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테리 이글턴

역자 주: 이미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얻은 테리 이글턴이 최근에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를 펴냈다. 그 책 전체를 살피기 전에, 미국 천주교의 진보적인 잡지 Commonweal 에 실린 이글턴의 <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아직 늦지 않은 질문>을 접했다. 출간된 책과 비교하니 1장의 부분을 순서를 조금 재편집하여 실은 것이다. 이 글을 거의 같은 때에 접한 @lightfaraway 님과 함께 번역하기로 했다. 알아보니 한국에서는 그 책 전체가 번역될 것이 확실하단다. 오히려 안심이다. @lightfarway 님이나 내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번역의 허점이 많을 테니 말이다. 다만, 전문가의 전체 번역이 나오기까지 맛뵈기가 되었으면 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린다. @lightfarway 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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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옳았는가? 아직 늦지 않은 질문

테리 이글턴

35년 전만 해도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은 마르크시즘에 기꺼이 귀 기울이려 했다. 겨우 10년이 지나자 마르크시즘은 신봉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거의 모두가 동의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변했을까? 어떤 새로운 발견으로 마르크시즘 이론의 오류가 입증된 것일까? 마르크시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더는 관심이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문제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사실 문제의 그 시기에 무언가 일어나긴 했다. 1970년대 중반 이래로 서구의 체제는 몇몇 중대한 변화들을 겪었다. 전통적인 제조 산업에서 상업주의, 커뮤니케이션, 정보 기술, 서비스 산업과 같은 “탈-산업적” 문화로 바뀐 것이다. 소규모, 탈중심적, 다목적, 비위계적 기업들이 유행했다. 시장의 규제는 철폐되었으며, 노동계급 운동은 야만적인 법적-정치적 공격에 내몰렸다. 지역적, 젠더, 인종적 정체성은 더욱 꾸준히 성장했지만, 전통적인 계급 충성도는 약해졌다.

