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하는 이유?
“비유를 들자면, 진리를 깨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지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스님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비유이긴 하지만 스님들이 보면 몹시 속상할 말이다. 하지만 비유말인지라 여기에 다른 낱말을 붙이면 어디든 통하는 말이 된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선…
스님들께 섭섭치 않도록 바꿔말하자면, “진리를 깨치기 위해 신학을 공부(성직을 지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수(신부, 혹은 주교)가 되기 위해 공부(출가)하는 교수(신부)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종교든 공부든 대체로 잿밥에 먼저 관심이 간 처지들이다. (이 말이 눈에 쏙 들어온 것은 “너는 안그러냐?”라는 내 안의 물음도 울렸기 때문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도 낱말 몇개만 바꾸면 교계나 학계나 다름이 없다.)
“인문학은 위기인가, 아닌가라는 물음 자체는 잘못된 물음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문화가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쇠퇴한다면 그것은 제도권 내의 길들여진 인문학이며, 돈과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대학의 인문학일 뿐이다. 인문학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테크놀로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도와주지 않으면 망한다면서 징징 울며, 인문학을 소외시킨 원흉인 국가와 자본의 치마꼬리를 쥐고 동전 한 푼의 적선을 원하는 것은, 이미 인문학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궁핍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자본]을 썼고,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시골* 지식인들로 구성된 學團을 구성하여,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썼다. 다산의 學團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던가. 학문적 자발성, 인간과 인간과의 깊은 신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가능한 한 학술진흥재단과 외부 기관을 우습게 알면서 그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한 낮추고, 등재지를 경멸하면서 최소한의 논문을 내고, 어떻게 하던지 대학의 행정적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권력,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출할 것! 대학 내부에 연구비를 접착제로 하여 묶여지는 팀이 아니라, 연구자 개인의 자발성에 입각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팀을 조직하는 것,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문학의 총체성과 비판성을 회복할 것! 그리하여 다산의 학단처럼 대학 내부에서부터 자본, 국가, 테크놀로지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만들고 증식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유일한 생존로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의 일갈이다.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 공장의 침묵]
http://home.pusan.ac.kr/~discuss/management/data/100-2.hwp
그나저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시골 지식인들의 학단”을 어떻게 구성해볼거나?
February 8th, 2008 at 2:48 pm
[…] 것인가? 우리 경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전통을 길어 올려 제시할 것인가? 다산의 시골 학단, 민중 신학, 민중교회와 성공회 나눔의 집, 한국의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