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위로와 도전 사이에서

아무리 시급한 걱정거리라 해도, 아무리 친형보다 가까운 신부님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객지에서 만난 분을 붙잡아 두고 따져 묻고 비판을 하는 일은 성급하거나 철 없는 일이었다. 그리 행동했기에 일말의 후회가 밀려오고, 잠시나마 함께 말없이 바닷 바람 쐰 것으로 무마하고 싶은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속한 작은 것 안에서는 아웅다웅하다가도, 자연이 주는 신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분을 보내드린 뒤, 여러 생각과 함께 돌고 돌아서 다다른 생각의 편린은 종교의 근본적인 행동적 기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태에 관한 성찰들이었다.

종교의 “기능”에만 집중해서 깊이 내려가면 두 가지 근본적이며 대립적인 면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곧 “위로”와 “도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를 “사제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두 관계의 긴장 혹은 균형이 무너질 때 종교는 한쪽으로는 사이비 종교 집단, 다른 한쪽으로는 사회의 한 운동 단체가 된다. 이럴 바에는 종교에 참여하기 보다는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봉헌하거나, 시민 운동 단체에 기부하는 일이 “실용과 효과” 면에서 훨씬 낫다.

종교가 사회에 대한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근대” 이후, 종교는 그 여러 기능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분야들에 기득권을 내줘야 했다.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가? “그래도 그렇다”고 당연한 말로 대답하기 전에, 그 근본적인 “위로”와 “도전”의 긴장감이 어떻게 작동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자기 변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은 종교가 사회와 정치에 도전할 때, 영적인 책무와 ‘위로’를 꺼내들어 맞불 놓는 일로 드러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을 향한 위로를 말할라 치면, 교회 안에서는 전통 교리에 입각한 심판으로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회 운동 진영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는 해묵은 명제로 종교 자체에 도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참에 그 사이에 선 선한 사람들의 자리는 좁아진다. (그래,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직자든 신자든 이런 자기 변명에 스스로를 적절히 적응시켜 살아가는 일이 편만하다. 적절하게 눈 뜨고 눈 감거나, 짐짓 모르는 체 사팔뜨기가 되기로 작정한다. (신자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성직자의 잘못은 신자들 탓이 아니지만, 신자들의 잘못은 성직자들 탓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은 뒤로 미루고, ‘위로’와 ‘도전’을 적용하는 기준 설정이 최우선이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말들 앞에 있는 어떤 수식어들을 늘 염두했다. 그 제한적 수식어들이 사라지는 과정과 교회 권력의 보편화는 같이 갔다. (모든 일반화와 보편화는 항상 위험하다! 그 안에서 어떤 작은 목소리들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잊혀졌던 수식어들을 성서와 복음에 비추어 되살려 본다면,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위로”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위로과 보살핌은 약한 이들이에게 우선적으로 가고, 도전과 비판은 힘 있는 자들을 먼저 향한다. 물론 그 약함과 힘 있음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모든 약한 것이 다 위로의 대상이 아니요, 모든 힘 있는 것들이 도전의 대상도 아니다. 어떻게 약하고, 어떻게 힘 있는지를 따져서 그리 한다. 여전히 식별의 문제이다.

궁한 백성의 배고픔과 아우성은 위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기적인 욕망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군중의 이름으로 누구를 십자가의 못박는, 하나된 욕망의 분출이 되면 그것은 비판과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한편,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그 억압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도전해야 하지만, 그 힘의 구조 안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입하여 자유롭지 못한 약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위로와 보살핌도 함께 가야 한다([대장금] 정상궁의 대사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여기서 여전히 유효한 식별의 기준은 영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약함과 권력에 관한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가 이 식별에서 엇나갈 때, 본의든 아니든, 그 적용은 전혀 반대의 행동을 낳는 일이 빈번하다. 사실 계급 의식 혹은 의식화 같은 거창한 말의 본연은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결과는 작으나마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고 영성 수련하고, 때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말씀 읽고 듣는게 아닌가? 그러자고 신학하고 대화하는 것 아닌가?

우리 성공회 안을 들여다 볼까? 치부 자체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른체 하거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 여기서 그만 두고, 몇 사람의 글을 인용하여 마친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가 종교보다는 도덕론이 낫다고 생각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기도가 쉽기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기도를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은 좀더 신랄했다.

인간의 영혼에 관여한다고 고백하는 어떤 종교가 그 인간들을 내치는 빈곤과, 그들을 목 죄는 경제적 조건과,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메마른 먼지 같은 종교일 뿐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떠오르는 정상궁([대장금])의 마지막 부탁

그러나 어릴 적 내가 본 화려한 궁은 허상이었어.

