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인간의 고통… 오직 모를 뿐!
지난 해는 여러 상황들때문에 복잡한 심정이 극명하게 교차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개인적으로 공부 과정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게 되었고 (이후에 더하겠지만), 다행히도 공부한 것들을 한국의 신부님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두차례나 가졌다. 내가 속한 교회는 세계적으로 분열로 더욱 치닫고 있으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발언한 탓에, 익명에 감춰진 이들에게서 어처구니 없는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가 지는 마당에 우리 사회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지도자로 세웠다.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 새해를 시작할 것인가 하면서 “작은 것들에 대한 마음주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해에 다짐했던 대로, “두려움 없이” 나가되,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할 것을 다짐한다. 여전히 내 마음 깊이에서 나오는 존경의 인사인 “합장”을 사람들에게 계속하겠고, 어느 신부님의 위로에 덧붙여 달았던 대로, “오직 모를 뿐”인 자세로 정진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이 참에 3년 전, 전 세계를 아프게 만들었던 쓰나미 재앙에 관한 성찰을 우연히 듣는다. 번역해서 올렸던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글도 언급되거니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성찰의 원칙을 정직하게 제공하고 있다. 도반인 신부님들, 그리고 눈 맑은 신자들과 예전부터 나누던 생각들이었으니 울림이 더욱 크다. 핵심어는 “두려움” “나마스테”(합장), “오직 모를 뿐”, “함께 고통받는 하느님,” “무한 앞에 선 유한의 겸손,” “측은지심” “의구심과 물음과 불확실성에 기초한 신앙”들이겠다.
동영상은 영국 성공회 엑스터 주교좌 성당의 톰 하니 신부(The Rev. Tom Honey)가 자신의 설교에 기초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의 한 모임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필요한 분들을 위하여 강연 내용을 전체를 우리말로 아래에 옮겼다. (강연 원고가 없어서 오역이 있을 수 있으니, 지적해 주시압!)
(강연의 우리말 번역은 아래 계속 읽기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쓰나미를 허락하실 수 있는가?”
톰 하니 신부 Rev. Tom Honey
저는 성공회 신부입니다. 사제 생활 20년째입니다. 그 기간 내내 저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두고 씨름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많은 사람들은 금세 시쿤둥해진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게다가 교회에 다니든 안다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에 대해서 우주의 관리자, 법칙을 만든 이, 하늘의 경찰관인 양 생각하고 모든 것을 명령하여 일어나도록 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은 보호하고,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에서 하느님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형용사는 “전능하신”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받아들이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예배와 전례 안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는 정말 하느님을 남성적인 보스(boss)로 믿고 있나요? 물론 그동안 하느님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감싸서 키워주시는 여성적인 면모의 하느님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힘보다는 힘없음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분이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 어떤 정의를 통해서도 알거나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른 종교와 가르침에도 깊숙히 거하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인간의 삶을 보편적이고 지구적인 의미 찾기의 한 과정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리버럴한 사람들이나 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같은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의 긴장과 분열을 만들어 낼까 두려웠던 탓이요, 좀 더 전통적인 믿음을 지닌 분들의 단순한 신앙을 당황케 할까 두려웠던 까닭입니다. 저는 파문을 일으키지 말자고 스스로 입막음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작년 12월 26일, 겨우 두 달 전, 깊은 바다에서 일어난 지진이 쓰나미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2주 뒤인 1월 9일 주일 아침, 저는 교인들 앞에 서야 했습니다. 이분들은 지성적이고 아주 사려깊은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물음을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공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 그에 따라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때 제가 한 말입니다.