새로운 정보 기술은 이 체제의 세계화가 증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줌의 초국적 주식회사들은 가장 손쉬운 이윤을 추구하면서 전 지구를 가로질러 생산과 투자를 분배했다. 상당수의 제조공장은 “저개발” 세계의 저임금 지역을 외주처로 삼았다. 이로써 일부 편협한 생각을 하는 서구인들은 중공업이 지구 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전 지구적 이동에 뒤이어 대규모 국제적 노동 이주가 따랐다. 그와 더불어 빈곤한 이민자들이 더 나은 경제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부활했다. “주변부” 국가들이 저임금 노동, 사유화된 시설들, 삭감된 복지, 초현실적으로 불평등한 무역 조건에 얽매여 있었다면, 메트로폴리탄 국가의 수염을 기르신 사장님들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고, 사원들의 정신적 웰빙에 조바심내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본주의 체제가 태평스럽고 경기가 활황이었기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공격적인 형태가 그렇듯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호전적인 자세는 깊은 불안감에서 유래했다. 만일 체제가 광기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잠재적으로 침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후 호황이 갑작스럽게 쇠퇴했기 때문에 이러한 재구성이 추동된 것이다. 국제적인 경쟁이 강화됨으로써 이윤율은 강제로 낮춰지고 투자원은 말라붙고 성장률도 둔화했다. 사회민주주의마저도 이제 너무 급진적이고 값비싼 정치적 선택지가 되었다. 따라서 무대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를 위해 마련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제조업을 해체하고,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시장이 멋대로 놀아나게 내버려 두었으며, 국가의 억압적 힘을 강화했고, 벌거벗은 욕심으로 알려진 새로운 사회철학을 옹호하도록 도왔다. 제조업에서 서비스, 금융, 커뮤니케이션 산업으로 투자처를 옮긴 것은, 나쁜 구세계에서 뛰쳐나와 놀라운 신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 위기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70-80년대에 대부분의 급진주의자가 그 체제에 대해 생각을 바꾼 것은 단순히 방적공장의 수가 줄어들었던 탓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들이 자신의 구레나룻과 머리띠를 마르크시즘과 함께 내팽개치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직면한 체제가 너무나 깨부수기 어려운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가능성에 대한 탈환상이었고, 이는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만일 체제가 변할 수 없다면, 변할 필요 또한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침울함을 합리화한 전직 사회주의자들이 확실히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인 것으로 판명된 대안에 대한 신념의 부재였다. 노동계급 운동이 그토록 얻어터지고 피를 보았기 때문에, 또한 정치적 좌파가 그토록 강하게 뒤로 밀려났기 때문에, 미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좌파에게는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이 이 환멸을 깊어지도록 했다. 근대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급진적 조류 – 혁명적 민족주의 – 가 이 시기 상당히 쇠약했었다는 지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위 거대 서사의 파멸과, 승리에 도취한 <<역사의 종말>>의 등장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야기한 것은 무엇보다 미래가 이제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을 불신하게 도운 것은 무엇보다 서서히 다가오는 정치적 무기력감이었다. 변화가 의제에서 벗어나 보이면, 무엇보다도 신념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도, 그 변화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명백히 불가피한 것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 불가피한 것이 얼마나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 심약한 이들이 그 이후 20년 동안 자신의 옛 관점을 고수했었더라면, 너무나 의기양양하고 난공불락이던 자본주의가 2008년에는 단지 현금 인출기만 열어두고 있는 처지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파나마 운하 남쪽 전 대륙이 결정적으로 정치적 좌파로 이행한 것을 볼 수도 있었을 테다. <<역사의 종말>>은 당시 끝났다. 어떤 경우든, 마르크시스트들은 지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은 이보다 더 큰 파국을 알고 있었다. 정치적 승산은 언제나 권력을 쥔 체제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많은 탱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의 강력한 전망과 활기 넘치는 희망은 이런 침체국면을 그 시대의 생존자들이 삼켜야 할 특별 처방 약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지점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마르크시즘의 실현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사태는 정확히 그 반대다. 사실 그 체제가 지속하는 한 마르크시즘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물리쳤던 것이 또한 마르크시즘의 주장에 대한 일종의 신뢰를 가져다준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대결한 사회적 질서가 더 온화하거나 상냥하게 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난폭하고 극단적으로 되어 갔기 때문에, 마르크시즘은 주변부 사람들에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회 질서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비판을 어느 때보다 적절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 지구적 범위에서, 자본은 어느 때보다 더욱 [소수에] 집중되고 야욕에 가득 찼으며 노동 계급의 숫자는 실제로 더 늘어났다. 최상위 갑부들은 무장된 폐쇄적 공동체로 숨어들고 수십억의 슬럼 거주자들은 감시탑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냄새나는 가축우리에 사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것처럼, 부의 불평등이 극적으로 깊어졌다. 오늘날 멕시코 억만장자 한 사람의 소득은 가장 가난한 1천700만 명의 다른 멕시코인들의 수입과 맞먹는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대가는 – 적게 잡아도 수십억의 극빈층에게 – 엄청났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1년 현재 27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하루 2 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부족한 자원을 두고 핵무장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는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원의 고갈은 대체로 자본주의 그 자체가 초래한 결과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얻기만 한다면 그 어떤 반사회적인 행동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파멸한다는 뜻이다. 한 때 묵시론적 환상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뚜렷한 현실일 뿐이다. 전통적인 좌파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구호는 더할 나위 없이 무시무시하도록 적절한 표현이었으며 단순한 수사적 표현 이상이었다.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와는 별개로, 마르크시즘은 내부로부터 불신받지 않았던가? 마르크시즘은 러시아 혁명 이래 자칭 마르크스시트들을 서로 대적하며 흠집 내게 했던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역사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분명히 오늘날 마르크시스트라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나 프라하와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무자비한 탄압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여론 조작용 재판과 마오쩌둥의 노동수용소에 관해서도 대답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는 모두 형편없고 피비린내나는 실험이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에서 가장 혜택받아야 할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그 사상을 역겹게 만들어 버렸다. 마르크스는 스탈린과 마오가 직면한 경제적으로 빈곤한 조건들에서 사회주의가 달성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한 기획[사회주의]은 중세시대에 인터넷을 발명하는 것만큼이나 기이하게 뜬금없는 일을 요구한다. 만일 재편해야 할 부가 희소하고 소량이라면 그것을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재편하기는 불가능하다. 희소성[부족]이라는 조건에서는 사회 계급을 폐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기에 너무 불충분한 물적 잉여를 둘러싼 갈등이 금세 계급을 되살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언급했듯이, 그와 같은 조건에서 일어난 혁명의 결과는 “오래된 더러운 비즈니스”가 단순히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얻게 될 것이라곤 사회주의화한 희소성이다. 만일 자본을 다소 맨땅에서부터 축적할 필요가 있다면, 그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비록 잔혹하긴 하지만 이윤의 동기를 통하는 것이다. 열렬한 사리사욕은 놀랄만한 속도로 부를 쌓아 올릴 공산이 크다. 물론 그와 동시에 눈부신 빈곤을 축적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아주 낮은 단계로부터 경제를 쌓아 올리는 일은 등골 빠지도록 힘들고 의기소침하게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경제 건설에 뒤따르는 역경에 기꺼이 동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사회주의] 기획이 민주적 통제 아래서, 그리고 사회주의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어서 점진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권위주의적 국가가 개입하고 시민이 자발적으로 하기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볼셰비키 러시아에서 노동의 군사화가 적절한 사례이다. 그 결과는 소름 끼치도록 역설적이다. 사회주의적 경제 토대를 구축하려는 바로 그 시도를 통해서 사회주의의 정치적 상부구조(대중적 민주주의, 진정한 자치)가 약해져 버린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적인 자원이 없이는 스탈린주의라 알려진 괴물 같은 모양으로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볼셰비키 혁명은 반혁명과 도시의 기근, 피비린내나는 내전으로 위협당했을 뿐만 아니라, 곧 제국주의적 서구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협소한 자본주의적 토대, 처참히 낮은 수준의 물적 생산, 시민 사회 제도의 빈약한 내력, 대량으로 죽어나가고 탈진한 노동 계급, 농민 반란, 차르 체제에 맞먹는 관료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혁명은 거의 시작부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총구를 들이대고 그 굶주리며 낙담하고 전쟁에 지친 인민들을 근대화로 밀고 나가야 했다.

