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 헝그리하게 살기!

누군가와 이야기던 참에 최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을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의아했다. 어릴 적 권투 중계에 잘 나오던 흥분된 아나운서의 논평에 등장했고 라면으로 끼니 때운 소녀 달리기 선수의 아픔에도 뭍어나오던 말이 왜 여기서?

더 낮아질 것 없는 극단의 상황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오기와 집념을 뜻하는 말이었을테니 그럴 법도 하게 들렸다. 특히나 우리 사회의 진보 세력에 대한 아쉬움 섞인 조소에서 나왔으니 더욱 그리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다르게는 아마도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이 정도로 살게 된 걸로 감사하며 서로 보살피면서 살자는 기억의 다짐으로도 풀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리 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애초부터 헝그리 정신이란게 문제가 아닐까? 헝그리 정신은 끝간데를 모르는 성취와 달성의 욕망의 불쏘시개가 되고, 그런 욕망의 결과를 포장하는 말이 된다. 실상 헝그리 정신으로 만들어낼 만한 어떤 성취 가능성은 예전보다 훨씬 좁아졌다. 헝그리와 부(富)는 대물림되고, 세습하기 때문이다. 이 쯤해서 이 정신은 실패한 사람을 계속 주눅들게 하고, 이른바 성공한 사람을 영웅시하여 정당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여기에 물들어 있거나 물들고 싶어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우리나라 여의도 한 복판에 있다. 그 교회는 애초에 헝그리한 사람들과 그 정신으로 일어섰다. 일단 배고픔을 벗어나면 과거사를 묻어버리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다. 과거는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포장되고, 기억은 이제 망각이어야 한다. 소망이 이루어진 뒤에 남는 것은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강남의 어느 교회는 그래서 욕망 교회가 적절한 이름이다. 욕망의 불도저인 프레지던트와 그 끄나풀들이 같은 교회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욕망과 욕심의 제조공장 혹은 증폭 훈련소가 되었고, 여전히 되고 싶어 한다.

현재의 지구 상황에서 볼 때 헝그리 정신은 생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이상 낭만이 아니다. 이미 편만한 욕망의 경쟁 속에서 그 비인간적고 비윤리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 세습제 역시 과거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짐할 일은 ‘헝그리하게 살기’인지 모른다. 그래야 속도를 좀 늦출 수 있겠다. 그래야 여유를 가져 볼 수 있겠다. 그래야 생각하면서 살 수 있겠다. 여전히 문제는 그렇게 살면서 절대적인 자본의 힘과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여기에 유혹이 따라 붙는다. 돈을 벌어서 혹은 권력을 가져서 이겨보자는.

강제된 가난과 싸우며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일이 함께 하지 않을 때, 이 유혹은 금새 우리를 삼킨다.

7 Responses to “헝그리 정신? 헝그리하게 살기!”

  1. GatorLog Says:

    소망과 욕망…

    소망이 이루어진 뒤에 남는 것은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강남의 어느 교회는 그래서 욕망 교회가 적절한 이름이다. 욕망의 불도저인 프레지던트와 그 끄나풀들이 같은 교회 출신인 것은 우연…

  2. LRA Says:

    저는 성공회신자입니다. 오해가 없으셨길 바랍니다. 너무 애교스럽게 쓰면 닭살이 돋아서…늘 .. 입니다…네요.

    최근 젊은사람들(? .-.- 저도 젊은 축인지 모르겠네요) 목적달성만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마냥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겪은 일로 인해, 다시 성경을 찾았습니다. 한동안 하느님과의 대화를 단절했다가 다시 그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성경말씀 中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주님’이라는 의미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을 베풀고 용서를 베푸신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불의한 것들에 대해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불의를 대해 철저하게 항거하며 투쟁하신 공의로운 분이었다.

    서른 살 정도의 젊은 예수님께서는 당시 연로하고 권위있는 인물로 인정되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에 앞서 세례요한도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하며 쫓아내던 사실을 기억한다.

    ———-

    저도 무조건 용서만이 답인 줄 알았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받아들이지 못 하겠는 것’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란 잣대하에 늘 후자를 택하곤 했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방관하는 것..똥이 더러워 피한다’가 되겠네요.

    저보다 나이가 적어도 때론 제가 동생같이 굴어도 선배처럼 안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많은 점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분들에 대해서도 잘못을 지적하면 불응하지 않고 응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기억 하나하나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더군요.

