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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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잊히지 않으리라.” 전쟁이나 학살, 예기치 못한 참사로 무고한 보통사람들이 희생당한 일을 기리려고 기념비에 자주 쓰는 성서 구절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루가 12장 6절).

차가운 돌에 새겨진 말씀 앞에 멈춰 섭니다. 촛불 하나를 켜서 한때 뜨거운 피로 움직였던 이들과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단호한 마음을 생각합니다.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불편한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잊으려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울며 웃고 뒹굴던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을 찢고 나온 생때같은 어린 목숨과 힘없는 사람의 생명을 어찌 그만 잊으라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은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동의어입니다. ‘기억 = 신앙’의 등식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 지상의 생명은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지금도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끌어내신 분을 기억하라” – 억압과 불의의 역사를 끝내고 인간에게 자유와 정의를 베푸신 하느님을 품고 그 일을 우리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와 맺은 모든 계약을 기억하겠다” –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신앙의 약속과 희망을 품은 이들과 함께하시겠노라고 하느님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이 기억의 절정은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아남네시스).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당신의 찢긴 몸을 내어주시며, ‘기억은 신앙’이라는 진리를 성찬례에 영원히 새겨 놓았습니다. 씻고 내어주는 이 기억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몸에 되새기는 일이 신앙이요, 밖으로 나가 이웃과 더불어 펼쳐나가는 일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품어 기억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 신앙의 잣대입니다. 이 잣대가 아니라 세속 이념의 편견으로 죽음과 슬픔에 정치적 혐의를 두는 일은 하느님을 가리는 인간의 오만입니다. 이 잣대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생명을 잃은 슬픔과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 막는 일은 신앙의 배신입니다. 신앙의 인간은 오롯하게 생명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식과 친지와 친구의 죽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상실의 슬픔을 우리 마음에 품습니다. 세월의 바람과 안위의 물살이 그 생명의 기억을 망각할까 염려하여 돌과 거리와 공간에, 닳지 않는 사랑의 기억을 함께 남깁니다.

하느님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이 만날 때 거룩한 신앙이 탄생합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느님의 아름다운 기억이 생명을 품다가 떠나보낸 인간의 슬픈 기억을 만나 서로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슬픔의 기억을 품어서 기억의 촛불을 밝히고 위로와 희망의 기도를 바치는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공간입니다. 영국 런던 서덕 주교좌성당의 기도처는 1989년 템스 강 유람선 침몰로 생명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합니다. 커다란 돌판에는 하느님의 사랑 노래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 쓸어가지 못하리”(아가 8장 7절).

우리는 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우리 신앙과 공동체에 마련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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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복음닷컴] 2016년 4월 17일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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