마르크스 자신은 경직된 도그마, 군사적 테러, 정치적 억압, 그리고 전제적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자였다. 그는 정치적 대변자들이 그들의 유권자들에 대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가주의적 정치를 혹평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와 시민적 자유를 고집했으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강제로 형성되는 것(그의 경우는 러시아보다는 영국에서)에 진저리를 쳤고, 농촌 지역의 공동 소유는 강요보다는 자발적인 과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빈곤에 시달리는 조건에서는 사회주의가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았던 사람으로서 마르크스는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상실되고 말았는지를 짐작했을 것이다.

상상해 보자. 정신이 약간 나간 자본가 집단이 있다. 이들이 전근대적인 어떤 부족을 초현실적인 단기 속성 훈련을 통해서 PR과 자유 시장 경제학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서 무정하리 만큼 소유욕이 강하고 기술적으로 세련된 일련의 사업가로 만든다고 치자. 그 실험이 성공적이지 않으리라는 거의 확실한 사실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양자 물리학의 어떤 까다로운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걸스카우트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은 토마스 제퍼슨부터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강력한 자유주의적 유산이 모슬렘을 고문하러 만든 CIA 비밀 감옥의 존재 때문에 폐기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런 감옥이 오늘날 자유 사회의 정치 일부분을 이룬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마르크시즘에 대한 비판자들은 여론조작용 재판과 대중 공포가 마르크시즘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다른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풍요로운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하더라도, 시장이 없이 어떻게 복잡한 현대 경제를 운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마르크시스트들의 수가 더 늘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서 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사회가 소유하고, 자치적인 협동조합들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어떤 미래를 계획한다. 이런 방식으로 시장의 몇몇 약점은 털어버리면서도 그 장점은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 기업의 수준에서는 협동이 효율 향상을 보장할 것이다. 증거에 따르면 협동은 거의 언제나 자본주의적 사업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경제 전체의 수준에서 경쟁은 전통적 스탈린주의의 문제점, 즉 중앙 계획에서 비롯된, 정보, 할당, 동기 부여 등과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시장 사회주의는 경제 권력을 실제 생산자의 손에 둔다. 이것으로 사회 계급과 착취를 없앤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와 비교하면 환영할 만한 진전이다. 그러나 어떤 마르크시스트들이 보기에 시장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입맛에 맞는 내용을 너무 많이 보존한다. 시장 사회주의 아래서는 여전히 상품 생산, 불평등, 실업,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시장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은 집단적인 자본가로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자본가는 그 지속적인 축적이라는 추구하며 이윤을 극대화하고, 질을 저하하며, 사회적 필요를 무시하고 소비주의를 부추기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시장의 만성적인 단기 실적주의, 전체적인 사회적 현실에 대한 무시 관행, 그리고 그 단편적인 결정에 따른 장기적인 반사회적 효과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과 국가의 감시가 이런 위험을 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마르크시스트는 그 대신에 중앙 계획도 시장 지배도 아닌 경제 체제를 생각한다. 이 모델에서는 자원이 생산자, 소비자, 환경론자, 그리고 다른 적절한 모임 간의 타협으로 배분된다. 작업장과 이웃, 소비자 위원회의 네트워크 안에서 말이다. 자원의 전체적인 분배에 대한 결정, 성장과 투자의 비율, 에너지, 교통, 그리고 환경 정책을 포함한 이러한 경제 체제의 변수는 지역과 지방, 그리고 국가 차원의 대표 의회가 설정한다. 그런 다음, 분배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결정은 지방과 지역 차원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좀 더 자세한 계획이 점진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각 단계에서 대안적 경제 계획과 정책에 대한 공공의 토론은 필수적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병원을 더 지어야 하는지, 아니면 아침 식사용 시리얼을 더 만들어 내야 하는지를 결정한 권한이 우리에게 없다. 사회주의 아래서는 이러한 자유를 일정하게 수행할 수 있다.

