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샤이보의 죽음

1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테리 샤이보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한 개인의 안타까운 죽음이 가족을 둘러싼 갈등을 넘어 미국 전역에서 찬반 논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백악관과 바티칸까지 가세한 “살 권리”와 “죽을 권리”의 대립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나는 테리 샤이보가 지금 하느님과 있다고 믿고 있다.

성공회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안락사와 관련한 람베스 회의의 연구와 결의안 가운데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98년 람베스 회의 1부 1조14항

안락사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락사 법제화에 관련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란과 제안에 비추어, 본 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a)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본질적으로 존엄하며 중대하고 가치있는 것이라 천명한다.
(b) 안락사는 다른 사람이 고의적으로 말기 환자 혹은 중환자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그 사람을 죽게 하거나 죽도록 도움을 주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c) 그러므로 엄밀하게 정의한 바에 따라 안락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부합하지 않으며, 어떤 시민법에서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결의한다
(d) (본 회의는) 안락사를 다음과 같은 행위와는 구별한다. 즉 과도한 의료 요법이나 의료적인 중재를 보류하거나 철회, 혹은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부합하며 그 사람이 존엄을 유지하며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영구 식물인간 상태인 경우에 인위적인 영양과 수분 공급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의료적인 중재라고 볼 수 있다.

이 말로만 보자면, 테리 샤이보의 경우는 “과도한 의료 요법이나 의료적인 중재”에 의한 생명 연장에 해당하므로 안락사와는 달리 의료적 도움을 중지하여 존엄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인 문서가 하나의 지침은 될지언정 죽음 자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인간의 복잡하고 깊은 심정을 담아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을 자임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죽음 자체로서 세상의 종말이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만이 겨우 눈물을 훔치며 이겨내고 견뎌야 하는 무게로 평생 남을 것이다.

그러니 이를 둘러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논쟁, 하릴없이 스러져가야 하는 안타까운 생명에 대한 동정과 북받치는 감정이 어떤 찬반 논쟁을 일으키건 그 경우엔 쉽게 어느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세상은, 정확히 말해서 정치는 이런 순수한 동정심과 감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세계의 악동 조지 부시를 재선시키고 미국우향우를 선도하고 있는 우파 종교인들(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의 비열한 속셈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시는 이른바 ‘리버럴’을 때려 눕힐 수 있는 호기를 낚아채고 있기 때문이다. 미네소타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으로 10여명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도 부시는 3일 만에 성명서 한 장을 휴가 중에 냈다. 그러나 테리 샤이보의 경우에 대해서는 “생명의 문화”를 외치며 급히 휴가에서 돌아왔다. 팻 로버슨과 제리 팔웰 같은 극우기독교인들에 대한 보상일까?

수십 만 명의 시민을 죽이고 있는 이라크 전쟁의 당사자가, 그리고 텍사스 주지사 시절 그토록 많은 사형 집행 결정에 배서하고, 심지어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 대해서 의료진이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법제화한 그가 대통령이 되어 갑작스레 들고 나온 이 “생명의 문화”라는 기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지난 3월 14일 텍사스에서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나 생후 6개월 만에 의료진의 치료 거부로 죽게 됐던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한 어머니는 이 “생명의 문화” 그 어디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까? “의료진은 6개월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그 어머니의 한스러운 외침은 부시가 통과시킨 텍사스 의료법을 쥔 의사들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메시지의 내용이 어떠하든, 내건 기치가 어떠하든 늘 문제는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느냐가 식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존엄성’을 두고 일었던 논란을 극우적인 정치 이해의 틀로 조작해 내려한 사악한 ‘위선’의 그림자 뒤에 숨은 진상을 살펴야 한다. 생명과 죽음을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과 신비 안에서, 우리의 희망은 희망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투명하게 느낄 수 있기 위해서.

3 Responses to “테리 샤이보의 죽음”

  1. 설윤정 Says:

    업어갑니다. 주낙현 신부님. 블로그의 팬이면서도, 이제야 글을 남기는 절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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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루시안 Says:

    낙태 및 안락사를 반대하며 생명존중을 부르짖는 분들이 또한 시민들의 총기 보유를 옹호하는 분들이 아니신가요? 일견 상반되는 듯한 이 두가지 태도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미국 WASP의 Old Time Religion과 가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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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r. joo Says:

    설윤정님// 용서라니 무슨 말씀을…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보내신 편지에 답장을 드렸는데, 감감 무소식… 스팸으로 처리됐나요? ^^;

    루시안님// WASP (백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에만 한정되지는 않고, 이제는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인들은 신구교를 초월해서 제법 에큐메니칼한(^^) 전선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시절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정치적 이익 관계에 의해 조종되는 면이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하고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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