쓰나미 발생 직후, 저는 캔터베리 대주교님께서 동남아시아의 비극에 대하여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 말씀의 핵심은 이랬습니다.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시는가에 대한 어떤 지적이고 세련된 설명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혹시라도 어떤 위대한 종교인이 이런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이 좀 더 행복해지고 혹은 평안함을 느끼고, 하느님에 대한 좀더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될까요?” 신문에 실린 사진대로 죽은 자기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습니다. 어떤 말도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적절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측은지심의 침묵이요, 그리고 그들을 실제로 돕는 일입니다. 지금은 설명하고 설교하고 신학을 논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곳에 멀리 떨어진 이곳 우리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난 신앙을 지니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어떤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설명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결론짓기를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나누는 하느님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셔야 분이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혼 안에 들어오실 수 있으며, 그 안에 깃든 괴로움을 경험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이 누리는 기쁨과 환희를 또한 아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슬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을 원합니다. 제게는 이것이야말로 깊은 감동과 확신을 갖게 하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운 선언으로 들립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주도적인 정통 교리라고 받아들여졌던 가르침에 따르면, 아버지요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에 따르면 하느님은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없는 분입니다. 이제 변함없으시다는 그 하느님은 제게 매우 차갑고 무정한 분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20세기에 있었던 여러 재난의 사건들을 보며 사람들은 차갑고 무정한 하느님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호와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을 도륙한 학살자를 겪으며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여기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을 받을 만한 분이 아닙니다. 만일 하느님이 방관하는 분이어서 어떤 관여도 하는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제가 알기로 이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받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영혼들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입니다. 저는 모든 점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좀 더 많은 물음을 던져야 하며, 그것들이 여러분도 함께 던지는 물음이었으면 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우리 예배에 들어있는 여러 말들이 좀 부적절하며, 조금은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화요일 아침 유치원 어린이들과 엄마들과 함께 개학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함께 좋아하는 성가를 불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 짓고”라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아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홍수가 덮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부서지고 말았네.” 그 주간에 있었던 장례식에서 우리는 “저 밭에 농부 나가”라는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2절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주님께 순종하네.” 정말 그런가요? 아무래도 우리는 쓰나미가 일어난 이후로는 교회에서 이 노래를 더이상 부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번째 큰 질문은 통제력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실걸까요? 하느님께서 통제력을 갖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순간 순간을 모두 명령하고 계시는 걸까요? 바람과 파도가 하느님께 순종하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들을 위해 조직해 놓으셨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잘 되었다는 것이지요. 어려웠던 일이 잘 극복되었고, 병이 나았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말합니다. 아주 급한 참에 주차할 곳을 바로 찾게 된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라며, 이것으로 자신의 신앙과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확인하게 되었노라고 눈을 반짝이며 제게 말했던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하실 예정이라면, 모든 일들의 흐름에 관여하셔서 쓰나미도 막으실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주차 공간을 찾는 일과 같은 작은 일만 하실 수 있고, 시간당 500마일을 밀려오는 큰 파도 같은 큰 일은 어찌할 수 없는 지엽적인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건가요?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태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쓰나미에 책임이 있든가, 아니면 통제력이 없는 분입니다.
이 비극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여러분도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파도를 타고 넘어 살아난 남자의 이야기도 있었고, 학교에서 쓰나미에 대해서 막 배운 탓에 그 위험을 알아차린 십대 소녀도 있었습니다. 또 마침 늘 예배드리던 바닷가 교회를 떠나서 언덕에서 예배를 드린 교회도 있었습니다. 설교가 아주 길어지는 바람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살펴 주신게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편애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믿는 것으로 그분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중세의 여느 군주들처럼 충성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만 잘 보살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죽더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인가요? 그렇다면 그 하느님은 최악의 편애라는 죄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이런 때가 온다면 저는 교인증을 반납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은 인간이 지닌 최상의 도덕적 사고보다도 열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요? 거대한 꼭두각시 조종자나 부족의 수호신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이러한 처참한 일을 통해서 어떤 용감한 행동과 측은지심이 등장하도록 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의 자애심 혹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어떤 위대한 우주적인 계획이 있어서 끔찍한 고통을 허용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러 완성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의 변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고 사령관이 큰 전쟁에서 쓰다 버릴 작은 부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쓰나미와 아우슈비츠를 허용해준 하느님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위대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통하여 순수하고 신실한 동생 알료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진리에 대한 대가로 어린이들이 그만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리 단언해 두겠는데, 모든 진리도 그만한 가치는 없어… 나로서는 그처럼 비싼 입장료를 지불할 수가 없어. 나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게 아니야. 그저 그 입장권을 가장 정중하게 그분께 돌려보낼 뿐이지.”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에 이 우주 전체를 만들기만 하시고는 그 통제권을 영원히 내려놓으셔서, 자연 과정에 따라 일이 일어나고 진화가 그대로 진행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좀더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느님께는 궁극적인 도덕적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차갑고 무정한 구경꾼일까요? 아니면 한 없는 자비심과 사랑만 있을 뿐 힘이 없어 어떤 것도 통제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하느님인걸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에 친밀하게 관여하시어 그 고통 자체를 느끼는 분일까요?
