 권력’으로 작동하려 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처지와 활동은 이래저래 위축되는 현실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어떤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을 사제로도 바라보지 않는다고 듣는다.

여전히 교황 방한의 초점은 어떤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향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확인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약한 자를 편드는 ’하느님의 당파성’을 확인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서라야 참다운 화해와 평화가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 점에서 형제교회의 보잘것없는 사제로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의 한 작은 형제로서, 그리고 불의와 불신과 분열이 가득한 가련한 한국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한다. 그가 보여줄 복음적인 도전을 기대한다. 거기서 우리 모두 나누는 “복음의 기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