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마음에, 죄에 대한 생각
비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거칠게 우리 성직자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렸다. 참담했다. 부끄러워 그 파편도 옮기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성직자단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깊이 간직하고 있었고, 그 선교와 사목의 진정성들을 최소한 우리 교구 안에서만은 지키고 있노라고 생각했다. 몸이 떨어진 5년의 간극이 너무 큰 걸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는 다른게 아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들이 무엇인가를 밝혀내어 목록을 만들면 그것들이 죄다. 끝내 예수님께서 그 죽임을 받아들여서, 마지막으로 단 한번에 끝장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그 대상들이 바로 죄다.
박물관, 역사책에서나 남겨져 길이길이 조롱받아야 할 “색깔 논쟁” “빨갱이” 색칠은 예수님을 죽인 가장 치명적인 죄다. 원래의 맥락을 상실하고 선전도구가 된 “정-교 분리”의 원칙과, 그 뒤에 숨어서 저지르는 위선적인 짓들이 다들 죄다. 이런 것들을 모른체 하는 것은 죄다. 그걸 모른다면 배워 깨달아야 한다. 이에 대한 무지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일은 죄다.
우리의 희망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죄를 언급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것들을 끝장내는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행동에 용서의 은총이 있다. 그 은총의 삶이 제자도다.
이 비통함과 참담함을 어떻게 다스릴까? 내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성직자단을 위해서 기도한다.
October 19th, 2007 at 6:28 am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읍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루가23:34a)
임승룡신부님의 편지를 받고도 저는 평정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ㅡ.ㅡ;
그 분은 전쟁의 경험을 온몸으로 하신 분이고 실제로 “전쟁 시절을 잊지말고 살자”는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오셨노라는 말씀을 은퇴 자리에서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다만 우리의 신앙이란 이 세상살이의 경험을 통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되는 법이지만 그 경험은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된 계시의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만했던 은총과 진리의 빛으로 다시 해석되고 변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정리했습니다.
일생을 성직자로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분으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그 어른이 실은 세상살이 경험 이상의 차원으로는 전혀 자기 초월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를 생각하며 이것이 저의 짧은 소견이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세 단계를 “불이 붙는 통나무, 불이 타는 통나무, 불을 뿜는 통나무”로 비유한 글 한 편에 제가 무지무지 사랑하고 존경을 드렸던 영성가 성 베르나르도(버나드)가 실은 십자군전쟁의 주창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황망했던 경험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의 명분으로 얼마나 끝없이 겸허해야 하는가를 반면교사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로서 한 마디 한다는 것은 정말 연자맷돌을 옆에 놓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끝에 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는 다른게 아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들이 무엇인가를 밝혀내어 목록을 만들면 그것들이 죄다. 끝내 예수님께서 그 죽임을 받아들여서, 마지막으로 단 한번에 끝장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그 대상들이 바로 죄다.”
참 아름다운 정리입니다.
신부님이 비통해하신 어느 신부님의 ‘가벼운’ 언급은 ‘죄’ 맞습니다.
그 분의 가벼운 언급이 약간 거슬리기는 했지만 교우들의 이런저런 불평과 공격에 시달리고 실제로 떠나가는 이들을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마음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제 생각도 사실 변병의 여지 없이 ‘죄’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인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죄를 죄로 깨달으면 용서받을 가능성은 늘 있는 것이지요, 신부님.
누구말대로 인생은 조금만 비겁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비겁함을 지혜로움이라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교우들과 늘 확인하고 다짐합니다.
“세상에서 지혜로운 여러분의 말씀 다 좋은데, 단 한가지 지금 우리 모두 비겁하게 살고 있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은 부정하지 말고 잊지 맙시다. 하느님 앞에서! – 다함께 아멘.”
신부님의 용기있는 감동적인 (이 싯점에서 찬사는 어울리지 않지만) 글을 통해 우리 모두의 비겁함이 고백되고 확인되고 공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사람이 비겁해지는 까닭은 자기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팔아먹으며 자괴감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악당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개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복음초식으로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실력은 갖추어야 겠습니다.
결정적인 제 경험으로는 사람이 비겁해지는 까닭은 죽음에 대한 입장정리가 아니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가 신앙인의 답이지요.
우리가 만나서 “나 이번에 죽으면 남은 일 잘 부탁해요.” 이런 말을 해본 기억이 언제인가요?
