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난쟁이와 거인의 관계

아래 글에서 “전통”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늘 양면적이지만, 사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참 많다. 그것은 마치 정교회 어느 아이콘처럼,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 있다.” 다시 봐도 참 밋밋한 표현이다.

사실 전통에 대한 내 태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정확한 인용이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표현하고 말았다. 아마 십 수년 전 대학원 교회사 세미나에서 읽었을 어느 인용구였다. 종교개혁은 중세라는 거인에 무등탄 난쟁이라는 것이었는데, 오늘 그 기억을 되살려 그 말의 시작을 찾아보았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와 같아서,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좀더 명확한 시선을 가져서도 아니요, 실체에 더 가까워서가 아니라, 거인의 키를 빌려 너 높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 샤르트르 주교가 되었던 솔즈베리의 존 (John of Salisbury)이 당대 철학자였던 베르나르의 말을 인용해서 전해준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성공회 정신을 대표하는 이들에게서 반복 이용되거나 변주되었다. 성공회 사제요 시인이었던 조오지 허버트,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튼, 그리고 근대 성공회 정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문학비평가였던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그들이다.

조오지 허버트 George Herbert (1651):
“거인 어깨 위의 난쟁이는 그냥 난쟁이나 거인보다 멀리 본다.”

아이작 뉴튼 Isaac Newton (1676):
“내가 (그들보다) 좀더 멀리 볼 수 있는 까닭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828):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을 때, 난쟁이는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말맛이 그 처지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통에 대한 비판과 존중을 생생하게 잡아내는 장면이라고 본다. 실제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언자들과 복음사가들의 관계를 이런 거인과 난쟁이로 표현했다. 우리는 난쟁이일 뿐이다. 겸손과 감사로, 묵은 것 안에서 힘을 찾아 그것으로 새로운 것을 열어보라는 지혜이겠다.

신앙을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관계 속에서 식별하려는 성공회로서는 이런 태도에서 전통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난쟁이 때문인지 생각의 꼬리는 갑자기 발터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의 난쟁이로 이어진다. 물론 이 난쟁이들은 전혀 입장이 바뀌어 있다. 벤야민의 난쟁이는 베르나르의 거인이고, 베르나르의 난쟁이는 벤야민의 장기두는 자동기계이다. 하지만 같은 점은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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