이른바 참여 경제학의 어떤 옹호자들은 혼합된 형태의 사회주의 경제를 받아들인다. 즉 공동체에 필수적인 상품(식품, 건강, 제약, 교육, 교통, 에너지, 생계 관련 제품, 금융 기구, 미디어 따위)은 민주적인 공적 통제에 아래 놓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런 상품 재화를 운영하는 이들은 큰 이익을 얻을 기회만 생길라 치면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필요성이 덜한 상품(소비 품목, 사치 상품)은 시장의 작동에 맡겨 두어도 된다는 것이다. 어떤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전체 기획이 너무 복잡해서 작동하기 어렵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의 문제는 너무나 많은 그늘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체제라는 바퀴에 윤활유를 치는 과정에서 적어도 현대 정보 기술의 역할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프록터-갬블 기업(미국의 대표적인 재화 생산 그룹 – 역자 주)의 전직 부사장마저도 정보 기술이 노동자의 자기 관리를 진정 가능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와 경제 계획>>에서 팻 드바인은 자본주의적 관리와 조직에 지금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지를 되새겨 준다. 사회주의적 대안이 사용하는 시간이 이보다 더 커야 할 명백한 이유는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포스트-자본주의 경제의 세부 사항에 대한 주장을 계속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흠 없는 모델이라고 제공할 만한 것은 없다. 어떤 이는 이러한 불완전함을 자본주의 경제와 비교하며, 자본주의야말로 흠 없이 작동 중이라며, 미미한 가난과 소비, 침체 등에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다소 엉뚱한 실업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더라도, 세계를 이끄는 자본주의 국가는 이 결함을 해결한 독창적인 방법이 제공하리라 볼 것이다. 오늘 미국에는 감옥에 갇힌 이를 빼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다.

부와 권력의 스펙타클한 불평등, 제국주의적 전쟁, 심각해진 착취, 억압적 국가의 증진.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지난 2세기 동안 마르크시즘이 행동하고 성찰해왔던 문제들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르크시즘이 현재 상황에 어떤 가르침을 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나라 영국에서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도시 노동 계급으로 변화되는 폭력적 과정에 특별히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과정이 오늘날까지 브라질,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인도에서 생생히 진행 중이다. 가디언지 기고문에서 트리스트람 헌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Planet of Slums)는 오늘날 라고스 혹은 다카에서 발견되는 슬럼, 즉 “냄새나는 똥 덩어리 산”에 대한 기록으로, 엥겔스가 쓴 <<노동 계급의 조건>>의 개정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헌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어가는 지금 “광뚱과 상하이의 특별 경제구는 1840년대 맨체스터와 글래스고우를 생각나게 한다.”