우리가 이처럼 믿는다면, 꼭두각시 조종자는 완전히 보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한 통제권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버리고, 전통적인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은 전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느님은 우리처럼 누구를 대신해서 행동하는 대리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초기의 종교적 사고에서는 하느님을 무슨 일이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수퍼맨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을 쳐부수고, 그들을 홍해에 빠뜨려 몰살시키고, 도시를 폐허로 만드는 성난 하느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그분의 전능한 행동을 통해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게서 전혀 아무런 일도 하시지 않는다면요? 하느님께서 모든 것들 안에 존재하신다면요? 우주를 사랑하는 영이, 자비의 현존으로 거하시며 모든 것들을 떠받들고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다면요? 삶을 이루고 있는 한 없이 복잡한 관계와 연결의 그물 속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의 자연적인 순환 속에, 진화의 과정 속에, 자연 세계의 믿을 수 없을 복잡합과 장엄함 속에, 인류의 영혼이 지닌 집단적 무의식 속에, 너와 나 안에, 마음과 몸과 영 안에, 쓰나미 속에, 희생자들 속에, 모든 사물의 깊이 안에, 현존과 부재 안에, 단순함과 복잡함 속에, 변화와 발전과 성장 속에, 이 모든 것들 안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면요?
이러한 내재함(inness), 하느님 활동의 내적인 경험이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요? 정말 알기 어렵고 더 많은 질문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독립된 존재가 전혀 아니라 그저 우주의 또다른 이름인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하느님에게 인격을 부여할 수 있을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종내에 우리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았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교리적 선언의 체계를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주 안에 있는 본질적인 선함을 신뢰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곧바로 하느님을 닫힌 체계와 완고한 교리에 묶어두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신앙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침묵과 명상 속에서, 나의 내적 공간 안에서, 지나가는 감정들과 생각들과 편견들을 조용히 옆으로 치우고 내 자신을 남아 있게 하여, 내적인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면서, 세상과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내 자신의 내면성을 가꿈으로써 그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신앙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나는 이러한 신앙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내면과 연결된 친밀성, 즉 깊이와 깊이가 서로 말하고 만나는 관계를 찾음으로써 그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면, 나와 너의 관계가 셋의 조우가 되는 만남의 장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인도의 인사법이 하나 있습니다. “나마스테”라고 하는 공손한 합장의 절입니다. 그 뜻은 거칠게 풀어보면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이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께 인사드립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마스테.
어떻게 이런 신앙에 깊이 들 수 있을까요? 모든 사물에 있는 내면성을 찾음으로써, 즉 음악과 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삶의 작고 평범한 것들 안에 있는 내면성을 찾음으로써 그리할 수 있습니다. 깊이 내재하시는 현존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물들을 특별하게 합니다. 그것은 깊은 주의와 끈질긴 기다림, 관상적인 태도와 관대함, 그리고 나 자신과는 다른 체험들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린 태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인들 앞에 서서 쓰나미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려 할 때, 제게는 그들에게 건네 줄 답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확인해 줄 만한 성서적 근거가 담긴 산뜻한 신앙의 선물 상자는 없었으며, 의구심과 질문과 불확성만 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미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종내에,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던 한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의미있는 신앙의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2008년 1월 8일)
January 30th, 2008 at 7:23 am
안녕하세요? M.Div. 2학년에 진학하는 약수동교회 차요한입니다. 톰 하니 신부님의 이 TED 강연을 지난 학기 영어 채플 시간에 함께 보았습니다. 한국의 한 사이트에 어떤 분이 친절한 자막과 함께 올려놓았더군요^^ 저희 아내를 비롯하여 영어 채플 수강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강연이었습니다. 다시 들어보니, 또 재미있습니다. 본당사목자의 강연이라는 점에서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참, CDSP 카탈로그에 멋있게 나오신 사진을 봤습니다^^)
[Reply]
January 30th, 2008 at 9:12 am
차요한님, 반갑습니다. 이미 이게 한국에도 잘 알려졌던 모양이군요. 하기야 좀 시간이 지났고, 참 좋은 강연이니까요.
