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감리교 목사이자 전례학자인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 1932-2004)는 교편에서 은퇴한 해에 펴낸 책(The Sacraments in Protestant Practice and Faith, 1999)을 천주교 신자인 아내에게 헌정했다.

화이트는 책 말미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를 인용하며 개신교 신학의 미래가 성사성(sacramentality)에 대한 감각과 실천의 회복에 달려 있다고 공언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개신교 신학의 운명은 “자연과 성사”(nature and sacrament)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개신교 신학의 완성은 “성사적 (시공간) 영역”(sacramental sphere)의 재발견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이어서 현대 (개신교) 교회 안에서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있는 장애물 세 가지를 열거했다.

[1]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주요 장애물은 성사(sacraments)를 하느님의 현존하는 행동으로 보기를 꺼려하며, 단지 과거에 있었던 하느님 행동에 대한 인간의 기억으로만 보려는 태도에 있다. 이런 처지에서 성사를 하느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사의 효과에 대한 감각이 개신교인들에게는 너무 없다… 계몽주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모든 연관을 잘라내 버렸다.

[2] 최근에 일어나는 위협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 운동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교회와 문화의 차이를 극소화하려 한다… 그리고 성사들과 교회력, 그리고 성서정과들이 우리 문화에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이를 주변화시킨다.

[3]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세번째 장애물은 대체로 생각없이 대충 대충 성사들을 집전하는 것이다… 준비없이 대충 드리는 성찬례는 그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과의 사귐이라는 신앙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성사들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해지면서 이제 성사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

근대 전례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이 태동하여 영향을 주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지만, 그 깨달음과 울림은 식민지 선교의 유산에 파묻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는 멀기만 하다. 아니 최소한 주어진 전통에서나마 겨우 그 “감각”을 몸으로 익혀 온 것들 마저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양상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세가지 장애물을 빗대어 우리 교회(최소한 한국성공회의 전례 현실)를 성찰해 볼 일이다.

흥미롭게도 화이트는, 역사적으로 오래 논의되었던 성사(sacraments)와는 달리 “성사성”(sacramentality)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이르러 부각되었다고 하면서, 그 근원을 성공회의 프레데릭 모리스(F. D. Maurice: 1805-1872)의 [그리스도의 왕국] The Kingdom of Christ (1837)에서 찾았다. 모리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니, 물질적인 것(the physical)은 신성한 것(the divine)을 만나는 수단이요.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끄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질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이 물질 세계는 신성의 체취를 풍긴다” (화이트의 요약).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리스의 성사성 이해가 사회 정의를 위한 성사적 행동들과 이어졌고, 그것은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그리고 이후 전례 운동을 통해서 깊어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근대 성공회 전통과 기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점차로 잊혀지는 전통이기도 하다. 화이트가 “성사성”를 설명하면서 성공회 전통의 신학자들(Percy Dearmer, A. G. Herbert, William Temple, John Macquarrie)에 기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어디에 곁눈질하고 있는가?

5 Responses to “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1. 김바우로 Says:

    개신교에서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있는 장애물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개신교 목사님들이 성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다는 것이겠죠. 물론 제가 활동하는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정용섭 목사님(기성)이나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처럼 성사를 교회의 전통으로 존중하고 실천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다수 개신교 목사님들이 성사에 대해 단순히 예식 즉, 종교의식으로 생각하더군요. 평신도들은 특히 개인적인 종교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는 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와 기쁨전달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개신교 교회들이 교회력, 그리고 성서정과를 지키지 않는 것도 이들 전통들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모르고, 오히려 낯설음때문에 거부감을 갖죠. 다행히 복있는 사람, 홍성사등에서 예전과 교회력에 대한 책들을 출판한 적이 있어서, 개신교 형제들중에도 예전, 성사, 교회력에 대해 이해하는 분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죠.

    [Reply]

  2. fr. joo Says:

    바우로 / 여기서 우리를 쏙 빼놓고 남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게 더 중요합니다.

    [Reply]

  3. 김바우로 Says:

    그렇지요. 생각해보니 우리의 잘못은 못 보면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ply]

  4. 장현민 Says:

    식민지 선교의 유산에 파묻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는 멀기만 하다.

    이 부분에 있어 괜히 딴지걸기 해봅니다. 뭐 가톨릭도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영향이 무척 크니, 식민지 선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이나 미국처럼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사실상해온 국가는 아니라는 전제하에…. 위에 Fr.Joo 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계는 개신교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톨릭은 뭐 그냥 그대로 성사를 받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성사의 주체를 평신도까지 끌여들였던 초기 선각자들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Reply]

  5. fr. joo Says:

    장현민 / 의견 감사합니다. “식민지”를 정치-경제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른바 “선교 식민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이들의 반성과 성찰이 창조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이식된 사고 방식과 그 적용 전체를 말한다면요.

    지적하신 대로, 초기 한국 천주교의 선교사에 나타난 자발적 신앙 신앙 수용과 실천(이를테면 가성직 제도 같은)은 남다른 것이었으나, 프랑스의 외방 선교회 개입 이후와 그 유산에 대한 반성이 천주교 안에서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 상 “성사”에 대한 이해나 강조가 약했던 점이 있지만, 그것은 전통 상의 차이이지, 그것이 곧바로 “성사”를 선교사들이 물려준 대로 이해해 온 (한국) 천주교나 (한국) 성공회의 문제점을 덮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는 “그리스도교계”가 어떻게 우리의 맥락 안에서 다시 성사의 풍요로운 의미들을 새롭게 깨닫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 은총에 따라 살겠느냐는 것이겠지요.

    [Reply]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