마르크시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퇴물이라면 어쩔 텐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면, 마르크스는 그 체제가 이미 기력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 절정기에 사회적 발전을 다 이루어버려서 그 체제 자체가 방해물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 근대성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든, 마르크스는 그 사회에 환상과 물신숭배, 신화와 우상숭배가 넘쳐난다고 보았다. 바로 그 계몽 – 체제 자체의 우월한 합리성에 대한 자기 만족적인 신앙 – 자체가 미신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 체제가 어떤 놀랄만한 진보를 가능하게 할 능력이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도 매우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한계는 자본 자체이다. 즉 탈선하지 않도록 그 앞에 계속해서 만들어야 할 지속적인 자본 자체의 재생산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체제 가운데서도 가장 역동적인 이 체제에는 기이하도록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어떤 것이 있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물질적 개선을 이뤄냈다. 우리 삶을 구획하는 이런 방식이 인간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오랫동안 선전했다. 그러나 그에 다다랐다고 볼 여지가 전혀 없다. 상품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준비하고 기다릴 것인가? 이런 생산 양식으로 만들어내는 엄청난 부가 종내에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지리라는 신화에 언제까지 탐닉할 텐가? 세계는 극좌파의 주장을 상냥하게 기다려 보자는 식으로 대할까?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 늘 거대한 불의가 계속될 것이라 인정하면서도 다른 대안적 체제는 더 힘들고 더 나쁘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파는 모든 것이 종내에 잘 될 것이라고 설교하는 이들보다는 자신들이 당면한 힘든 길에 대해서 솔직하다.

마르크시스트는 마르크시스트임을 그만두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다. 이 관점에서 마르크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불교 신자나 억만장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마치 수련의가 되는 것과 같다. 수련의는 환자들을 치료하여 환자들이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일을 한다. 예상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저지하는 사람이다. 그처럼 정치적 급진주의자의 임무는 그들의 목적이 완성될 때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 뒤에 그들은 자유롭게 작별을 고하며, 가지고 있던 체 게바라 포스터를 불태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쳐 두었던 첼로를 다시 집어 들고, 아시아적 생산 양식보다 훨씬 재밌는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마르크시즘은 스스로 모질도록 임시적인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마르크시즘 안에 던지는 사람은 이 점을 놓친다. 마르크시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 이것이 마르크시즘의 전체 핵심이다.

다만, 어떤 점에서 매혹적인 이 전망에는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지금까지 가장 엄밀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그 활동을 계속하는 한, 마르크시즘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시즘은 그 적을 폐기함으로써만 자신을 폐기할 수 있다. 최근의 모습을 볼 때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한 힘을 드러냈다.

오늘날 마르크시즘을 비판하는 이들 대부분은 핵심을 논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은 마르크스 시대 이후로 자본주의 체제가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생각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가 도전했던 체제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이점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자본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에 대한 개념, 즉 중상주의, 토지 균등 분할론, 산업주의, 독점, 금융, 제국주의 등에 관련해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 빚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의 형태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런 변화를 그 체제의 본질로 보는 이론을 믿지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되겠는가?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자 계급의 퇴락과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를 예상했다. 그는 또 이른바 세계화라 것도 예견했다. 케케묵은 옛것이라 여겨지는 사람의 생각이라 하기에는 얼마나 이상한가? 어떤 점에서 마르크스의 “케케묵은 옛” 특징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의 생각은 적절하다. 빅토리아 시대 수준의 불평등으로 급격히 되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마르크스를 퇴물이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 Was Marx Right? It’s Not Too Late To Ask by Terry Eagleton
번역: @lightfarway & @viamedia

6 Responses to “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테리 이글턴”

  1. 아거 Says:

    여전히 유효하다는 개론이야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줄곧 주장해온 것이지만, “마르크시스트임을 그만두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대목이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번역해주신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Reply]

    fr. joo Reply:

    아거 / 예, 바로 그 대목의 ‘울림’ 때문에 무모한 번역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 @lightfaraway 님이 애를 많이 써 주셨어요.

    [Reply]

  2. foog Says:

    좋은 글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북마크해두고 틈나는 대로 자세히 읽어봐야겠네요.

    [Reply]

  3. 민노씨 Says:

    이제야 이 좋은 번역글을 읽네요…
    아거님 말씀처럼 “마르크시스트는 마르크시스트임을 그만두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다. (…) 마르크시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 이것이 마르크시즘의 전체 핵심이다.” 이 문단은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Reply]

  4.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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