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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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요한 10:22~30)1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오?” 이 퉁명한 질문에는 낯설고 새로운 사람 예수님을 배척하는 적대의 감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오늘 장면에 이르도록 예수님은 앞에서 몇 번이고 “나는 ~ 이다”는 특유의 어법으로 당신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나는 ~ 이다”는 어법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자주 쓰시던 형식이니, 유대인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의 정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거듭 말했는데도 “분명히 말해 달라”고 다시 요구합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에 들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배척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적대감은 사람의 ‘마음을 조입니다’(24절). 멀쩡한 눈과 귀를 막아서 스스로 듣지도 믿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러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리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기는커녕, 신앙에서 떨어져 스스로 만든 편견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맙니다. 더 심해지면, 좁고 완고한 자기주장을 신앙이라 우기기 시작합니다. 특이하고 강렬한 종교 체험, 교리에 관한 근거 없는 맹신, 질문과 대화가 없는 믿음, 자신의 성취를 축복이라고 여기는 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감옥에 갇히지 말라고, 예수님은 신앙의 식별 기준을 다시 세우시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신앙 식별 기준은 ‘받아들여 아는 것’과 ‘받아들여져 속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든, 낯선 가르침이든 그 불편한 도전을 받아들여 배우는 일에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서로 인정하여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속하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이르려면, 수많은 만남과 접촉, 갈등과 화해, 배움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체험과 주장을 조율하며 사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조율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사귐의 공동체가 신앙의 식별 기준입니다. 이 관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라는 사랑의 일치 선언으로 가름하십니다. 서로 다른데도 그 안에서 함께 일치하려는 신앙 공동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이며,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신앙인은 이 부활의 공간에 ‘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이 공동체 속한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새롭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고, 대화하고 배우며, 사귀어 서로 목소리를 알아듣는 신뢰의 삶입니다. 이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가 서로 신뢰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상태,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입니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로 태어난 생명은 누구도 빼앗아 가거나 부술 수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간절함이 만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사랑이 넘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7일 부활 4주일 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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