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 – 신적인 긴박성과 인내심 사이에서
복음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들라면, 주저 없이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의 고별사를 들겠다(요한 13장~16장). 뒤따르는 예수의 청원 기도는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의 핵심이다(17장).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란 무엇인가? 그 선언을 교회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라치면 예수님의 일치 청원 기도 같은 간절한 깊이는 쉽게 사라지곤 한다.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동안 일치를 추구했으나, 늘 자신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맞섰다. 로마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교회는 정통 신조를 진리인 듯 내세우며 그에 합의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가시적 일치는 필요 없으며 영적이며 내적인 진리를 개인적으로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개신교에는 편만하다.
세계 성공회는 여성 성직 문제, 동성애자 성직 문제를 두고 분열을 거듭한다. 지난 20세기 스스로 선두에 섰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의 노력과 성과를 무색케 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진리’를 손아귀에 잡은 것 마냥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저마다 진리의 ‘파편’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성공회 전통의 겸손함도 엿보기 어렵다.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다급하게 정죄하느라 바쁘다.
지역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가? 교구의 전례 행사는 그 본뜻에서 성직자들과 신자들, 즉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성 목요일 성유축복미사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사제 서약 갱신”도 그 서약의 되새김으로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위에 대한 ‘순종’을 위한 행사로 비치는 동안에 그 일치의 뜻도, 원래 예식의 뜻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뒤에는 어떤 불신이 자리하고 있을 텐데, 희미해지는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모종의 으름장이 뒤따른다면, 그 조직의 앞날이 걱정스러울 테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억압적 권력의 행사는 대체로 ‘일치’라는 이름 아래서 진행되었다. 예수님 고별사와 청원 기도에 담긴 일치의 근본인 사랑이 희미해지고 조직과 특권을 위한 다급한 일치가 앞서면서 그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일치를 빌미삼아 통제가 자리 잡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례도 그 본래 넓은 뜻을 잃고 교회 조직의 언어와 행동을 획일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참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토막을 읽는다. 그 자신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교권의 최고 위치에 있으며,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에 획을 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치는 ‘신적인 긴박성과 신적인 인내심’ 사이에 자리 잡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마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치.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치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알도록 기도하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와 진리와 거룩함.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일치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교 일치는 신학적 얼버무림이나 무관심에 근거할 수 없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일치는 진리의 회복과 더불어 가야 하고, 우리 삶을 다시금 거룩하게 하면서 가야 한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긴급한 일이다. 그 어느 것 하나를 먼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거기엔 신적인 긴박한 요구가 있고, 신적인 인내가 있다.
in Introducing the Christian Faith, SCM,1964.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