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성공회 의장주교 캐서린 쇼리 취임 설교
성공회 사상 최초의 여성 관구장으로 선출된 미국 성공회의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The Most Rev. Katharine Jefferts Schori)의 의장 주교 취임식이 워싱턴 D.C.의 내셔널 캐시드럴에서 열렸다. 시간 차로 인해 이곳 성공회 신학교에서는 오전 8시에 웹캐스팅을 공동 시청할 계획까지 세웠다. 아, 오늘 아침의 분주한 일로 가지 못하고, 나중에야 웹캐스팅을 보려했지만, 끊임없는 버퍼링에 지쳐 버리고, 겨우 쇼리 주교의 설교만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언급했던 대로 하느님의 꿈과 비전 속에서 본 세상의 샬롬,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당장 번역해서라도 한국에 있는 분들과 나눠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번역해서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하느님이라는 고향을 향해 가는 여정 길에서 어떻게 함께 걸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꿈, 즉 샬롬의 전망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전언이라고 하겠다.
그가 제안하는 샬롬의 비전과 하느님을 함께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아래에 이어집니다.)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 (the Most Rev. Katharine Jefferts Schori, Presiding Bishop and Primate of the Episcopal Church)
2006년 11월 4일, 내셔널 캐시드럴, 워싱턴 D.C.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고향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네바다의 한 친구는 제가 그곳을 떠나기 직전, 제가 이제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 고향이 오레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6년을 네바다에서 보냈고, 네바다는 고향이 되었습니다. 네바다 주의 노래 한 대목은 “고향은 네바다라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곳은 각처온 사람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뿌리를 떠난 각지 각처의 사람들이 사막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도록 애쓰고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데스 모이네스, 아니면 앵커리지입니까? 대만 혹은 산 살바도르입니까? 아니면 포트 오 프린스입니까?
무엇이 고향을 만듭니까? 낯익은 풍경이나 삶의 모양새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부르는 여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향이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말 그대로 그것이 쉬지 않는 여행을 뜻하든,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어떤 분을 따르는 “길”이라는 의미의 “호도스”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는 고향은 창조자와, 구원자와, 그리고 성령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 성인이 “우리의 마음은 오 주님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까지 쉴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은 우리의 본질적인 고향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의 위대한 여정 이야기들은 에덴에 있는 우리의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있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 참으로 오랜 동안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런 다음 포로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을 시온 산에 끌어 모으는 고향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아시야는 그 산 위에 펼쳐지는 감사 축제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세계 모든 이들이 초대받습니다. 이 비전은 하나의 보편적인 고향, 곧 모든 이들을 위한 고향을 건설하라는 선교 사명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천상의 잔치를 시작하시고, 그것을 성육신하신 사건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기대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에 모여든 공동체 안에 있는 고향을 드러냅니다.
“어느 고용인의 죽음”(Death of the Hired Man)이라는 시집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향은 당신이 언제 어디든 그곳에 갔을 때, 당신을 받아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결점과 흠을 가지고 어떤 공동체에 들어갈 때, 우리를 받아주는 공동체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여전히 축하해줍니다. 이 같은 고향 찾기와 고향으로 돌아가기에 대한 비전은 우리의 깊은 영적인 갈망의 근간이 되며, 동시에 세례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얻게 된 숙제입니다. 다시 말해 고향으로 가서, 그 안에서 머물며, 지상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고향을 만들라는 숙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돌아온 탕자처럼 고향 집에 다시 환영을 받아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과 사명을 잘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히브리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샬롬”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평화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샬롬은 모든 이들이 식탁에 초대받게 되어 어느 누구도 배고픔을 안고 살아가지 않는 세계에 대한 풍성한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이 치유를 받아 더이상 어느 누구도 병들거나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을 펼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희생하는 대가로 자신의 풍요를 누리지 않는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즐기는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샬롬은 모든 인간들이 형제 자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비전이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모든 창조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양들이 사자들과 어울려 지내며,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넣고 장난치고, 죽음의 그림자가 더 이상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성서의 말씀이 듣는 너희들 안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시면서 가리키셨던 비전입니다. “샬롬”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처소를 깨닫는 것이며, 창조 세계의 모든 이들을 바로 다시 한번 하느님 안에 있는 고향으로 초대하고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든 하느님의 창조물들을 초대하며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전 지구적인 평화 만들기라는 사목 활동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환영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모든 이들을 이 축제에 초대하여 하느님의 풍성함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꿈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신앙의 조상들과 신비가들을 통하여, 인간의 몸으로 사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고 세례를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그 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을 초대하여,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창조의 사건 속에서 모든 상처들이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샬롬이라는 고향 찾기는 목적이자 여정이기도 합니다. 