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구원: 성사적 원칙과 성공회 전통
그동안 몇몇 신부님과 대화하는 참에 사목적 경험에서 나온 신학적 관심들은 결국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나눴다. 그렇다. 전통적인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 분열까지 야기하는 최근의 신학적 논란들도 실은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한 변주인 경우가 많다.
역사적 경험과 신학적 자료를 통해서 좀더 너른 성공회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 온 폴 에이비스(Paul Avis)는 Anglicanism and Christian Church 개정 증보판(2002)을 거의 새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교회와 구원”이라는 장을 새로 섰다.
에이비스에 따르면,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의 생각에서 어떤 통일된 이념을 잡아내기는 어렵겠지만, 거칠게 나마 교회와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잡아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다.
-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이 구원과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드러나는 근본적인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는 원칙이다.
- 이 새로운 삶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사회, 즉 교회 안에 자리한다.
- 교회의 삶 속에서 성사적 원칙(the sacramental principle)이 중심이 된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세상 전체를 위한, 특별히 사회적 문제들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몸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이끌어 낸다.
-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우주(cosmos)의 구원을 향한 희망을 동반한다.
- 이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은 하느님의 전망에 담겨진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리킨다.
상세한 개념풀이가 필요해서 이를 당대의 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설명하는 것이 그 새로운 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생각을 진척시켜 나가 볼까? 이 특징들은 서구적 근대 신학과 성공회 전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 안에서 두루 확인되는 것들인데다, 또 현대 신학의 몇몇 흐름에 대해 매우 고전적인 도전을 담고 있으니 깊이 살펴보기에 적절한 것들이다.
위의 특징들은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성사 혹은 전례의 위치(cf. Karl Rahner)에 대한 확장시킬 수도 있겠다. 이 점은 곧장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교회와 전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에 대한 종말론적인 선체험(foretaste)이라 할 전례와도 연결된다.
도전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선 소위 몇몇 포스트(post)주의의 변종 신학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거나, 그것이 혹은 전통주의나 근대주의로 도매금 처리되면서 “이 세상”을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바라 볼 저 세상 사이의 긴장감이 약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긴장감 상실이 이른바 근대 성공회 신학 자체 안에도 여러모로 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전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성공회는 우선 성사론적 이해(cf.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에 기운 특성이 강하므로, 여기서 비롯한 “세례적 교회론”(Baptismal Ecclesiology)과 “성찬례적 교회론”(Eucharistic Ecclesiology)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하겠다. 이런 근거와 실천에서라야 교회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를 비추고 몸소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 에이비스가 최근 이 점에서 다시금 “선교”1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마땅한 방향이다(Ministry Shaped by Mission, 2005).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전례와 선교를 이어가는 점들이 뚜렷하지 않아 아쉽다. 아니 그건 전례학자들의 몫이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근대 전례 운동의 지향점들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별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실험되었던 이런 성사주의 운동의 경험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다시 이런 말들을 정리하자면…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 여기서 말하는 “선교”는 내내 “하느님의 선교”에서 바라본 것이니, 19세기 제국주의 선교의 역사를 흉내낸 “전도 여행” “단기 선교 여행” 혹은 “교회 성장 전략” 등과는 아무런 혈친적 관계가 없다. 노파심이다. [↩]
May 12th, 2008 at 6:51 am
전체적으론 제가 너무 과문해서 읽기가 어려웠지만, 마지막 문단,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이라는 지점에서는 문외한으로서의 호기심이 생기네요.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다소간 형용모순과 같은 조어도 몹시 흥미롭습니다. 물론 이런 세속적 호기심에 대해 말씀 올리는 것이 다소 외람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요.. ^ ^;
이 부분들에 대해 좀더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짐작으로나마 이것을 풀어가는 것은 글 하나 둘로는 해결되지 않는, 수십, 수백의 글과 그 글들을 잉태한 실천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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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2th, 2008 at 12:53 pm
민노씨 / 민노씨가 과문하다고 생각한다면, 제 글이 친절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그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풀어갈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신학적인 작업은 이미 많이 이뤄진 것이고요, 저는 그 희망을 “전례” 안에서 “먼저 맛보는” 것에 좀더 관심을 두겠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희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를 언급한다면, 두 사람의 저작을 들 수 있겠습니다. (부분역과 오래된 번역으로 읽었던 것인데, 최근에 전권 번역과 새로운 번역이 각각 나왔습니다. 저도 이 참에 다시 살펴야겠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칙] (박설호 역, 열린책들)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블로흐라는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방향의 저작을 낸 것이죠.
몰트만 자신이 블로흐의 영향을 기술한 내용이 있어서, 아래 링크에 따다 놓습니다. 생소한 신학 전문 용어들이 많지만, 해박하시니 금방 감을 잡으리라 생각합니다.
http://fileurls.com/feojha (5월 19일 이후 다운로드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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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5th, 2008 at 5:33 pm
고맙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 )
추.
신부님 말씀을 들으니 엉뚱하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라서 예전에 썼던 글을 제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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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5th, 2008 at 6:58 pm
미친듯이 고도를 찾아서 – [고도를 기다리며] 단상…
여기에 최초 발행했던 글을 추고해서 옮긴다. 예외적으로 거기에 있던 글은 지우지 않는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서툰 것이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
May 16th, 2008 at 8:09 pm
민노씨 / 꼬리는 무는 연상들은 참 다양하고 방향도 이채로운 것 같아요. 그게 시각의 확대를 가져다 주고요. 덕택에 저 또한 민노씨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글 잘 읽었고, 그 때문에 다시 여러갈래로 뻗쳐나는 생각들 때문에 또 좀 복잡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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