    이전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높혀세우는 것에 고개 숙이는 법에 대해 익숙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니, 자신을 숨기고 고개숙일수록 훨씬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경말씀의 내용 또한 옳습니다. 어느 선배님이 그러시더군요. 아무리 상사가 뭐라해도, 너의 주장을 관철시켜야 할 때에는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고요. 성깔 있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요, 때로는…

    반대로 ‘용서하는 것’또한 옳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술’이 받쳐줬을 때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요.

    정말 살다보면 죽어버렸으면 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누구나 그럴 것 같아요. 외계인이 아닌 이상.

    왜 자신을 위해, 남에 대한 용서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건 상대에 대한 증오와 보복심을 떨쳐버리기 위함이죠. 증오하게 되면 보복하게 되고 결과는 원하지 않는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변해가는 자신을 막기 위함인 거죠. 자신이 변해갈 때 두려움을 자각하여, 먼저 미안하다 말하는 건 열등감이 아닌 자기제어능력 신호인 것인 걸요. 작은 기억 하나가 제어기능을 한단계 당겨놓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배움의 시각을 늘 열어두어야 하죠. ‘먼저 미안하다 말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기본(기준 내지는 신념)이 없는 밑바닥부터 현장경험을 쌓는 건 그저 독단적인 기준입니다. 그래서 ‘교양’이 필요한 것 같아요.

    최근 일로 인해, 전 실수를 했고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이어린 녀석은 전혀 자신의 잘못도 모르는데다가, 용서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불량했습니다. 그 녀석 나이라면 장가들 나이이기도 한데 말이지요. 뭐, 저라고 유치한 실수를 안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상대가 끝까지 오만하게 군다면, 그저 용서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시간이 지나서도 스스로 자기반성이 없다면,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사건에 의해서 크게 좌절을 맛볼 날이 꼭 오더군요. 그럴 수 밖에 없더라구요. 사람이기에… 저주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자기반성없는 사람은 그렇게 되더라구요.

    이젠 알것 같아요. 왜 범죄자들이 개선활동을 통해서 출소후에 자신이 겪었던 과거경험을 토대로 ‘교육원’과 같은 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이전의 불량했던 삶보다 더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지를요. 위선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결국, 응징의 대가를 치뤄주었지만,^^… 그다지 맘이 편친 않았는데, 성경말씀을 보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 좋은 거 같아요. 그리고 예수님은 무척 솔직한 성격에 유치한 적도 있고 의젓했던 적도 있으신 거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한동안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선물’받았습니다. 다시말해, ‘위기’를 통해 ‘신뢰’를 확인받았다는 것이지요. 다시 하늘이 저를 향해 미소짓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의 신호탄’처럼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아요.

    이전에 하버드에 관한 스페셜방송을 봤는데, 그때 어느 한인유학생이 이런 말을 했었어요. ‘이렇게 좋은 대학에 명문대학에 들어온다는 것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함, 명예를 추구하고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기 위함’이라고요. ‘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곳의 총장(?)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최고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열정을 불살라 보는 것도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요. 동의합니다.

    제 시야에선,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최종목적은…’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기 위함’입니다. 종교인들의 사목의 궁극적인 목적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아요. 어느 봉사자가 한 말인데, ‘나의 행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여서 자신의 봉사에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고요.

    요즘 플라이투더스카이의 ‘세상끝에서의 시작’ 좋네요. ^^
    언제 시간되시면 한번 들어보세요. 음악이란 이래서 좋은 건가봐요.
    마음의 호랑이연고같은 모 신부님 다음으로 대화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은 너무 바쁘셔서 대화할 틈을 안 주시던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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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77ila Says:

    안녕하세요? 그때 아거님 오셨을 때 뵙고 잘 못뵈었네요… 수동으로 트랙백 하나 날립니다 (블로그 바꿨습니다).

    http://blog.lawfully.kr/2008/4/30/televange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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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fr. joo Says:

    LRA / 다시 찾아 주시니 반갑습니다. “성공회 신자”와 “오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제가 오해한 게 있나요? ㅎㅎ

    어떤 경로로든 “마음을 열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 열림 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채워지는 생활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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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fr. joo Says:

    a77ila /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저도 종종 들르곤 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블로깅의 다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링크 타고 들어간 글을 통해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주 뵙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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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혜이안 Says:

    하느님이 맡기신 소임을 깨달으며 풍요한 건 배풀고 부족한 건 이웃에게 배우거나 받는 게 자발적 가난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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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fr. joo Says:

    혜이안 / “자발적 가난”은 그 말 하나에 하나에 방점을 두고 생각해 보면,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삶의 선택이요 저항의 삶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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