늘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궁(宮)은 외로웠다.

모두들 아마도 그 외로움에 지쳐 그렇게들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 게야.

외로움에 지쳐 승은이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등바등 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부(富)라도 얻어야 겠으니 남에게 빌 붙었을테고
외로움에 지쳐 권력이라도 얻어야 겠으니.. 권모술수라도 써야했겠지..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네가 네 원칙을 지키고싶은 것만큼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러지 않으면 네 단호함이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낮설 게만 느껴질게다.

쉽지않지! 단호하게 하는 것과 융통성 있게 하는 것!

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져!
그게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

6 Responses to “종교: 위로와 도전 사이에서”

  1. 바람숨결 Says:

    깊은 성찰..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글로 풀어내는지 한 수 배워 갑니다.

    대장금의 그 대사.
    “네가 네 원칙을 지키고싶은 것만큼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러지 않으면 네 단호함이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낮설 게만 느껴질게다.”

    저는 불쌍히 어여삐 여기는 것을
    ‘애달프게 여기다’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어디까지가 애달프게 여기는 것인지
    어디부터가 힘 앞에서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더군요.

    물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답은 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을 때도 많거든요.. ^^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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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짠이아빠 Says:

    잘 지내시죠.. 가족 모두 건강하시구요.. ^^
    전 최근에 ‘죽음의 밥상(The Ethics of what we eat)’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근데 이 책 서문에 윤리적 식품 소비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가 제시한 ‘Sharing God’s Planet’라는 보고서가 있다고 나오더군요. 그게 기독교계 최초의 먹을거리 선택에 대한 윤리 가이드라인이라고 하던데.. 혹시 보셨는지요?

    보셨다면.. 국내에도 전파가 가능한 수준의 내용인지 코멘트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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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r. joo Says:

    바람숨결 / 지적하신 대로 “어디까지” 인지는 늘 헷갈리는 문제입니다. 그 어려움은 누구나 마찬가지겠고 깊은 식별의 대상입니다.

    최소한, 작고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체로 비판자는 스스로를 도덕적 우위에 놓고 비판 대상에게서 자신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늘 옳고 효과적이냐는 의문이 듭니다. 정상궁에서 배우는 바는, 정말로 비판 대상을 넘어서려면 그 대상의 안쪽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해당하는 문제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내력을 살펴야 하고, 뭐랄까 감정이입(empathy)에 기초한 깊은 대화를 진행시키면서, 이를 통해서 어떤 공유점을 나누어야 한다고 봅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만 두고 공방하면 서로 엇나가지요. 정상궁은 그 내력과 맥락을 지긋한 연민으로 응시합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비판은 차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정치-사회 권력이 가지는 힘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이 매우 공식적이며 공적이고, 이에 따라 억압성과 폭력성의 차원을 달리 보야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는 어떤 비판의 방식도, 대화의 방식도 달라지겠지요. 예를 들어 2mb 정권의 삽질에 대해선 어여삐 여기는 것 자체가 감정의 낭비니까요.

    언젠가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 저항과 본회퍼의 저항 문제를 두고 말했던, 양심이 있는 공동체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대한 저항 방법의 선택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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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fr. joo Says:

    짠이아빠 / “죽음의 밥상”이라는 책의 원제목(The Ethics of What We Eat)이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광우병을 계기로 건강도 건강이지만, 좀더 본질적으로 우리 먹거리의 윤리 문제를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언급하신 보고서(Sharing God’s Planet)는 모르고 있던 것인데, 말씀 듣고 찾아보니 영국성공회 웹페이지 자료실에 있군요. 다음 링크를 따라 가시면 전문을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cofe.anglican.org/about/gensynod/agendas/gs1558.pdf

    열어보시면 쉽게 파악하시겠지만, 그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지구 환경 전반”에 관한 서구적 사고 유산에 대한 반성과, 성서적 신학적 원칙의 재해석, 그리고 교회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먹거리 자체에 관한 것만은 아니겠고요. 우리 “성공회 환경 연대”에서 번역해서 자료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운동에 적극적이신 서울 박주교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캔터베리 대주교님(로완 윌리암스)은 언제나 그렇듯 그 짧은 서문에서도 깊은 통찰을 보여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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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짠이아빠 Says:

    신부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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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혜이안 Says:

    우와, 대장금이 저렇게 문학적 이었나요?
    대장금 할 때 이영애 얼굴만 봤는데…^^
    대사는 까먹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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