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
1.
여러 죽음의 소식들이 지난 몇 주간 내 자신과 주위를 우울하게 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야만을 고발하며 한국의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저혈당 쇼크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이웃 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전에, 이제 지성에 경륜과 너그러움을 더하여 새로운 목회를 꽃피우던 지인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셨다. 그동안에 이웃 도시에서는 네명의 경관이 총격에 쓰러졌다. 죽음은 그 자체로 삶 전체를 압도하며 넘실 거리기에, 옆에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할 말을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앞에 침묵과 눈물만을 보탤 뿐이다.
2.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침묵과 눈물 속에서 죽음은 숭고하다. 죽음은 이후에 내내 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쓰러진 이가 젊을 수록, 혹은 더 많은 기대를 받던 이일 수록, 무너지는 억장과 슬픔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 의미는 비루한 언어로 담기에 벅차다.
그 슬픔의 눈물 안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같은 직종이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아, 나도 준비해야지, 생각한다. 이 순간, 그 죽음의 사건은 타인의 것이 되고, 금새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런데 이게 연민에 의한 감정의 중첩 지점인지, 아니면 타인의 죽음과 내 삶을 거리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인지 잘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어려운 걸 보면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삶의 자리가 달랐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응시보다, 이내 그와 연관된 이야기거리로 관심이 옮아간다. 때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딱히 서른 생애를 이 땅에서 몸부림쳤던 삶 자체의 숭고함에 맞춰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에둘러 실체를 가리고, 귀 막고, 덮어두더라도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진실은 감춰지고, 뒤마려운 이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죽음과 삶 자체보다는 이야기거리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가십거리가 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게 된다. 우리가 늘 그들 삶의 한부분씩을 훔치며 소비했던 것처럼.
3.
밥 한숟가락을 물어 목구멍에 넘기려는 찰라, 한웅큼 치밀어 오르는 울컥증과 그만큼의 눈물이 섞이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빈자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긴다. 생의 욕구가 더 큰 탓일까?
4.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이다(적어도 우리 전통의 장례와 그에 대한 내 경험의 해석으로는). 죽은 이를 보내려는 일정이 가져온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훔친 눈물은 금새 지인들끼리 나누는 반가운 히히덕거림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반가움의 결이 어떤 불폄함 없이 겹쳐진다. 우리 삶은 이렇게 겹쳐진 것들도 가득차 있다.
5.
우리에게는 죽음을 설명할 말과 논리가 많지 않다. 때로 종교를 통해서, 혹은 경전의 몇 구절과 그 해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하는 바, 혹은 희망하는 바를 선포할 뿐이다. 엄밀히 그건 설명도, 논리도, 설득도, 심지어는 위로도 아니다. 다만 이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화두일 뿐.
6.
그렇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분노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일 때, 그 죽음이 조건지어져 있을 때다. 그건 사랑때문이다. 아직 사랑할 일이 많은 이가 이내 꽃피울 그 사랑의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도록 내몰린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기회마저 어떤 이에게서 빼앗아 버릴 때, 그 죽음을 대하는 분노가 스러져서는 안된다.
다시, 삶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한 연민의 중첩 과정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게 악다물며 되뇌이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더 많이 기뻐해야지,””사랑의 기억으로 삶을 수 놓아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서는 안될 일이다.
그 사랑을 막는 것들, 훼방하고, 심지어 훼손하는 것들에 향한 분노가 여전히 살아 남아야,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 죽음과 삶이 숭고한 것은 사랑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침묵과 눈물로 말을 잃는 것도 실은 그 사랑때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사랑을 앗아가는 것들과 끈질기게 대결해야 한다.
March 31st, 2009 at 12:47 am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단순한 문장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현종의 시어들 가운데 하나인데요. 정현종의 시처럼, “냉장고 안에서 콩나물이 쑥쑥 자라는” 이 찰나같은 세속의 삶 속에서 좀더 많이 사랑하고, 좀더 열심히 사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문득 세속적인 욕망의 사슬에 엉켜 있는 한낮 소유욕이거나, 부질없는 집착이라는 생각… 가령 어떤 여자아이를 안고 싶은, 만지고 싶은 그런 바람들, 그런데 정작 그 말초적인 욕구가 어떤 삶의 이야기들도 만들어내지 않는 물화된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과연 내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건가, 이런 메마른 감정에 닿기도 합니다…
말이 좀 어긋나버렸지만… 최근에는 성취하지 못한 어떤 욕망의 대상으로, 어떤 소망의 대상으로,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한낮 꿈같은 연애감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학시절 몹시도 좋아했던 아이의 꿈을 꾸곤 합니다. 물론 그 아이는 이미 결혼을 해서 저와는 다른 길을 걷는, 그것도 한참이나 된 아이인데… 아직도 꿈 속에서 조바심나는 풍경들이 잠을 깬 뒤까지 잔영을 남기면… 정말 사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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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st, 2009 at 12:48 am
최진실과 장자연 : 두 가지 풍문…
이 글은 어쩌면 선동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글이다. 객관성을 흠모하고, 선동질 싫어하는 고매한 독자들은 피하기 바란다. 1. 고 최진실과 고 장자연의 죽음은 그녀들 자신에게, 그녀들의 가…
March 31st, 2009 at 6:57 am
죽음의 이야기..
