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님 생각

문정현 신부님이 “교회” 사목에서 은퇴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평생을 더 넓은 “보편적 교회” 안에서 사셨으니, 실제로는 은퇴라 할 수는 없겠다. 다시 그분은 대추리로 발걸음을 옮기시지 않았던가? (via 오마이뉴스)

수많은 이들이 제각기 이 분의 삶과 투쟁 속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테다.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기억되는 그 큰 그림자를 언급하기에는 내가 너무 작다. 다만 22년 전 어린 기억 속에 스치듯한 아스라한 인연처럼 새겨졌던 그분의 허허로운 웃음은 아직도 철없는 이 젊은이에게 사제직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한다. 지난 세월동안 그 웃음은 늘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눈물과 겹쳐져서 내게 나타났다. 방송에서건 신문에서건, 또다른 삶의 현장에서건.

문정현 신부님을 처음 만난 건 아마 고등학교 2학년때였으리라. 지방의 한 천주교 재단 학교에 나닐 적에 천주교인 학생들만을 위한 피정에 ‘꼽사리’ 낀 단 한명의 개신교 신자였던 나는 명단 비고란에 프로테스탄트를 뜻하는 ‘P’를 달고 있었다. 천주교로 ‘개종’할 가능성 0%인 나를 종교반에서 2년 동안 교리 교육을 시켜주셨던 선생님들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신앙인의 삶을 체험하는 피정에 나를 초대하셨다. 우리는 경남 산청에 있는 음성 ‘나환자’ 마을과 병원에서 한센씨 병으로 고통받고, 여전히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던 이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전북 장수에 있는 장계 성당을 들리기로 했다. 문정현 신부님께서 주임하시던 곳이었다.

신부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뵙지 못하고 곧장 성당 부설 “작은 자매의 집”을 들렀다. 오마이뉴스 기사에 나온대로, 작은 시골 동네에서 그것도 정신지체아라는 이유때문에 집혀 갇혀 걸레뭉치마냥 내팽겨져있던 이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이들을 위한 집을 막 마련하셨던 때였다. 거기에 있는 이들의 정신지체 등급 정도는 매우 심한 것이었는데, 당시 시골에서는 이 어린이들을 위한 복지 시설은 거의 전무했다.

곧 신부님이 오셨다. 반갑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을 맞이한 신부님은 대뜸 “막걸리 한 말 사오지 그랬어?” 하시고는, 곤혹스러워 하는 선생님들을 향해서, “고등학생은 아직 안되나? 하기야 공식적으로는…” 하시며, 이내 절룩거리는 발걸음으로 작은 자매의 집을 돌며 어린이들 이야기와 사목 활동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천국 가는 비법을 알게 됐어. 뭐 다른게 있겠어? 이렇게 살아온 걸로는 하늘나라 가기는 틀렸고, 한가지 이 애들 발뒷굼치만 놓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 따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애. 이젠 그길 밖에 없어” 하시며 허허롭게 웃어주셨다. 구원론이 별건가?

선생님은 문신부님과 학교의 인연을 말씀해 주시고, 그분이 절름발이된 사연도 들려주셨다. 그분은 우리 학교 초대 종교감(채플린) 신부님이셨다. 그 시절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분들의 시신이 벽제 화장터로 가는 것을 막고, 가족들과 시신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무릎을 다치셨다. 당시 우리 가운데 몇몇은 70년대의 인혁당 사건을 조금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어느 교회에서 몰래 상영했던 독일판(?) “광주 학살” 다큐멘터리에서 그분의 좀더 젊은 얼굴을 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외국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세월은 그 젊은 외모를 가만두지 않았으나, 그분의 신앙과 열정을 어쩌지 못했다. 그분은 이후에 이리(현재 익산)으로 자리를 옮기시며, 장계성당 ‘작은 자매들’을 마음 속에 깊이 품으셨다. 그리고는 다시 이 ‘집’을 익산으로 옮겨 아이들을 자기 곁에 두게 하셨다.

서울 명동 성당 마당에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몇번 스치듯이 다시 얼굴을 뵈었다. 이후엔 전북 지역 평화 인권 단체에 참여했던 친구를 통해서 그 단체 이사장이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듣곤 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은 대추리까지 이어졌고,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낸 후 가족들의 서러운 울음이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멀리서 컴퓨터 화면으로 지켜보았다.

22년 전 짧은 하루의 만남 이후 그분의 모습은 늘 내 삶에 참견했다. 그 참견은 때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제의 모본을 내 앞에 그려주는 것이었지만, 안주하고 싶을 때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참견이기도 했다. 내 안의 다른 변명거리가 그분의 모습을 애써 눈감게 하려 했다. 그것이 또다시 부채감과 죄책감으로 다가와서 몽롱한 머리를 한 대씩 때려주면, 이걸로 그분에 대한 존경의 소임을 다했노라고 슬며시 에누리하려 했다. 하지만 적당한 자기 위안으로 삼기엔 그분의 삶과 사랑이 너무 구체적이며 선연하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훗날 내게 “왜 문정현이 되지 못했느냐?”고 물으시진 않으실 테다. 대신 “넌 내가 기대했던 주낙현으로 살았느냐?”고 물으시겠지. 문정현은 문정현으로 살았고, 그렇게 살아가실 것이다. 이제 내 삶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물음이 어느 참견보다 무겁다.

나 같은 작은 사람에게도 이 물음을 던져주신 문정현 신부님께 깊은 합장.

One Response to “문정현 신부님 생각”

  1. 짠이아빠 Says:

    그를 보고 있으면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뭐 신부님께는 너무 거창한 굴레일지 모르지만.. 제가 볼때 이 시대의 하찮은 자칭 영웅들에 비해, 돈으로 꾸며진 영웅들에 비해 … 그 분은 진정한 영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중간에 눈물 날 뻔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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