음…쓰다보니 신부님을 위로해야 하는 건지, 나를 위로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네요. 좌우간 이심전심 저도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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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19th, 2007 at 7:26 am
신부님, 제 비통함이 평정을 잃은 정도로까지 비쳤나요?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겠습니다. 실은 문제의 그 편지때문이 아니라, 그걸 옮겨놓은 다른 신부님의 “노고”와 마지막 “언사”때문에 글을 올렸습니다. 그 참에 조목 조목 따져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용서에 대한 신부님의 말씀에 백번 동감합니다. 실은 그 뒤에 “거기에 동참하는 행동에 용서의 은총이 있다”라고 적으려 했는데, 그걸 적어놓지 않고 지나친 걸 보니, 평정을 잃었던게 맞나 봅니다.
더불어 신부님께 가장 공감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죽음에 대한 입장 정리”라 언급하신 부분입니다. 이 문제가 신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교회가 허튼 길로 빠지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부활 신앙을 단박에 제거해 버리는 이 유혹은 실은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이 역시 신앙의 큰 적입니다.
http://viamedia.or.kr/2007/09/11/146/
http://viamedia.or.kr/2006/02/27/81/
좀 더 깊은 통찰로 이끌어 주신 신부님, 그리고 그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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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19th, 2007 at 5:55 pm
신부님, 임승룡신부님의 글을 읽고 신부님이 평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저인데, 저는 웬만한 사태에 무감각해져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평정을 누리는 경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평정을 가장하여 무관심, 무책임 속에 산다는 반성의 느낌이
ㅡ.ㅡ; 인 것이지요.
신부님의 비통함이 단순히 노신부님의 견해 때문이 아니라 젊은 신부님의 가벼운 (나쁜 표현으로는 경박한) 입장에 기인하고 그것이 실은 이 시대의 우리 교회의 선교적 위기의 근원이요 본질일 수 있다는 점 때문임을 충분히 글 안에서 표현하셨다고 이해합니다.
솔직히 이번 신부님의 글을 대하며 그 기백과 힘에 놀랐어요.
아주 가끔 저도 어떤 힘엔가 사로잡혀 비슷한 글을 쓰게 되는 경험이 있어서 이 글을 진정성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던 예수님처럼
갈라디아서를 쓰던 바울로처럼
당연히 ‘평정’을 잃는 것이 아름답고 마땅한 일 아닐까요.
그 열정이 바로 사랑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말들은 제 입술로 인간적으로 신부님을 칭찬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로잡은 한 사람을 순간 보았다는 말씀일 뿐입지요.^^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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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19th, 2007 at 9:14 pm
그동안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동안 제 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구요. 그런 그렇고…
예, 신부님,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의 순간이 제 안에서 지속되기를 기도하고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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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1st, 2007 at 3:56 pm
전 그저 아멘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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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6th, 2007 at 4:24 am
신부님들의 주고 받는 내용에 감동 되어서…
성공회 신부님들에게서 희망을, 성령의 힘을 깊이 느낍니다.
신부님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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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6th, 2007 at 4:10 pm
카타리나 수녀님, 여기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제 도착했고요. 전례 세미나 끝난 뒤 수녀원에서 머물겠습니다. 모든 성인 축일 미사 (목) 집전하는 수녀님을 뵙고 싶었는데, 황송하게 수녀님이 제게 양보를 해주셨더군요. 어쨌든 그때 뵙고 다시 인사드리며 자세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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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8th, 2007 at 1:29 pm
신부님
언젠가부터 귀가 간질간질합니다. 누가 말도 없이갔다고 뭐라뭐하 하는가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일 잘 감당하시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조금씩 영국교회, 한국성공회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도가 더 절실해집니다.
바쁘신 일정 몸관리 잘 하시고 주님 심부름 잘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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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12th, 2007 at 12:04 pm
에드워드 수녀님 / 참 반갑습니다. 마르타 수녀님을 통해서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국 방문 중에 수녀원에 머물면서 소식도 들었구요, 원장 수녀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기대와 염려도 함께 들었습니다. 멀리서나마 힘내시라고 응원합니다. 영국 교회의 좋은 경험을 제게도 많이 나눠 주세요. 언제 수녀님들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저도 한번 방문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이 쉽지는 않겠지요? 에드워드, 마르타 두분 수녀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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