그리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
고개를 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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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st, 2009 at 11:14 am
민노씨 / 우선, 마지막 말은 정현종의 시어에서 가져온 것 맞습니다.
그리고, 어떤 감정(욕망이든 소망이든)의 잔영이 없는게 사랑일까요? 그래서 사랑은 애틋함과 한 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도된 욕망에는 이 애틋함이 없어요.
한편, 사랑에 너절하게 덧붙는 것들이 많겠지요. 그게 사랑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지고, 순백, 순결 같은 표현은 실재하는 사랑과 거리가 멀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민노씨의 “연애감정”에서 더 살아있은 사랑의 냄새를 맡습니다.
핑백으로 붙은 글, 정말 고마워요.
서울비 / 이 생각들 사이에서 한동안 멍했어요. 그래서 잡히지도 않는데 적어 올렸습니다.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더 확장될까 싶어서. 그런 참에, 함께 고개 숙일 수 있어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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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st, 2009 at 11:44 am
신부님의 따뜻하고 깊은 (영성적) 성찰에 공감과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신부님 말씀처럼, 삶의 시간 속에 그저, 어쩔 수 없는 또는 예기치 못한, 운명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감내하기 힘들만큼 슬프고 아픈 일일진데, 도처에 넘쳐있는 강요당한 희생과 내 몰린 죽음들은 처연함을 넘어 분노를 자아냅니다….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린 종교, 이 시대의 종교가 어디에 서 있는지. 종교마저도 그저 체제의 과실을 따먹는 욕망의 존재로만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를 희생제물로 바치지 못하고 늘 타인의 희생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교와 제관들…. 그 제관들 무리에 끼여 한 생을 편히 살고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많지요….
신부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성찰이 그 무엇을 낳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시작의 씨앗은 될 수 있으니…. 고뇌하는 사제로 서 있어 주셔서 저에겐 작은 힘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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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March 31st, 2009 at 10:26 pm
pilgrim / “거룩한 분노”에 대한 말씀 감사합니다. 거룩할 것을 자임한 종교의 행태가 보기 민망할 지경이 되어가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어쨌거나 거룩할 것은 삶일테니, 분노 역시 삶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데 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외로워지면 투항하기도 쉬운 법인데, 이런 식으로나마 힘을 나눌 수 있다는 말씀에 저 역시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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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9th, 2009 at 10:58 am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이르다는 자만 속에서 최근에 있었던 제 체험은 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습니다. 예상할 수 없는 삶의 사건들 속에서 불현듯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야 겠다는 신부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악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해봅니다.
“주님, 사랑하기에도 주어진 생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 안에 사랑하지 못하는 어둠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의 빛으로 채워주소서. 빛으로 빛을보는 나약한 인생이 오늘도 업디어 부르짓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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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April 10th, 2009 at 10:01 am
로렌스(KU) / 전화받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회복이 빨라지기를 바랍니다. 저도 경미한 것이었지만, 심리적이나마 그 이후의 충격이 여러모로 큽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은 죽음들을 주위에서 봅니다. 그 가운데서도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이 여러 사람을 애타게 합니다. 성삼일에 이런 고통과 죽음을 다시 돌아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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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3th, 2009 at 8:04 pm
삶과 죽음의 문제 … 이미 태어나기를 인간인 우리가 끊임없이
되뇌어야 할 화두로 여겨집니다.
지난 시절에는 삶과 죽음을 나누어 보기를 즐겨 했는데,
이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눈을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법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지도 …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 한마디가 바깥에 가득한 따뜻한 봄햇살처럼
마음에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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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April 21st, 2009 at 6:30 am
로렌스 / 나이 들어간다는 표시이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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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8th, 2011 at 1:26 pm
[…] 기록들이 선연하다. 관음증일까? 남이 남기고 간 편지를 들춰 읽는 일. 2년 전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한 연예인의 편지를 읽는 일. 친필인지 확인되지 않았다고들 하는 그 편지를 읽는 일. […]