그나저나 언제적 학교 홍보지였던가요? 제 기억으로는 2003년엔가 한번 모델(ㅋㅋ)이 된 적이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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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4th, 2008 at 8:58 pm
주 신부님 잘 보았습니다.
제가 참여할 수 있는 번역작업은 무엇일까요?
어디에 가면 작업할 것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솔직히 Via Media는 보기가 어려워서….
[Reply]
March 14th, 2008 at 9:56 pm
앗, 오 신부님. 이런 누추한 곳도 들르십니까? ㅎㅎ 어쨌든 반갑습니다. “번역 작업”이란게 제가 얼마전 존 케이터 신부님 수업 참여하는 분들께 드린 편지의 내용을 말씀하시는건가요? Via Media 라 하심은 제 블로그? 아니면 전례학 포럼과 혼동하신건가요?
진행 중인 번역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는 전례학 포럼에 올라가고 있구요, 다른 새로운 프로젝트는 곧 별도로 공지할 예정입니다.
곧 연락드리지요.
복된 성주간, 기쁨 넘치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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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4th, 2010 at 4:56 pm
불법을 신앙하는 저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는 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부처님의 말씀도 결국은 하나의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방법으로 풀어놓은신게 차이라면 차이가아닐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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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January 15th, 2010 at 10:27 am
이광명 / 반갑습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의 글에 공감 어린 댓글을 남기는 일이 참 어려운 시절이 된 듯합니다. 님의 열린 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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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9th, 2010 at 6:38 pm
이 글을 읽으니 조금 정리가 되는 듯 하지만
여전히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합니다.
좋은 글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위에 이광명님 의견에 저도 동의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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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3th, 2011 at 9:57 pm
Thank you!
[Reply]
December 29th, 2014 at 3:50 pm
무신론자이지만, 신이 있다면 왜 쓰나미 같은 고난에서 우릴 구원해주지 않느냐는 이른바 합리주의자들의 지극히 ‘유신론적인’ 질문에 대한 매운 합리적이자 신학적으로도 함의가 깊은 관점의 대답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스치듯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상 깊게 새겨두었다가 검색하여 다시 찾아보게 되었는데, 역시 풍부하고 합리적인 함의를 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재성을 통해 신성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나 주체성을 구원해내는(신이라는 이름의 절대적 구조주의 하의 객체로만 격하시키지 않는), 동시에 섣불리 신의 전지전능함에 기대는 기복신앙이나 슈퍼맨 같은 물리적 초월성에 대한 질 낮은 숭고를 부정해내는 이 복합적인 이야기는 다시 듣고, 남에게 이야기하고, 같이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 보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번역과 영상 링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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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9th, 2014 at 3:53 pm
오타 수정:
둘째 줄의 ‘매운’ -> 매우
덧: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나 주체성을 구원해내는”에 대하여 -> 신을 내 안에 ‘들이는’ 능동적 노력이 가진 탐구적, 능동적, 윤리적 성격. 단지 무분별한 방종과 즉흥적인 쾌락과 분별 없는 자유의 무한한 확장을 말하는 가짜 주체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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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0th, 2016 at 7:12 am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방문했어요. 궁금한 것이 생겼거든요. 오늘 어떤 글에 댓글을 달다가 생각이 좀 정리되었어요. 아마 스치듯 어디선가 들었었던 이야기가 맞춰진 것 이겠죠.
이 생각이 전통적인 생각인지 혹은 전통과 심하게 어긋난 것인지 궁금해졌어요. “전지전능”에 관한 것 이라 이 글 밑에 붙어요. 본문의 글은 왜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에 대한 것같네요. 제가 댓글을 달았었던 글의 주제는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로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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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사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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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전지전능하다면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을까 고민한 적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면 만들 때부터 인간이 어떻게 될지 알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의지를 줄 수 없다면 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능하다면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또는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들기 전부터 전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다면 인간은 신이 바라는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바꾸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려고 고집한다면 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신은 전능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또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그렇지 않게 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이를 신의 관점에서 딜레마라 불러도 되고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악을 선의 부재, 또는 신이 바라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면 세상의 악은 신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