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 예복 – 성 버나드 축일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 축일 / 연중 20주일 목요일
판관 11:29~40 / 시편 40:5~13 / 마태 22:1~141
2015년 8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축일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주님의 종 클레르보의 버나드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의 사랑을 향한 불꽃을 켜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에서 타올라 비추는 빛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 사랑과 수련의 정신으로 타올라 주님 앞에 선 빛의 자녀로 이 세상을 걷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참으로 보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클레르보의 버나드). 아멘.
저는 방금 오늘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버나드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이 시간을 열었습니다.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3천 년 전, 사회의 혼란과 전쟁의 시기에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눈물을 머금고 지켰던 입다 장군과 그의 딸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몸소 안고 분투하셨던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우리는 900년 전, 교회의 부패와 혼돈, 기근과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버나드 성인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42년 전,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낳고 기르시고 보살피다가 하느님 품에 다시 안기신 이** 교우를 기억합니다.
이 역사의 이야기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다시 말해 소명을 벗어난 신앙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고로든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삶의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앙의 좋은 습관에서든지 여러분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이 아침의 제단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의 경험을 통해서든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소명을 받았고, 참으로 좋은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저처럼 일생, 교회를 자기 집으로, 자기 몸으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아 그 직무와 책임을 진 성직자도 있습니다. 그 직무와 책임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듯 모르듯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소명을 식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역사 안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삶의 귀를 기울이면서 여러분 자신의 소명, 저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생각하고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 삶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새롭고도 도전이 되는 깨달음을 얻는 시간입니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이스라엘의 장군 입다는 암몬 군대와 전쟁을 벌이면서 난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장군 입다는 하느님께 청원하고 서원합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신다면,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며 가장 먼저 달려오는 제 식솔을 하느님께 바치겠습니다. 결국,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승전보를 들은 장군의 딸이 가장 먼저 나와 아버지를 반겼습니다. 입다에게 승리의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을 바쳐야 하는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것이니 자신이 따르겠노라는 순종으로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순종은 이처럼 위로의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더 큰 도전과 깨달음은 소명의 대가와 본질입니다. 3천 년 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은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서 아이들 많이 두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자기 개인의 학문이나 직업적인 성취, 자기 소원 성취로 생각합니다. 재산이 불어나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승진하여 남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딸이 받은 소명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소명은 아버지가 옷을 찢으며 소리쳐야 할 만큼 세상 사람이 보기에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소명이 참된 것인지를 식별하는 기준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인으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 삶의 고생과 고통을 자동으로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손해 보며 살아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늘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가족 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가족이 지닌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이 너무도 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거나, 부모님이 세상을 먼저 떠나 이별해야 하는 슬픔은 가족을 이루는 인연과 소명이 남겨준 아픔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늘 멋진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간직한 교회가 되도록 분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과 꿈이 꽃피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이때 교회는 자신도 불행하고 하고 남도 불행하게 하는 지옥 같은 곳이 되고 맙니다. 순종과 소명에 관한 식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버나드 성인은 마음 아프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좋은 의도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네.”
우리가 받았다는 신앙인의 소명, 가족의 소명, 교회 일꾼의 소명에 깃든 어둡고 아픈 일들을 껴안지 않고 피하면서, 자신의 어둠과 약점을 숨기면서, 자신의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을 방어하면서 마음을 닫고 귀를 닫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영역에서 즐거움으로 안주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이끌고 맙니다.
입다의 딸이 보여준 놀라운 평정심과 아버지를 향한 위로는 소명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당 시대가 추구하고 환호하던 삶의 가치를 거절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입다의 딸은 이후에 나온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삶을 미리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삶을 홀로 살았고 세상의 안위와는 다른 박해와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복잡한 두 이야기가 하나로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의 아들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오지 않고 매우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초대를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심부름꾼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대신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레고리(우화)이기 때문에 그 뜻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잔치를 제대로 즐길 생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잔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잔치에서 먹고 노는 새로운 방법을 나누려 해도 무관심합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대로 살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고 구박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노력에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이를 타박하고 비난합니다. 이러면 답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희망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 경력과 가족 대대로 신앙 경력이 얼마나 길든, 그들은 교회를 책임지거나 이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예 새로운 사람들로,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들도 하느님의 잔치, 하느님의 교회, 이 성당을 새롭게 채우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래도록 이 성당을 지킨 우리라면 이제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무관심과 투정과 타박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도 참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이 잔치에 초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 사건은 손님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여러 의미를 비추는 비유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뽑자면, 우리가 하느님의 잔칫상,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 교회의 신앙인과 일꾼으로서 우리가 갖춰야 할 태도와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걸맞은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초대했으니 오합지졸이든 뭐든 괜찮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이끌기 위해서 자신의 헌신과 성실, 그리고 신앙과 신학의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이에 나태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부르심은 내가 받은 것이라며 행동하는 일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오늘 복음서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쫓겨나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성인 버나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성직자들을 서슴없이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게으름은 신학의 게으름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교회 일꾼의 게으름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 성취에 몰두할 때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열심이어도 의도와 꿈이 아무리 좋아도, 그 방향이 어긋났으면, 그것은 지옥으로 향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을 찾는 행동은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남이 자신의 지식을 알아줬으면 해서 지식을 구하는 행동은 허영심에 불과합니다. 남을 섬기고 키워주기 위해 지식을 찾고 연마하는 행동, 이것이 사랑입니다.”
버나드 성인은 신앙인과 교회 일꾼들이 보인 게으름을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속을 꽉 채우는 지식, 교회를 섬기며, 신앙인을 끌어올리는 지식이 아니고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도 담지 말라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생전에 일군 수도회와 교회의 개혁으로 큰 존경을 받았지만, 거만하고 완고하고 엄격하다는 비난에도 평생 시달려야 했습니다. 십자군과 관련하여 성인 자신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의 수도회, 엄률 시토회의 수련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인은 쓰러져가던 중세에 새로운 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학, 시시덕거리며 자기 주위에서 안위를 이끌어 안주하는 신앙은 오히려 참 물맛을 못 느끼게 합니다. 참 술맛을 음미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방해하며 우리 소명의 식별력마저 흔듭니다.
42년, 아니 그 이전 이후에도 계속 돌아가시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우리 신앙의 선배와 동료들은 궁핍과 곤궁 속에서 우리를 키워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지키는 소명이 주는 무게를 그들 어깨에 감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나마 누리고 있는 교회의 처지, 우리 가족과 살림의 처지는 그들이 받은 소명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와 시간을 이유로 이 땀과 수고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기억하겠다고 우리 신앙인은 이런 망각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시 3천 년 전 입다의 딸이 받아들였던 마음 아픈 소명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한 잔칫상에 함께 모여 들었고,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모두 초대하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게으른 신앙과 신학을 개혁하며 신앙의 빛을 다시 키웠던 버나드 성인의 삶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삶을 이끌고 지탱해 주었던 가까운 우리의 선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를 기념합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이 모든 먼저 듣고 기억하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그렇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소명에 관한 기억과 배움과 헌신이 우리의 예복입니다. 예복을 입고 여기 이곳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찬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 성인 축일 본문이 아닌 평일 성찬례 성서 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