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과 아포리즘

“절대 종교와 정치에 대한 토론은 하지 말라.” 군대에서 짝으로 근무서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랍시고 고참이 들려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는 결국 총겨누기 십상이라는 경고겠다. 한국은 이 두가지 주제에 덤벼들기만 하면 무슨 이무기 싸움마냥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종교는 정도가 심해서, 다른 편끼리 붙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제 안에서마저 물어뜯는 모양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세계성공회 전체가 예외가 아닌데, 늘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부각시켜 선점하고 논의를 모양을 한방향으로 끌고가려는 의도가 뒤에서 작용한다.

인터넷이 마련해주는 익명성의 공간과 댓글이라는 반응 형식은 그 원래 의도와는 달리 덮어놓고 물어뜯는 싸움이 된지 오래다. 최소한 어떤 동네에서는… 관구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겪은 일도 있는지라 별로 눈여겨 안보게 된지 오래였는데 한번씩 들러보면 여전히 장난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깊은 생각을 나눈 포스트나 촌철살인의 댓글을 늘 바랄 수는 없겠으나, 해도 너무한 “민주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는 인상이다.

논쟁이든 사람을 관계하는 방식이든, 짧은 글이나 댓글마저도 자기 성찰이나 최소한의 주저함이 묻어난 단편들이었으면 좋겠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서 읽는 어떤 아포리즘은 논쟁의 방식이든지 그에 대한 반응이든, 혹은 사람살이에 대해서 막 내뱉으려는 말을 주저하게 하고, 잠시 두고 생각해 볼 여백을 만들어준다. 아래의 짧은 경구들은 성공회 성직자로, 노름꾼, 예술 수집가, 그리고 작가로 살았던 찰스 칼렙 콜튼 신부(Charles Caleb Colton, 1780-1832)에게서 따왔다. 특별히 요즘 말싸움들에 대한 좋은 경구들이겠다.

  • 사람들은 종교를 두고 논쟁하며, 그에 대해 글을 쓰고, 그걸 두고 싸우며, 종교를 위해 죽기까지 한다. 그러나 종교를 위해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 진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시간이며, 그 가장 큰 적은 편견이다. 그리고 겸손은 진리의 영원한 도반이다.
  • 할 말이 없거든 아무 말 하지 말라. 위약한 반론은 당신의 적을 강하게 하겠지만, 침묵은 좋지 않은 답변보다 손실이 적다.
  • 성인과 죄인: 자칭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불관용 – 막 생겨난 길이 가장 거칠듯이, 막 성인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처럼 불관용적인 죄인이 없다.

3 Responses to “댓글과 아포리즘”

  1. 바람숨결 Says:

    읽고서.. 빙그레~ 웃다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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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짠이아빠 Says:

    Amen.
    신부님 잘 지내시죠. 여기는 지금 한창 무더위와 집중호우로 아주 숨쉬기도 힘이듭니다.
    말씀해주신 이야기들 가슴에 아주 사무칩니다… 가족 모두 늘 건강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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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r. joo Says:

    바람숨결 // 오랜만입니다. 좀 심난한 가운데 쓴 건데…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웃음이 나오면 더 좋지요.

    짠이아빠 // 예, 잘 지냅니다. 짠이아버님은 아닌가 보군요. 가족들과 함께 무더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이라도 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끄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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