어디로 향할 지에 대한 비전이 없이 우리는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장소들을 고향으로 보면서, 이 지구 상의 모든 창조물들과 참된 길을 따라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세계가 좋은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고향에 다다를 수도, 샬롬을 향유할 수도 없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극빈자들과, 잊혀 지고 무시당하는 우리 여정의 동반자들을 위하여, 쫓겨난 이들, 위기에 처한 이들, 인생의 쉼없는 바다에 힘없이 떠다니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새천년 발전의 목표]라는 프로젝트 안에 새겨진 샬롬의 비전을 통해서 이러한 커다란 꿈들을 실천할 것이라 말해 왔습니다. 그 목표는 세계의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고, 병든 이들을 치료하고, 젊은 이들을 교육하며, 여성과 남성을 평등하게 대하고, 모든 이들이 깨끗한 물을 얻고, 정결한 위생 시설을 접할 수 있도록 하며,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하며, 창조 세계의 많은 이들이 더이상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성한 삶에 대한 비전은 우리 시대 안에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각자 이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고향 찾기에 대한 하느님의 꿈입니다.
우리가 샬롬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이웃의 건강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건강과 온전함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 어느 누구도 참되고 완벽한 존엄을 향유할 수 없습니다. 에페소서 기자는 평화의 연대 속에서 성령의 일치를 유지하라고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샬롬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와 희망입니다.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샬롬을 누리지 못하며 우리는 하나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들은 이 하느님의 꿈, 이 하느님의 말씀은 지금 이것을 실현하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건강은, 넒은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 사명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보다 온전하고 거룩한 삶의 상태도 이끌어 내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최근의 결정들 때문에 어떤 이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느낀다면, 우리의 구원과 한 몸으로 우리의 건강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것이며, 치유와 온전함을 찾는 일이 우리 모두의 의무가 됩니다. 어린이들이 길 거리에서 살아가는 한, 노인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돈이 없이 살아가는 한, 산업 폐기물들로 사람들이 병들어가는 한, 우리가 말하는 몸은 고통을 당하며, 우리 어느 누구도 고향에 다다랐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샬롬을 향한 지치지 않는 추구에서 우리를 떼어 놓는 것일까요? 여기엔 아마도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고,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무정함과 두려움입니다. 무정함이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알아보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행동을 위한 용기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를 위한 치료는 깊고 변함없는 희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오히려 속박하려는 것을 묶어 두고, 두려움을 잡아 두셨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해방과 번영을 위한 것입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의 포로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모하리 만치 단호한 희망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문을 가차없이 포격하는 희망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꿈이 죽음을 완전히 집어 삼킬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오늘 성서의 말씀이 이 말을 듣는 이들에게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용기있게 동참하는 희망입니다.
이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을 경멸하는 이들 – 이들 역시 신앙심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 과 평화를 이루려는 의지 속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빈곤을 지나간 역사로 만들려는 우리의 도전과 용기 속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에이즈 퇴치를 위해 모금하고, 말라리아 모기를 방지하는 모기장을 공급하고, 모든 어린이들이 기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일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곳에 심으시는 꿈을 가로막은 어두운 세력에 전심을 다하여 대항하는 일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넘어 서서, 서로를 고향으로 부를 때마다 그 성서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성서의 말씀은 크고 작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개인의 행동과 국민 전체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일들을 찾아 나설 때, 우리의 고향 찾기는 바로 이러한 행동 안에서 그 끝을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누리도록 합시다. 회복된 창조 세계와 올바르게 회복된 관계의 비전 속에서 기뻐 뛰는 모든 생명의 군집들과 바다 생물들, 지상 생명체들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참여합시다.
성서의 말씀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 안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샬롬, 하베림,” 샬롬, 나의 친구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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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청중들은 그들의 새로운 의장 주교에게 “샬롬”으로 대답했다.
September 25th, 2007 at 5:4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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